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구원받은 기쁨이 있느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
어떤 사람에게 "구원을 받았느냐" 물으니 구원의 복음을 완벽하게 대답하였다. 필자가 그를 보면서 구원받은 사람 같지 않아서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니 성경공부 시간에 배웠단다. 구원을 배워서 수학 공식 외우듯이 외우면 구원을 받은 것인가.
오늘날 많은 곳에서 구원을 이론적으로 가르쳐서 외우게 하고, 심지어 구원받았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것을 가르치는 희극이 연출되고 있다. 이것이 어찌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전도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의 할 일인가.
이와 같은 이유는 놀랍게도 전해주는 그 목회자조차도 구원 받은 경험을 가지지 못하다보니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기가 경험한 적이 없으니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줄 수 없는 것이다. 이 얼마나 당황스럽고 충격적인 일인가. 이 믿기지 않는 말이 사실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늘날의 모든 교회들을 매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이와 같은 처지에 있는 어떤 사람들이 자기의 현실을 깨닫고 구원을 받으면 그것으로 족하고 기뻐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원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구원은 교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부분을 먼저 강조하면서 왜 그런지 말하고 싶다,
구원은 단어가 의미하듯이 절망의 지옥에서 건짐 받은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 온전한 절망에서 건짐 받은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진실이 이러한데 이것을 어찌 이론적으로 배우는 것으로서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구원은 경험이다. 죽음 후에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도 충격을 받고 놀라 어안이 벙벙한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절망적인 죄인이 희망이 있음을 듣고 확인해보니 곧 예수님의 거저 주시는 구원이었다. 성경공부시간에 구원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나 구원을 배움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지식적으로 배운 사람들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독자들의 구원받은 여부를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구원을 배운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로 그들에게는 구원받은 기쁨이 없다. 그냥 구원에 관해서 가르치니 구원을 받았다고 앵무새처럼 외우고 있을 뿐이다. 생각하여 보라. 중한 병에 걸려 죽음으로 들어갈 문턱에 처해 있다가 건짐 받았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그는 이제 세상을 다 살았구나 하는 절망이 엄습하였던 사람이었다. 가족을 이별하고 하던 일을 그만두고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절망이 그의 마음을 채웠다. 좋은 것을 보아도 좋다고 말할 의욕도 없고,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감각이나 느낌이 없는 슬픈 현실이었다. 밥맛을 잃은 지 오래고 눈물과 한숨만 나오는 현실이었다. 슬픔은 온통 자기에게만 있는 것처럼 보이며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채웠던 것이다. 그러한 절망적인 환자가 기이한 명의를 만나 건강을 온전히 되찾았다면 그 기쁨을 무어라 표현하겠는가!
구원의 기쁨은 진실로 이러한 것이다. 절망적인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슬픈 현실에서 그 지옥을 면제받고 천국에 가게된 것 아닌가! 그런데 구원을 그냥 교리적으로 받아들이고 냉랭한 가운데 살아가면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교리적으로 배운 구원에 기쁨이 있을 턱이 없다.
구원을 경험한 자의 기쁨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죄를 용서받은 기쁨이다(로마서 4:6~8) 일평생 죄 때문에 방황하는 것이 인생일진대 죄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을 실로 엄청난 기쁨인 것이다.
만약 여러분 중 누군가 큰 실수를 하여 사형언도를 받고 죽음 앞에 서있었는데 국가에서 특별한 이유로 사면하였다고 가정한다면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는가. 자신의 실수로 인하여 당연히 죽어야 할 죄인이 그 죽음의 죄에서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래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실로 이것이 구원의 기쁨이다. 우리는 당연히 지옥에 가야할 중한 죄인인데 주님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용서 받아 지옥을 면제받아 천국에 가게 된 사람들이다. 이것이 구원이요 멸망치 않고 영원히 살게 된 구원의 기쁨이다.
필자가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은 죄용서 받은 사실을 즐겁게 간증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너무나 힘들다는 것이며 어쩌다가 죄용서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나도 그들이 죄 용서 받은 기쁨에 잡혀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 죄 용서 받으므로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확신은 더욱 찾아보기 힘든 현실이다.
결단코 말하거니와 이런 현상은 구원받은 것과 전혀 관계가 없다. 다만 속죄의 진리를 공부한 사람들일 뿐이다.
구원의 기쁨의 또 하나의 이유는 무엇인가? 천국의 소망으로 인한 기쁨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이 세상은 소망이 없다. 유명하다는 사람이나 지식인이나 정치 지도자들은 입만 열면 인류평화를 외치고 있지만 평화가 올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전쟁의 소식이 신문의 지면을 메울 뿐이다. 크고 작은 폭력은 곳곳에서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려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지진과 해일과 토네이도의 이야기를 비롯한 천재지변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사고의 이야기는 날마다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온갖 걱정에 시달리고 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온갖 수고를 하지만 그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것은 무엇인가? 인생의 그 많은 수고가 아무 보상도 없이, 관 앞에서 허약하게 죽어가는 아비를 보며 슬프게 울어주는 몇몇 자녀들의 눈물로 끝난다면 이는 얼마나 허무하고 슬픈 종말인가.
가진 자는 그들대로의 온갖 걱정과 근심에 시달리고, 없는 자들은 그들대로의 고뇌와 번뇌에 시달리고 있다. 문제는 문제를 낳고 근심은 근심을 만드니 인간세계에 참된 평화는 올 수 있을 것인가? 한 인간이 행복을 찾아 평생 헤매다가 이 땅을 떠나는 것이 그들의 삶이라면 그들 중 누가 행복을 찾았다고 외친단 말인가. 어느 종교가 참된 행복은 이것이라고 말했는가.
일찍이 3,000년 전에 살다간 솔로몬은 "모든 것이 헛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 세상은 헛되이 왔다가 고생만하고 헛되이 돌아가는 그 자체일 뿐이다. 이토록 소망 없는 인생에게 천국은 하나님이 주신 탈출구요 최고의 선물이다. 인간세계의 모든 고뇌와 눈물이 사라져버린 영원한 행복의 나라, 이제는 전쟁의 공포에 떨 필요도 없고 온갖 폭력을 피하기 위한 고민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 인간이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사모하였던 모든 것이 있는 나라, 그 나라가 천국이다. 그 천국을 선물로 받은 것이 구원인데 그 사실로 인한 기쁨이 도무지 없는, 율법 아래 있는 죄인들을 어떻게 구원받은 성도라 할 수 있겠는가. 천국의 소망을 가진 참된 거듭난 자는 인간 세계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소유한 자임을 아는가.
구원은 그럭저럭 교회에 나가다가 알게 된 성경 몇 구절 외우는 신앙고백이 아니다. 진실로 구원은 이 완벽한 기쁨과 행복이 있는 천국을 소유한 것이다.
어떠한가! 이러한 진실 속에서 생각할 때 성경의 구속 교리를 배워서 몇 절 대답하였다고 구원받은 것으로 주장하는 일이 유치하지 아니한가!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 바울은 구원받은 자들을 향하여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필자가 미국에 갔을때 미국 시민권이 얼마나 위력 있는가를 실감하였다. 시민권 가진 사람들의 자부심과, 그것을 가지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대국의 시민권이 이와 같이 힘이 있을진대 하물며 하늘나라의 시민권은 어떠하겠는가. 구원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것이며 거기에 합당한 기쁨 속에 거하는 것이다.
또 다른 기쁨은 무엇인가? 구원은 마귀의 자식으로 태어나 지옥의 문 앞에 서 있다가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변화를 일으켜 천국에 가게 된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기쁨이 어떠하겠는가. 더구나 평범한 가운데 있다가 하나님의 자녀 신분을 얻은 것이 아니고 마귀의 자녀로 있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랴!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기쁨에 충만하였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 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 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로마서 8:15). 바울은 이어서 참 아들 된 자로서 후사가 된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뿐만 아니라 바울의 서신을 받는 모든 성도들의 기쁨이었다. 세상에서 유력한 자나 유명한 자의 아들도 큰 자부심과 기쁨이 있을 진대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임에랴. 구원받은 자는 이 기쁨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들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 기쁨을 누리고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두 번째로 구원을 공식적으로만 배운 자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들은 구원의 분명한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나 교회에 있어서 구원은 사건임에 틀림없다. 성경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천국에서 잔치가 벌어진다고 증거하고 있다(누가복음 15:3~7). 하나님을 모르고 망할 길로 가던 죄인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되는 일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진정 이것은 하나님에게나 사람에게 큰 사건임에 틀림없다. 이와 같은 사건이 단지 성경 몇 구절 읽고 알아서 구원이 완성되었다고 장담하고 있다는 것은 구원의 위대성을 모르는 어리석은 모습이다.
구원받은 날짜를 모른다고 구원받지 못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구원받은 날짜를 모르는 사람 중에도 얼마든지 구원받은 사람은 있을 수 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구원받은 날짜나 그 즈음을 아는 것이 정상이다. 그리고 어떤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정상이다. 이 부분도 꼭 주장할 만한 말씀이 없을 수도 있으나 그러나 대부분은 분명한 말씀에 근거하여 구원이 이루어진다. 사실이 그러함에도 이와 같은 분명한 근거 없이 구원의 계기도 분명하지 않으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독자여, 그대는 구원의 근거가 얼마나 분명한가? 성경이 밝히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요한복음 4장의 우물가의 여인을 생각하여 보라! 그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얼마나 기뻐하였는가. 그는 부끄러움도 잊고 동네에 뛰어 들어가 전도하지 아니 하였던가. 그가 기쁨을 가누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님을 만난 그날을 그의 생애에 잊을 수 있겠는가? 구원은 이와 같은 것이다.
사도행전 2장의 하루에 3,000명이 구원 받은 사건을 생각하여 보자. 그들에게 있어서 그날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며, 그날 이후 그들이 경험한 기쁨은 성경에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구원은 이와 같이 기쁨의 날이며 흔적이 남는 날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8장에서 에디오피아 내시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하고 돌아가는 중이었다. 마차를 타고 가면서 그는 이사야의 말씀을 읽고 있다가 성령님의 인도로 빌립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되었다. 그는 구원받고 "흔연히"(기쁨으로) 자기의 나라로 돌아갔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구원에는 다 흔적이 있으며 큰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기쁨이 어찌 인간이 만든 어떠한 기쁨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복음을 공식적으로 배워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아무쪼록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자신의 구원 문제를 깊이 점검해보기를 간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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