로마서


                              3과 하나님의 의 (1)

                                                         (3장 21절~31절)


   복음에 의하면 어떻게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가?


   지금까지 살펴 본 내용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 있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죄에대한 형벌의 선언은 죽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죄를 어떻게 벌하시며, 또 죄인을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가?" 라는 중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사도 바울은 본 과의 본문에 "칭의"의 교리를 그 해답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 단원은 귀한 진리를 가진 매우 중요한 단원입니다.


   칭의(稱義)


   먼저, 신약 성경에 나타난 칭의의 뜻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1. 칭의는 죄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이 그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 완전히 합당한 자로 여기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2. 칭의는 신자 자신이 무죄하게 되거나 외형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뜻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자를 의의 옷으로 가리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부터 그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 보시고, 하나님께 그가 용납됨은 그 자신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행하신 일 때문입니다.


   3.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는 것을,  마치 죄를 범한 일이 없거나, 죽은 것과 같이 정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들은 대체로 옳은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들은 다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이 이루어졌음을 뜻합니다. 칭의는, 그 이상으로 죄인이었던 자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심으로 의롭지 않은 그들을 실제로 의롭다고 부르시며, 죄가 있어도 죄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의가 없어도 의로 여기십니다.


   5. 그렇다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범하는 죄를 무마하시거나 묵인 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거룩하게 여기시고, 그 후 그들을 실제로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하십니다. 성결이라는 이 과정은 신자가 하늘나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은 감격적인 진리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주목해서 생각해 봅시다.


   (1) 우리는 21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의를 주시되 공정한 길을 나타내셨다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의 의는 "율법 외에" 나타난 의입니다(21절), 사람은 십계명을 지키거나 어떤 노력으로도 도저히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합니다.

   3)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21절) 이 말은, 곧 구약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4)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22절). 이것으로 죄인들이 의롭게 됩니다.

   5)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입니다(23절). 여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이 없이 주어집니다(22,23절).

   6)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24절). 이 말씀은 사람들이 구원의 댓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음을 뜻할 뿐 아니라 구원을 받을 만한 가치가 우리에게 없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서 염려하시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7) 칭의는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습니다(24절).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묵인하시거나 용납하실 수 없으십니다. 율법은 죄인의 죽음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 없는 그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으로 자기를 영접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그들의 범법에 대한 형벌을 담당하셨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화목 제물" 이 되셨습니다(25절).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몸 소 피를 흘려 하나님의 의로우신 모든 요구를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하신 이 일에 만족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제 그의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수 있습니다.

   9)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음은 하나님이 구약 시대의 사람들의 죄를 어떻게 용서하셨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25절). "전에 지은 죄" 는 갈보리 십자가 사건 이전에 지은 죄를 가리킵니다. 이 죄는 당시의 시점으로 보아 아직도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사역을 근거로하여 용서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갈보리 십자가를 믿음으로 뒤돌아보고 있으나, 구약의 선지자들은 십자가를 앞으로 내다보았습니다.

   10)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이 의롭다 하실 수 있는 것과 또한 하나님은 여전히 공정하심이 밝히 보여 졌습니다(26절).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의 죽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버림 받은 영혼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셔서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게 하심으로 이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하셨습니다.

   11) 이 구원의 계획은 인간의 모든 자랑을 배제합니다(27절). 만일 사람이 어떤 일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자랑할 수 있을 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데에는 어떤 노고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만이 합당한 것입니다.

   12) 이제까지를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람은 다만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지,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28절)

   둘째, 칭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29,30절).

   셋째, 복음은 율법을 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한 순종이 아니면, 그것을 범하는 자에게 죽음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상고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죄인을 위한 율법의 완전한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최대한도의 요구가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통하여 오히려 우리는 율법을 높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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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

                       두 개의 불가에서 일어난 베드로의 이야기

             두 개의 불가에서 일어난 베드로의 이야기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던 날 밤에 사람들이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피워놓은 "숯불"(요 18:18)가에서 함께 불을 쬐고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진정으로 주님의 쓰임 받는 사람으로 변하였고, 동시에 그 때 그곳에서 진정한 영적인 만족과 행복에 이를만큼 완전히 회복이 되어 있었던 바로 그 날에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피워 놓으신 또 하나의 다른 "숯불"가에 서 있었습니다.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는 불가에 서서 배운 전생애를 통해 마땅히 알아야 할 중요한 교훈은 우리 범인들에게도 결코 쉽게 잊혀 질 수 없는 것이겠지만, 주님의 제자 중에서도 특히 공격적인 성품을 가졌다는 제자로 알려진 베드로에게는, 결코 쉽게 잊혀 질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 때가 추운 고로"(요 18:18)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되는 데에는 그 이전에 몇 개의 단계가 그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 베드로는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눅 22:24) 다툼에 개입되었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베드로는 자만심과 교만이 너무 커서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는 말을 용감히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세 번째 단계에는 예수님께서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 고 부탁하신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깨어 기도를 하고 있기는커녕, 그 곳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마 26:40) 이런 일련의 일들은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요 18:10) 하는 정도에 이르기까지 베드로를 자기 뜻과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는 사람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서 정작 주님이 붙잡혀 갈때에 베드로는 멀리 떨어져서 충분한 거리를 두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이러한 여러 단계들 가운데서도 가장 극적인 경험은 "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중 하나가 아니냐,"(요 18:17)하고 물을 때에 일어났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여종에게 "나는 아니라"(요 18:17)고 말하며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 때에 날씨가 너무 추웠기 때문에 종과 하급관리들인 아랫사람들은 "숯불"을 피워놓고 서서 "숯불"을 쬐고 있었습니다(요 18:18) 베드로는 한 단계 한 단계씩 내리막길을 향하여 뒷걸음질쳐 오다가 급기야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행들 속에 실제로 들어가 그곳에 서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이 피워놓은 활활 타는 불가에 서서 그들과 함께 불을 쬐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들이 피워 놓은 불을 아무 생각 없이 즐기고 있을 정도로 베드로는 추락해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어지는 환경과 정황 가운데서 보면, 그 자신이 과연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가하는 문제를 깨닫기 전에 베드로가 세 번 씩이나 주님을 부인 하였다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직 닭이 세 번째 울 때, 때마침 주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바라 볼 그때, 베드로는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자신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정신이 들었고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눅 22:62)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 21:12)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는 6명의 다른 제자들에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베드로와 함께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요 21:3). 아침에 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실 때에 이 질문에 대하여 제자들은 한 목소리로 "없나이다"라는 말 밖에 달리 다른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모습은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 자기 뜻대로 하는 섬김, 자기 마음대로 하는 봉사가 결국에는 어떠한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에 대하여 얼마나 훌륭한 예가 되고 있습니까? 놀랍게도 제자들이 보여준 예와 같이 자신들의 커다란 부족과 결핍과 연약이 오히려 우리 주님으로 하여금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신적인 친절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기회를 갖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셨습니다.(요 21:6)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요 21:6, 11)나 되었습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요 21:9) 있었습니다. 주님은 어부들이 자신들이 잡은 고기를 직접 먹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요 21:10)고 명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말씀을 더하시고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 21:12)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조반을 다 먹고 난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라고 물으셨습니다.- 한편 '이 사람들 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 '플레온 투톤'은 '이것들 보다'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을 다른 말로 옮겨보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제자들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행한 사랑이 이와 같은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냐?"라는 의미가 될 수가 있고 아니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배나 잡힌 물고기들 등 이런 것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와 같은 뜻의 질문으로 옮겨 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이와 같은 질문을 세번씩이나 베드로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질문에 이어서 세 번씩이나 응답하시면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 21:15) "내 양을 치라"(요 21:16) "내 양을 먹이라"(요 21:17)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두 개의 불이 다른불이 아니라 숯불이라고 하는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 날 아침에 두 번째 숯불 앞에서 주님 곁에 앉았을 때에 그 순간 그 첫 번째 부끄러운 숯불을 기억하였음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그 자신의 연약에 대하여 그리고 통탄할만한 그 자신의 실패에 대하여 얼마나 뼈저리게 비참함을 느꼈을 것입니까!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자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께서 행하신 세 번의 질문에 의하여 그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깊었을 것입니까! 또 그가 받은 수치스러운 모욕감은 얼마나 깊었을 것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아침 베드로가 불가에 앉았을 때에 한 없이 자비하신 주님으로 부터 받은 온유하신 말씀들 속에는, 베드로의 연약과 실패와 수치와 모욕감 등 이 모든 것들을 치유하고 남을 만큼 충분한 보상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불은 주님의 대적들이 피워놓은 불이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두 번째 불은 주님 자신이 피워 놓으신 불이었습니다. 첫 번째 불가에서는  주님의 대적들이 베드로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두 번째 불가에서는 주님이 친히 베드로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첫 번째 불에서는 대적들이  베드로에게 줄 수 있는 것 중에 최악의 것들을 내어놓았고, 두 번째 불에서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줄 수 있는 것 중에 최선의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사탄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시험할 때 그 시험하는 동기는 그 사람 안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 최악의 것을 끄집어 내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와 똑 같은 것을 욥에게도 시도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한 사람의 성도를 시험할 때에는 그 동기가 사탄의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주님의 동기는 겨와 같이 쓸모없는 것은 채로 걸러 제거해버리고 믿는 성도 안에 있는 것 중에서 최상의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시 23:3)

 

   온유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친절로 질문하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의 죄와 연약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신실하심과 긍휼과 자비에 대해 마음 깊숙한 데서부터 감사하였기 때문에, 그는 진실로 마음이 낮아져 있었습니다.

 

   그가 계속해서 뒷걸음치며 추락하고 있을 동안에는, 주님께서 그 모든 사실을 다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전에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막 14:29)라고 말하였던 사람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단지 내가 주님을 좋아합니다라는 뜻을 의미하는 '필레오' 사랑을 사용함으로써, 주님이 말씀하신 '아가페' 사랑보다 더 약한 의미의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두려움 때문에 더 강한 단어인 '아가페'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이란 한 없이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구나하는 사실에 대하여 중요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돌이켜 다시금 주님과의 교제를 나누는 중에, 비로소 베드로는 그 전에는 자신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진정으로 믿지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베드로를 실제로 회복시키셨습니까? 첫째는 온유한 표정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눅 22:61), 두번째로는 온유한 말씀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 16:7), 세 번째로는 그의 온유하신 행동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 21:12) 우리 주님은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위대하신 목자이십니까! 하나님 진정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동일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 믿는 자들 가운데서 연약에 빠져 심하게 추락하고 형편없이 타락한 사람들조차도 주님께서는 버리지 아니하시고 회복시키시며 다시 한 번 사용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아! 이 때 우리는 시편 기자와 함께 "(주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시 23:3)라고 노래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대적들이 피워 놓은 불가에서 베드로는 불을 쬐고 그 자신을 따뜻하게 하였지만, 그 자신의 몸만 따뜻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불가에서는 베드로는 그 자신의 마음도 따뜻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베드로가 이 세상의 숯불 가에서 그 자신의 육체를 따뜻하게 하였을지라도 그 온기는 계속되지 못하였고 오래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숯불 가에서 베드로의 마음이 따뜻해졌을 때에는 그 온기는 계속되었고, 이 온기로 인하여 베드로는 하나님에 의하여 쓰임을 받되 능력 있는 사도로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서, "베드로는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삼천 명이 한 번에 구원을 받을 만큼 능력과 축복을 경험하는 복음말씀을 전하였습니다.(행2:14 ,41) 

 

   베드로는 주님의 임재 가운데 서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주님이 공급해주시는 음식을 먹을 때에, 비로소 회복이 되었고 마음에 큰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남아 있는 전 생애를 통해서 베드로 자신에게 영감을 주며 전 생애동안  그를 지도하였던 주님의 명령을 받앗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이번에는, 우리 각자에게 우리가 불을 쬐고 있는 숯불이 어디에 속한 숯불인지 물어 보도록 합시다. 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우리의 시간을 보내도록 합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음식을 먹도록 합시다. 오직 우리가 그렇게 할 때만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하나님의 숯불 가에서 따뜻함을 입게 될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 모두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섬기고 봉사하는 중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을 받아 순종하는 삶을 살며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벤 F. 파머(Ben F. Parmer)

                                                                          EMMA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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