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불'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5.09.28 야고보서 -제5과 혀의 죄 (야고보서3:1-12)
  2. 2015.09.27 온 천하를 얻고도- 어두운 불

야고보서


                   제5과 혀의 죄(야고보서 3:1-12)


   3장 1-12절은 혀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1:19. 26; 2:12; 4:11; 5:12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치 노련한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기 위해 그 혀를 검사하고 있는 것처럼 야고보는 어떤 사람의 영적인 건강은 그 사람의 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말의 죄를 가지고 자기 진단을 시작합니다. 야고보는 아마도 "혀를 보라, 미끄러지기 쉽게 축축한 곳에 있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현대의 재담에 동의할 것입니다.


선생의 책임(3:1)


   이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선생이 되고자 하는 성급한 욕망에 대해 경고하면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혀가 특별히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사상은 자기 혀로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는 말은 "선생이 되려는 지나친 야망을 갖지 말라" 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교사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 자기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단지 이러한 사역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일 뿐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그 가르친 것을 행하는데 실패한다면 더 큰 심판을 받게 됩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큰 책임입니다. 선생은 성경에서 알게되는 것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어야만 합니다. 선생은 결코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의 범위는 그 자신이 얼마큼 나아갔느냐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선생은 자신의 형상대로 다른 사람을 낳는데 즉, 사람들을 자신처럼 만듭니다. 혹 선생이 어떤 성경구절의 분명한 의미와 동떨어진 설명을 한다거나 그 의미를 희석시킨다면 그는 자기 학생들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어떤 형태로든 죄를 묵과한다면 그는 거룩치 못한 삶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어느 책에서도 그러한 가르침을 하는 책은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신자의 삶의 모든 면에서 주님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책에서든 가르쳐야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기본 되는 혀의 제어(3:2)


   야고보는 이제 가르침이라는 특별한 사역으로부터 대화라는 일반적인 부분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삶의 많은 부분에서 넘어지기 쉽지만 만일 어느 사람이 자기의 혀를 제어할 수 있다면 그는 말로 인한  여러 가지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사람은 진실로 균형이 잘 잡힌 사람이고, 훈련이 잘 된 사람일 것입니다. 만일 자기의 말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삶의 다른 부분에서도 자제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이를 완전하게 행하신 분이시지만, 여기에는 우리 각자도 훈련을 통해 완전한 자, 성숙한 자, 온전한 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섯 가지 예(3:3-8)


   여기에서는 다섯 가지 말에 대한 모습 또는 혀에 대한 예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혀를 재갈로 비유하고 있습니다(3절). 재갈은 말의 머리를 둘러싼 것으로 그 입을 조이는 마구입니다. 그 조이는 것은 다스리는 것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 조이는 부분은 아주 작은 쇳조각이지만, 사람이 그 쇳조각을 조종하므로 말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혀는 선악간에 삶을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모습은 키입니다(4절). 배와 비교해 볼 때 키는 작은 것입니다. 키의 무게는 배 무게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할 만큼 적습니다. 예를 들어. 퀸 엘레자베스 호의 무게는 총 중량 83,673톤입니다. 그런데 그 키의 무게는 140톤으로 배 총 중량의 1퍼센트의 5분의 1보다도 더 적습니다. 그러나 이 키를 움직이게 되면 곧 그 배의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한 사람이 그 작은 기구를 가지고 그 거대한 배를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히 키가 움직이는 대로 조종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혀가 작다는 것으로 그 능력을 오판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혀는 우리 몸의 아주 작은 지체이며, 비교적 감추어져 있지만 혀는 선악간에 행하는 엄청난 일로 인해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혀와 닮은 세 번째 것은 불입니다(5 ,6절). 성냥불을 부주의하게 버리면 작은 불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이내 산불로 변하게 되어 커다란 재해를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작은 성냥불이 지니고 있는 파괴와 파멸의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요! 역사상 가장 큰 화재 중 하나는 1871년에 있었던 시카고 대 화재입니다. 그 화재는 오래리(O'Leary)부인의 소가 등잔불을 발로 차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 불은 사흘동안 그 도시의 1.5 평방 마일을 태웠습니다. 사망자가 250명이며 집을 잃은 자가 100,000명이었고 재산 피해는 약 1억 7천 5백만 달러였습니다. 혀는 작은 성냥불이나 등잔불과 같지만 사악한 잠재력은 거의 무한합니다. 야고보는 혀를 우리 지체 중에서 "불의의 세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계라는 말은 광대하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도 때로 이 말을 그러한 의미로 사용하는데 예를 들면, 고난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을 때 고난에 찬 세계라고 표현합니다. 비록 혀는 그 크기가 매우 작지만 지니고 있는 죄악의 가능성은 매우 큽니다.

   악한 말의 불꽃이 어떻게 번져나가는지 뉴욕의 브룩클린(Brooklyn)에 사는 두 여인의 대화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한 여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틸리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했던 그 비밀을 다 말했다더군요." 그러자 "틸리가 그러던가요,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라고 다른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첫번째 여인이 "그래요, 나도 틸리에게는 당신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내가 당신에게 말했다고 틸리에게 말하지 마세요."라고 말했습니다.

   혀가 온 몸을 더럽힐 수 있다는 말씀은 어떤 사람이 그 혀로 비방과 욕과 거짓말, 그리고 참람된 말과 저주를 하는데 사용하므로 자신의 온 인격을 더럽히게 된다는 의미로 보여집니다.

   C.G. 채펄(Chappel)은 그의 시편 강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방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하는 것이다... 진흙 던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 손과 가슴에 진흙을 묻히지 않고는 그가 좋아하는 오락을 즐길 수 없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러한 경험으로 더럽혀져 왔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더러워지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나쁘게 말함으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정결함에 대해 더 높이 평가해 주리라는 헛된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무너뜨림으로 우리 자신이 세워질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자이다. 옆집에 다이너마이트를 묻어놓고는 우리 집은 든든하겠지 라고 상상하는 소경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을 해하려는 우리의 시도가 성공하더라도 늘 우리 자신은 더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

   혀는 생의 바퀴를 불사릅니다(6절). 이 바퀴는 출생하면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인간 활동의 전 영역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악한 혀는 사람의 개인 생활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활동도 악에 물들게 합니다. 악한 혀는 "사람의 전 생애 동안 모든 악"에 영향을 미칩니다. 악한 혀는 지옥 불에서 나는 불입니다. 모든 악한 말은 거기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 특징이 바로 지옥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지옥이라는 말은 게헨나(Gehenna)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여기에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약성경 안에서 예수님만 사용하신 단어입니다.

   혀를 비유하는 네 번째 모습은 야생의 길들일 수 없는 동물입니다(7, 8상반절).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 뱀과 해물들은 길들일 수 있습니다. 코끼리, 사자, 호랑이, 맹금류, 뱀, 돌고래, 물고기까지도 길들이는 것이 낯선 일이 아닙니다. 플리니(Pliny)는 그의 시대에 사람들이 길들여 놓은 짐승들을 나열했습니다. 야수 중에서는 코끼리, 사자, 호랑이이며, 새 중에서는 독수리이며, 살모사와 또 다른 뱀들, 물에 사는 생물 중에서는 악어와 여러 가지 물고기들입니다. 사실상 모든 종류의 짐승들이 길들여지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야고보의 논점을 벗어난 것입니다(권위역 성경은 "온갖 종류의 짐승"으로 표현됨-역자 주). 어떤 종류의 짐승이라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지속한다면 사람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로버트 G. 리(Lee)는 "사람들이 거대한 코끼리를 어떻게 하는가? 사람들은 밀림에 있는 코끼리 집을 습격하여 코끼리들을 포획한 다음 그 대부분을 훈련시켜서 통나무를 나르게 한다든지, 무겁게 실은 짐마차를 밀게 하는 등 온갖 일을 시킨다. 또, 푸른 눈의 벵갈 호랑이는 어떻게 하는가? 사람들이 호랑이들을 잡아 가르쳐 놀이 대상으로 만든다. 사납고 두려우며, 강한 아프리카 사자들은 어떻게 하는가? 사람들은 많은 사자들을 포획하여 불타는 둥근 원을 통과하며, 말등에 올라타고, 높은 그네에 앉으며, 배고플 때에도 발 앞에 놓여진 고깃덩어리를 건드리지 않으며, 엎드리고, 일어서고, 달리고, 포효하며 사람의 명령에 순종하며, 채찍 소리에 순종하게 만든다. 나도 수 년 전에 써커스에 한번 갔을 때, 한 굶주린 사자가 그 큰 입을 넓게 벌리고 있는 동안 조련사가 머리를 그 입에 1분 동안이나 넣고 있었던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보아 구렁이를 어떻게 하는가? 엄청난 비단뱀은 어떻게 하는가? 써커스 곡예단의 꽃처럼 연약한 작은 여인들을 보라. 그 징그러운 괴물들이 여인들의 몸을 감고 있지만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는다. 동물 공연장에 가보라. 어떻게 사람이 피에 굶주린 표범과 흑 표범을 해를 끼치지 않게 하며 그 앞에 잠잠케 만드는가. 공연장에 가서 훈련받은 벼룩과, 굶주린 재칼이 유순한 양과 함께 누워있는 것과, 비둘기와 독수리가 한 둥지에 함께 있는 것 그리고 늑대와 토끼가 함께 뛰어 놀고 있는 것을 보라"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야생 동물을 길들이는 데는 성공을 했지만 그 성공이 자기 혀에까지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의 삶속에 이것이 사실임을 인정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육체의 작은 부분을 다스리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 작은 지체를 다스리는 능력이나 힘을 갖지 못합니다.오직 하나님만이 혀를 통제 아래 두실 수 있습니다.

   다음에 야고보는 혀의 특징을 쉬지 아니하는 악으로 말하고 있습니다(8절). 야고보는 이 표현을 "죽이는 독" 이라는 말과 연결하여 우리의 마음에 있는 쉬지 않는 뱀이 가진 아주 해로운 독을 상기시키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한 두 방울만으로도 치명적입니다. 그와같이 혀는 생각에 해를 끼치며, 인격을 죽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문난 잘못들을 얻어듣기 위해 얼마나 자주 험담에 끼어듭니까. 그리고 얼마나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깔보며, 비난하고, 깎아 내립니까. 우리가 행한 그 일로 인해 흘린 눈물과 부서진 마음과 상처 입은 명예에 대해 누가 그 해악을 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우리 자신과 가족에게 가져온 비극을 잴 수 있겠습니까? 복받쳐 오는 내적 비통, 사과해야 하는 부끄러움, 우리 육체의 건강에 끼친 나쁜 영향등. 부모들이 공개적으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는데 빠지므로 그 자녀들도 똑같이 비판적인 정신과 그리스도인의 교제에서 방황하는 것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혀를 잘 사용하지 않으므로 지불해야 할 비용은 너무도 큽니다.

   해결책은 없습니까?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를 험담과 비판, 야박한 말에서 지켜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누구에 대해서든지 애정 없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벧전 4:8).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거스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즉시 그에게로 가서 사랑안에서 그것을 논의하고 함께 기도하십시오(마 18;15; 눅 17:3). 형제들에게 있는 단점을 확대해 보려고 하기보다는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려고 애쓰십시오. 혹 우리가 부정하거나 합당치 않은 말을 하게 된다면 말하던 중간에서 멈춘 다음, 계속하는 것이 유익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하십시오.


항상 선한 것을 말하라(3:9-12)


   다음에 우리는 혀를 선한 목적에도, 악한 목적에도 사용하는 모순에대해 배웁니다. 만물에도 이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는 전혀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잠깐 동안 그 혀로 하나님을 찬양한 다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을 저주합니다(9절). 동일한 근원에서 이렇게 반대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얼마나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까! 그러한 상황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10절). 하나님을 찬양한 혀는 사람들을 해하기보다는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말은 이것이 참된 말인가? 친절한 말인가? 꼭 필요한 말인가? 라는 세 가지 시험을 한 후에 해야 합니다. 늘 우리는 우리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달라고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시 141:3). 그리고 우리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반석이시요 구속자이신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구해야 합니다(시 19:14). 로마서 12:1에 있는 우리의 몸에는 우리의 혀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을 동시에 내는 샘은 없습니다(11절). 혀도 그래서는 안됩니다. 혀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한결같이 선한 것이어야 합니다. 샘에서 나오는 물과 같이 시원케 하는 말을 하고, 무화과나무의 열매처럼 영양이 풍부한 말을 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지 못하고,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지 못합니다(12절). 사실상 한 나무는 오직 한 종류의 열매밖에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혀는 선하고 악한 두 가지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이 구절을 마태복음 7:16-20의 비슷한 말씀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거기서는 우리에게 못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고자 하는 마음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악한 사람은 그저 악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상반되는 열매를 맺는 혀의 사용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샘은 동시에 짠물과 단물을 낼 수 없습니다(12절). 짠물을 내든지 아니면 단물을 내야 합니다. 만물에서 얻는 이러한 교훈들은 우리의 말이 늘 선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이와 같이 야고보는 우리를 말에 관계된 것까지 시련하는 것입니다. 이 단락을 끝내기 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자신에게 물어보도록 합시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그것에 나 자신을 복종시킵니까? 다른 사람들을 뒤에서 비난합니까? 나는 늘 깨끗하고, 유익하고, 친절한 말을 합니까? 나는 저속한 표현인 하나님 맙소사, 제기랄 등과 같은 말을 합니까(영어권 국가에서는 하나님이나 예수님, 천국을 나타내는 말을 약간 변경하거나 그대로 저주하는 말로 사용함-역자 주)? 경건한 집회에 참석한 후에 경솔하게 행동하거나 축구경기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습니까? 성경 말씀을 가지고 말장난을 하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에게 더 큰 감동을 주기 위해 내용을 바꾸거나 과장을 하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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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천하를 얻고도


                     어두운 불


   일반적으로 성경을 안 믿는 분들을 보면 성경을 읽어보지 않은 분들인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을 진실히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성경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나는 성경을 믿지 않는다." 고 하기에 제가 "성경을 다 읽어 보셨습니까? " 했더니 "읽어보지 못했다." 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읽어보지도 않고 믿고 안 믿고를 결정하느냐?" 했더니 아무말도 못했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잘 읽어보지도 않고 안 믿는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믿을 것인지 안 믿을 것인지는 먼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시고 결정하시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이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축복의 말씀도 있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도 있습니다.

   제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갖고 있는 한가지 큰 소원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이 글에 있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들으시고 받아주셔서 한 분도 이 무서운 고통에 들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부터 갖게된 한가지 의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지옥에 관한 것입니다. 지옥에는 뜨거운 불이 있다고 했는데 그곳은 또한 어둡다고 한 것입니다. 불이 있는데 왜 어두울까? 불이 있다면 밝을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어둡다고 표현하고 있는지 저는 이것이 이상했습니다. 성경은 지옥의 뜨거운 불과 그 어두움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1)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시 11:6)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 태우시리라" (마 3;1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히브리인의 욕설)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2)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마 13:41,42)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 18:8)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 18:8)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 9:43)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 있으리라" (히 10:27)

   "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눅 16;24)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계 20:15)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 21:8)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지요? 불의 묘사가 얼마나 다양하고 또 사실적인지요? 영원한 불, 꺼지지 않는 불, 지옥불, 풀무불,맹렬한 불,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곳입니까? 그런데 그곳이 또 어둡다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벧후 2:4)

   "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유1:6)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마 22:13)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마 25:30)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마 8:12)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유1:13)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 예비 되어 있나니" (벧후 2:17)

      얼마나 어두운 곳입니까? 어두운 구덩이, 흑암, 어두움, 어두운 데, 캄캄한 흑암, 캄캄한 어두움 등은 도대체 얼마나 어두운 곳입니까? 불이 있는데 어둡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최근에 발표된 학설에 의하면 불의 색깔은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최후의 색깔은 검은색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도가 비교적 낮을때는 붉은색, 조금 높아지면 노란색, 더 높아서 섭씨 1000도 가까이 되면 파란색, 파란색은 우리가 보통 취사할 때 쓰는 가스불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높아서 쇳물을 끓일수 있는 온도가 되면 흰색이 됩니다. 저는 포항제철에 가서 쇠를 끓이는 고로를 본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고로속은 흰색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의 온도가 더 높아서 측정 불가능의 고온이 되면 색이 없어지고 어두워진다는 것입니다. 색깔까지도 태워버리고 흡수해 버리는 무서운 온도입니다. 저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지만 과학자들은 이 우주 어딘가에 굉장한 고온의 장소가 있다고 발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옥은 왜 어두울까요? 너무 뜨겁기 때문입니다. 뜨거움을 느끼는 것은 육체가 아닙니다. 뜨거움을 느끼는 것은 영혼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말해서 영혼이 떠나면 그 몸은 자르든 불태우든 아무 감각이 없고 뜨겁지도 않는 것입니다. 희로애락을 느끼는 것은 영혼입니다. 영혼이 떠난 주검은 어떠한 기쁨도 슬픔도 그리고 아픔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밤에 잠자다 꿈을 꿀 때 우리 몸은 이불속에 편안히 있어도 우리 영혼이 극심한 고통과 두려움, 위험에 빠져 소리를 지를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영혼이 진정한 나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죽게 되면 육체는 벗어두고 우리 영혼이 심판자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히 9:27). 그때 만일 당신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것 같으면, 죄 용서를 받지 못한채 그 더러운 것을 그냥 갖고 있다면, 지금까지 당신의 마음문을 두드리신 주님의 못자국난 손을 끝까지 거절하셨다면, 당신은 그때 볼것입니다. 어두운 불이 있는 곳을, 캄캄한 어두움의 뜨거움을. 아! 아! 두렵습니다. 그 좋은 기회를 다 놓치고 이제 벌거 벗은채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살후 1:8,9)

   이 글을 읽고 계신 지금은 당신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참 좋은 기회입니다. 또 마지막 기회일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1,2)

                                                         -김우종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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