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

                                                                                  존 필립스


                                            CHAPTER 12

 

                                    교제의 기쁨

                           The Enjoying the Fellowship


   "교회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일반인들의 견해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견해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일반인들의 교회에 대한 개념은 대략 이렇습니다. 주후 2내지 3세기경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한 이래 약 천년동안 로마교황이 지배하고있는 캐톨릭과 캐톨릭으로부터 분리된 희랍정교회(동방정교회), 그리고 15세기,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을 시작으로 영국, 스위스, 독일 등 유럽 여러 나라에서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생겨나게 된 수많은 종파, 교단 독립교회들, 그리고 현재까지 전 세계에 분산되어 발전되어 온 모든 교회들, 이들을 총망라하여 교회(church)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교회일까요? 아니면 전 세계의 기독교로 묘사되는 것이 더 나을까요? 교회는 무엇일까요? 신약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본과를 통하여 조심스럽게 연구해 보고자 합니다.


   교회의 신비 (The Mystery of the Church)


   구약 성경은 교회에 대해 직접적인 계시를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영적인 면에서 다양한 형태로 교회의 그림자가 숨겨져 있었지만,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교회는 숨겨진 비밀이었습니다. 교회의 출현, 성격, 그리고 확장의 과정에 대해서는 신약 성경에만 계시 되어 그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비밀(a mystery)이라고 하였습니다(엡 3:9-10; 5:32). 여기에서 말하는 비밀이란 어떤 불가사의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 시대에는 감춰져 있던 것, 인간의 이성이나 논리에 의해 일찌기 발견되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님에 의해 비로소 우리 인간들에게 밝히 계시되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는 여러 가지 비밀(신비)들을 말씀하고 있는데, 교회는 이 비밀들 중의 하나입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오순절(주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50일째 되는 날, 주님의 승천 후 10일 째 되는 날)에 탄생시키신 교회를 세 가지 비유로 우리들에게 설명합니다.


   1. 교회는 몸과 같다 (The Church As a Body)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살아있는 몸과 같습니다(고전 12:12-27; 롬 12:4-5). 몸의 각각의 지체들은 중요하고, 각각 한 성령과 한 생명을 공유하고 있고, 각각 독특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고, 각각 다른 지체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있으며, 각각의 지체들은 한 머리로부터 직접적인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몸인 교회의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에서 우리 자신을 검토하고,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자인가?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참된 교회에 속한 지체인가? 나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 안에서 다른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는 자인가? 나는 나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2. 교회는 신부와 같다 (The Church As a Bride)


   교회는 신랑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엡 5:22-32); 고후 11:2). 사도 바울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을 통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주님은 교회의 신랑이시며, 교회는 또한 주님의 신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자신을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참된 교회 안에 속한 자인가? 나는 다시 오실 신랑을 기다리는 소망 가운데 살아가며, 그를 매일 사모하고 사랑하며, 신부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가? 과연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진정한 거듭난 그리스도인인가?


   3. 교회는 건물과 같다 (The Church As a Building)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기초 반석이 되신 건물과 같습니다(엡 2:19-22; 고전 3:11; 10:4). 우리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교회를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6:17-19). 그렇지만 주님은 그리스도이신 자신의 기초(반석)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주님은 자신을 반석(the Petra, a Rock)이라 부르시고 베드로는 한 개의 작은 돌(a petros, a piece of rock, a pebble, a stone)이라 부르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4-8절을 보면 베드로는 그 차이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것이라는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작은 산돌들입니다(벧전 2:5; 엡 2:20-22). 사도 베드로 역시 주님의 교회의 한 개의 산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를 첫 번째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나 신약성경은 교회의 기초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심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고전 3:10-11; 엡 2:20). 여기에서 자신을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그리스도께서 반석이 되신 교회에 속하여 있는가?

   이상의 교회의 개념은 매주마다 모여 신부나 목사의 집례에 따라 종교 의식을 거행하는 특정 장소로서의 교회의 개념과는 매우 다릅니다. 사실 그런 통속적이고 잘못된 교회의 개념은 문화, 역사, 전통, 배경에 의해 만들어져왔습니다. 진정한 교회의 개념은 신약성경에 의해 정립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형태 (The Mirror of the Church)


   지금까지 우리는 우주적인(universal aspect)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주적인 교회는 현실적으로 볼 수 없는 교회입니다. 우주적인 교회의 지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미 하늘나라에 가 있으며, 땅에 남아 있는 이들도 온 지구상에 널리 흩어져 있습니다. 신약 성경은 또한 지역적인(local-ized aspect) 교회들에 대하여 자주 언급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는 대개 우주적인 교회를 언급하고 있는 반면 고린도서에서는 주로 지역적인 교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역적인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의 축소판입니다. 신약성경 안에서는 오늘날처럼 수많은 교파와 교단들로 갈라진 교회들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지역교회 내에서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한 분열이나 파당적인 운동에 대해서 엄히 정죄하고 있습니다(고전 1:11-17). 다만 신약 성경에는 여러 곳에 있는 지역 교회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16:5, 15,16; 계 1-3장). 또한 같은 지역 안에있는 모임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음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여러 서신서들에는 사도시대 당시 여러 지역 교회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단과 그릇된 교리들에 대한 대응, 도덕적인 범죄자들에 대한 지역교회 내의 처리, 또 믿는 자들의 영적인 결핍에 대한 도움, 성도들을 바로 세워주기 위한 교훈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역 교회는 불가시적인 우주적인 교회의 연합과 실재, 신비한 교통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가시적인 유기체입니다.


   교회의 구성원 (The Membership of the Church)


   교회란 기독교란 간판 아래 일정한 건물에 모이는 무리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고 거듭나서 성령 안에서 하나 된 자들이 모인 유기체라는 사실을 이미 언급했습니다. 지역 교회는 반드시 이러한 진리를 따라야 합니다. 지역 교회는 오직 거듭남으로써 주님과 연합된 자들로만 구성됩니다. 이렇게 교회의 구성원이 된 각 지체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의 사역에 참여하게 되는데, 특히 전도와 양육을 위해 협력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놀라운 간증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감히 그들과 상종할 수 없을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행 5:11-14). 또한 교회는 그 순결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하여 엄한 징계로 죄를 범한 지체들을 치리(징계)하였습니다. 지역교회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러한 훈련과 치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고전 5:1-13).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가 필요한데, 이는 지역 교회를 통하여 이뤄지게 됩니다. 교회가 처음 태어나던 날,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나 되는 큰 무리가 일시에 구원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무리는 즉시 지역교회에 더해지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 2:41-42).


신약 성경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교회안에서 두 가지 중요한 예식을 시행하도록 우리에게 명하셨습니다. 그 첫째는 침례(Baptism)이며, 둘째는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입니다. 이 두 가지 예식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주의 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위해 죽으신 우리 주님을 기억하며 묵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침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나 자신도 죽었음을 공적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예식의 시행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성장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초대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침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였습니다(마 28:19-20); 행 8;12, 16, 36; 9;18; 10:47; 16:15,33; 18:8; 19:3). 그들은 주의 날에 모여 떡과 잔(포도주)을 나누며, 우리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서 자신의 몸을 드리신 주님의 죽으심을 묵상하며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고전 11:23-26).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께로부터 받은 크고 놀라운 사랑과 은혜들을 기억하도록 하며, 은혜에 빚진 자로서 온 몸과 마음을 드려 헌신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롬 12:1-2). 침례와 주의 만찬에 관해서는 엠마오의 다른 교재들을 통하여 더욱 자세히 공부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사역 (The Ministry of the Church)


   주님께서는 각 그리스도인들에게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협력하여 사용할 수 있는 영적 은사들을 주셨는데 그 목적은 "모든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엡 4:11-12)입니다. 신약성경 안에는 능히 기쁨으로 남을 섬기기에 충분한 다양한 은사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고전 12;29). 또 특별한 은사들도 있는데 바로 "사도들, 선지자들, 전도자들, 목사들, 교사들" 입니다(엡 4:11). 사도들(Apostles)과 선지자들(Prophets)의 은사는 초대교회 시대에 성령님에 의해 교회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특별히 부름받은 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엡 2:20; 3:4-5). 이런 은사들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 있어서 오늘날 선교사들이나 설교자들의 사역이 이러한 은사의 역할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도자들(Evangelists)은 성령님에 의해 복음을 전하여 불신자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구원에 으르도록 돕는 은사입니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생활 간증을 통하여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님을 증거할 책임과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도자는 믿지 않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주님께로부터 특별히 은사를 부여받은 자들입니다 목사들(Pastors)은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필요를 도와주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목자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교사들(Teachers)은 성령에 의해 성경의 진리와 교리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하고 바르게 깨우쳐 주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자들입니다.


   또한 지역교회는 집사들과 장로들의 사역이 필요합니다. 집사들(Deacons)은 지역교회 안에서 주로 비영적인 일이나 일반 사무적인 일들을 지혜롭게 처리하는 은사를 가진 자들입니다(행 6:1-7, 딤전 3:8-13), 장로들(Elders) 혹은 감독들(Bishops)은 지역교회 성도들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특별한 은사들을 부여받은 자들입니다. 이런 은사의 자격들에 대해 성경은 분명히 교훈하고 있습니다(딤전 3:1-7; 디도 1:5-9). 사도 베드로 역시 자신이 장로들 가운데 하나임을 말씀하고 있으며(벧전 5:1-4), 그는 장로의 은사를 맡은 자들에게 "맡기운 자 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말씀 선포 (The Message of the Church)


   지상의 교회는 잃어버린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대사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하여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을 향하여 말씀을 선포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들을 향해서는 신약의 중요한 진리들을 가르침으로써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믿음을 건축해 나갈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합니다(유다 20절). 이러한 가르침을 사도들의 교리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성경 속에 감추어진 위대한 진리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밝혀내어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모든 잃어버려진 자들을 향하여 우리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구원의 길과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증거해야 합니다.

   교회가 선포해야 할 말씀은 반드시 성경에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더 보태거나 뺄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계 22:17-19). 교회는 그릇 가르치는 자들을 주의하여 살피며 경계하고 이러한 자들을 제거해야 합니다(롬 16:17-18; 갈 1:6-9; 골 2:4-23).

   교회가 선포해야 할 말씀은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합니다(고전 1:23-24).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하여야 합니다(고전 2:4, 13). 중요한 여러 진리 가운데, 무엇보다도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의 선포가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 되심, 동정녀 탄생, 신성과 인성이 함께 조화 된 흠 없고 놀라운 생애, 속죄를 위한 죽으심, 육체적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 보좌 앞에서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사역, 재림에 관한 진리 등을 선포해야 합니다.


   교회의 선교 사명 (The Mission of the Church)


   이 지상교회는 잃어버린 죄인들을 구원하는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은 어느 때에도 이런 것을 계획하신 일이 없습니다. 교회란 낱말은 희랍 원어로 에크레시아(ecclesia)로써 "밖으로" (ecc)란 의미와 "불림을 받음" (lesia)이란 의미의 합성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란 곧 "밖으로 불림을 받은 무리"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이러한 성격을 분명히 나타낸 좋은 예로서 초대교회 예루살렘 회의 중에서 야고보가 사도 베드로의 선교 보고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언급했던 말을 상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처음으로 이방인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들을 '이끌어 내신 일'을 시므온이 우리에게 밝히 드러냈으니" (행 15:14).

   활동적인 지역교회들은 자기 나라 안에서와 해외에서 활발한 선교활동들을 펼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세상에는 아직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지금도 그리스도 밖에서 영원히 잃어버린 상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할 선교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승천 하시기 직전 그의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모든 교회는 이러한 선교 사역에 참여해야합니다. 우리 모두는 일어나서, 길 건너편의 우리의 이웃이나, 버스 안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그밖의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우리의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혹은 누군가는 직접 먼 나라에 나가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드려 교회의 선교활동을 도우며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선교의 책임에 대해서 성경은 수없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통하여 초대교회의 선교 현황과 사도바울의 선교 활동에 대해서 기록한 것들을 직접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롬 15:14-33). 한 순간도 쉼 없이 오직 잃어버린 영혼을 향하여 열정을 다 했던 사도 바울의 맥박 위에 손을 얹어 보십시오. 빌립보서 3장 13절에서 그는 "형제들아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이 서신을 기록할 당시 그는 이미 갈라디아와 소아시아 지방과 마케도니아와 희랍 지역에까지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수많은 도시에 주님의 교회들을 일으켰고, 수 천 명의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였으며, 수많은 남녀들을 선교 사역에 동참하도록 큰 감화를 끼쳤습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대 사역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한 일이 단지 시작에 불과 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모든 제자들은 배반자 가롯 유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은 해외에 교회를 세운 제자들의 사역, 그 교회들의 성장, 그들의 역동적인 활동, 그리고 헌신적으로 선교에 동참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우리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사도행전을 통하여 장차 이루게 될 교회의 청사진이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 마지막 부분에 있는 성령님의 초청의 말씀은 전도 사역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수를 받으라" (계 22;17).

   "오라(come)" 성령님의 이 놀라운 메시지는 바로 오늘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복음의 초청입니다.


   교회의 운영 (The Methods of the Church)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세상적인 방법은 주님의 교회 운영에 끼일 곳이 없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이 세상과 짝하지 않으며, 세상에 예속되지도 않으며, 세상적인 방법을 취하지도 않고, 세상의 운영 방식을 모방하지도 않습니다. 지상의 교회의 운영권은 전적으로 성령님께서 소유하셔서 그분의 계획과 능력이 지상교회를 통하여 이 세대에 나타나야 합니다. 교회의 운영은 반드시 영적이어야 하며, 육적인 것을 배제하고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고후 10:4). 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힘을 빌려서는 안 되며, 불신자들의 후원을 원해서도 안 됩니다(고전 1:26-29; 2:6-8; 요한 3서 7절). 또한 교회는 세상적인 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타국과 같은 이 땅 위에 심기워 졌습니다. 그 뿌리는 하늘에 두고 있으며, 위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교회가 하늘의 기준보다 더 낮은 기준을 따를 때, 세상의 멸시와 혐오감을 받았고,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 그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모든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신약 교회의 표준을 따르는 지역 교회를 찾아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아마 당신은 지상에서 완전한 교회를 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지역 교회든지 간에 불완전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배우고 살펴보았던 교회들 중 가장 표준에 가까운 교회를 당신은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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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04 순교자와 전도자(6-8장)


요절 : 사도행전7장 56절, 8장 22절

요점 :

1. 그리스도인은 물질 문제에 있어서 주의해야 합니다.

2. 사단은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교회를 공격합니다.

3.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든지 죽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4. 교회의 박해는 유익한 것일 수 있습니다.

5.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6.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스데반의 사역, 증거 그리고 죽음


1. 일곱집사를 택함(6:1-15)


이제 막 시작된 교회의 그 다음 어려움은 헬라인 중 몇 사람들이 불평을 할 때 오게 되었습니다. 이 신자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은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신자들이 돈을 공정하게 분배하지 않기 때문에 그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소홀하게 대해진다고 느꼈습니다. 여러나라에서 온 사람들 사이에서는 항상 어떤 것에서 불일치 하게 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이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열 두 사도들은 교회의 돈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그들이 말씀 전하는 것을 중단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이 일을 위해 일곱 명을 지명하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삶에서든 교회에서든 돈 문제가 적절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려움의 또 다른 형태는 또다시 교회 밖에서 오게 되었는데, 예루살렘에 온 순례자들 중 몇몇이 이 교리에 관해서 스데반과 논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논쟁에서 이기지 못하자 그들은 그가 성전에 대해 거스르는 말을 했다고 송사하였습니다. 논쟁은 좀처럼 어떠한 유익도 이루지 못합니다.


2.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응답함(7:1-8)


그들이 스데반을 고소하려고 공회에 끌고가자 스데반은 그들에게 처음부터 유대 백성들의 죄악을 보여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이스라엘의 백성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12-25장에는 아브라함의 전 생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서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고 순종했다는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주의 사자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 거절한 사람들은 전혀 듣지 못했던 사람들보다 더 악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3. 요셉은 시기를 받았지만 영화롭게 됨(7:9-16)


그후에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증손자였던 요셉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갑니다. 요셉의 열 형제들은 그들의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말로 인해 그를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야곱의 아들들 중에 우두머리가 되도록 선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절한 것입니다. 이 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 39-50장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셉과 그 형제들의 자손들이었기에 스데반은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다고 말하였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그를 은 20에 노예로 팔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고 그리스도는 은 30에 팔렸지만 이제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높이셨습니다.


4. 처음에 거절된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됨(7:17-43)


이제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위대한 율법 수여자로 매우 높게 평가하는 모세의 이야기로 이어갑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교육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어느날 그는 이스라엘 사람 하나가 애굽인과 싸우고 있는 것을 보자 자기의 형제를 돕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두 이스라엘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 도우려했지만 그들이 "누가 너를 우리의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고 대들며 도움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40년 후에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출하려고 애굽으로 다시 보내셨습니다(43절). 그리고 이제는 그 백성들이 모세를 기쁘게 영접했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을 백성들이 거절하지만 결국 그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오래전에 모세가 한 말인 하나님께서 어느날엔가 자기와 같은 또다른 선지자를 일으키신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상기시켰습니다(37절).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요1:17) 이 약속이 성취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 주님을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광야 여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불기둥으로 백성들을 인도하셨을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이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거절하여 하나님께서 주시기 원하는 복을 거절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와 그분이 주시는 복을 받아들이기 원하십니까?


5. 처음부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절함(7:44-53)


유대인들은 스데반이 그들의 놀라운 성전이 파괴될 것을 말했다고 고소했습니다(6:14). 그러나 지금 스데반이 나타낸 것은 성전조차도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성령님을 거역했다고 분명하게 선언한 것입니다(51절). 그들의 조상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였고, 지금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천사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받은 율법 조차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들 앞에서 그렇게 말한 스데반의 용기를 찬양해야 합니다.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들에게 자기를 죽일 권세가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찌하든지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라도 자신의 엄청난 죄책을 깨닫고 용서받기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도 자기의 죄가 매우 악하다는 것도 끝내 깨닫지 못하고, 구세주에 대한 어떤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그것에 대해 영원히 벌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들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기를 기뻐할 것입니다.


6. 스데반이 깊이 잠듦(7:54-60)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인들은 광분하여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스데반에게 하늘의 환상을 보이셨는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셨습니다. 백성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큰 소리를 지르며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가서 죽기까지 큰 돌들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죽기 전에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과(눅23:34) 동일한 기도를 했습니다.

   신자가 깊이 잠들었다고 하는 것은 죽었다는 말에 대한 또다른 표현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위해 순교한 첫번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수 천 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순교했습니다. 당신도 필요하다면 주님을 위해 기꺼이 순교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매일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이 사마리아와 아프리카까지 전파됨


1. 사울의 핍박과 빌립의 기적(8:1-8)


우리는 사울에게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스데반을 죽이는 것을 도울 때 처음 언급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가 어떻게 하나님께 회심했는지와 그의 이름이 어떻게 바울로 변했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때 사울은 니고데모처럼(요3장) 유대인의 랍비(선생)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 새로운 가르침이 사단에게 속했다고 확신하여 그들을 진멸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울은 길리기아성 다소사람으로, 아마도 6장 9절에서 스데반과 논쟁했던 자들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일 때,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을 흩어버리고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하는 대로 감옥에 던져 넣었고 사도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여러 나라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복음을 더 멀리 전파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에 관해서 말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핍박은 그들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게 하려고 필요했을 것입니다. 어쨌든간에 이 일은 많은 사람들이 듣고 구원을 얻게 되는 복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교회의 물질을 관리하기 위해 사도행전 6장에서 선택된 집사들 가운데 한 사람(스데반)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 빌립은 지금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믿게 되는 또 다른 특별한 기적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 결과 그 도시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8절).


2. 시몬이 믿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님을 받음(8:9-17)


이 사마리아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은 사단의 능력에 의해서 사람들을 속이는데 사용되었던 시몬이라 불리는 마술사였습니다. 이제 그도 말씀을 듣고 믿어 침례를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4장 9절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그들의 지역(유대)에서만 아니라 사마리아에서도 주님을 증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 그래서 지금 그들의 아주 오랜 대적의 땅이 복을 받았다는 것을 듣게되어 사도들이 사마리아로 내려갔으며 그들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선물로 주심으로 그 사마리아인들을 받으셨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또한 사람들을 사랑할 것이며 우리가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때문에 그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거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3. 시몬이 하나님의 선물을 사기를 원함(8:18-25)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안수함으로 성령님의 역사를 본 시몬은 놀라워 했습니다. 그가 갖고 있던 돈은 아마도 그가 전에 사단적인 힘으로 사람들에게서 번 것일 것입니다. 지금 그는 사도들의 특별한 특권을 사서 자기가 사용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에게 회개하지 않는다면 돈과 함께 망할 것이라고 하였고 시몬은 베드로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한 것은 시몬이 행한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안에는 돈으로 어느정도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선물에 대해 값을 지불하려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던지 모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준비하신 구세주를 영접하기를 원하시며 그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은혜에 대해 주님께 사랑을 나타내려고 우리의 물질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4.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남(8:26-29).


지금 이러한 모든 복과 기쁨이 사마리아에서 보여지고 있을 때 빌립은 갑자기 광야로 가도록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때일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빌립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아프리카의 큰 나라인 에디오피아로부터 온 권세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그의 나라로 병거를 타고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에 관해서 들었겠지만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었고 평화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에는 신약성경이 아직 기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구약으로 된 성경을 읽으며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성령님은 빌립에게 병거에 있는 에디오피아 사람에게 가까이 나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거룩한 도성으로 알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진리를 참으로 알았던 유일한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을 성공적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멀리까지 온 이 사람은 만족함 없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충성스러운 종(빌립)이 있었기에 이 내시에게 빛을 비춰주었습니다. 우리도 언제나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5. 빌립이 예언의 뜻을 설명해 줌(8:30-35)


지금 그 에디오피아 사람은 구약성경 가운데 다른 어떤 책보다도 예수님에 관해서 더 많이 말하고 있는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53장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해서 말하고 있었지만 에디오피아 사람에게는 그것이 선지자 자신에 관해서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지 확실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내시에게 그 선지자는 참으로 영광에 들어가시기 전에 우리의 죄를 위해서 고난받으신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고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받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셨더라도 주님께는 죄가 없었기 때문에 영광으로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홀로 하늘에 영원토록 계셔야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곳은 어떤 죄도 들어갈 수 없는데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슬픈 일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을 겪으셨는데도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주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이 당신에게도 헛된 것입니까?


6. 빌립이 에디오피아 사람에게 침례를 주고 돌아감(8:36-40)


에디오피아 사람은 주 예수님에 관한 장엄한 이야기를 즉시 믿었으며 자기의 믿음을 나타내기 위해 바로 침례를 받을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빌립은 기쁨으로 침례를 베풀었고 그 일을 마치자 성령님께서 그를 데리고 가심으로 에디오피아 사람은 더이상 그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을 알게 된 기쁨으로 그의 길을 계속 갔습니다. 우리는 그가 고국에 도착했을 때 고난 받으시고 영화롭게 되신 구세주에 대해 여왕과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한 사람 빌립의 충성스러운 순종을 통해서 아프리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8장에서 사도들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복음을 퍼뜨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믿는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보내시든 주님께 기꺼이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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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6과 하나님의 종

                                                    (6장 1절~23절)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가르침은 죄악의 생활을 조장하거나 허용하는가?


   은혜의 복음을 전파할 때 사람들은 한결같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할 일의 전부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이라면, 세상에서 나가서 마음대로 생활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로마서 6장은, 왜 이것이 불가능한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믿는 자들이 제일 먼저 직면하는 크나 큰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옛 성품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악하고 부패한 성품을 고치거나 개선시킬 의향을 가지고 계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성품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하신 해결책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주께서는 죽으실 때,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예수께서 죽으실 때, 모든 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옛성품에 속한 모든것은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셨을 때, 우리도 장사되었습니다. 그것이 죄 지은 피조물로서의 우리를 영원히 하나님의 면전에서 제거해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그가 갈 곳 즉, 사망으로 추방되었습니다.


   2. 침례가 이 모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3~7). 우리는 물속에 들어갈 때, 우리가 아담의 후손으로서 꼭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 자아, 곧 사람이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영원히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으므로, 이제 우리는  죄와 상관할 권리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죄하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은 자와 같이 보시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주장할 권리가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를 다시 산 자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8,10절). 그러나 우리가 다시 산 것은 우리의 옛 생활을 반복하려 함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다시 살아난 것은 이제부터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4. 이것은 다 신성한 사실들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느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모든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고, 그와 함께 다시 일으키심을 받아 새 생명 곧, 그의 생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신분인 것을 알고 있기를 원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음으로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5. 다음 관계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기는" 것입니다(11,12절). 이것은 당신의 신분상으로 이미 그렇게 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 사실이 당신의 실제생활에서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죄와, 자아와,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산자로 죄가 당신을 다스리지 못하게 행동하십시오. 당신이 죄에 대해서 죽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6.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 마땅합니다(13절). 하나님이 당신을 주관하시도록, 당신 몸의 지체들을 매일, 아니 항상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 때에 당신은 자기 중심적 생활을 하는 대신에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거하시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7. 죄가 믿는 자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14절).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대단히 중대한 사실입니다.


   1) 사람이 율법 아래 있으면, 죄가 그를 주관합니다. 율법은 할 일을 가르쳐 주지만, 그 일을 행할 능력은 주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죄인에게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하면, 그는 곧 그것을 더욱 더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은혜 아래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라.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말하기를 "주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거룩하게 살라"고 합니다. 사람은 의무감이나 형벌이 두려워서는 하지 않을 것이라도 사랑 때문에는 합니다.

   30 그리스도인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가 죄 가운데 살아도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미워하는 새 성품을 받았습니다. 또한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며, 격려해 주시는 성령님이 그속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구주께서 자기 죄 때문에 어떠한 희생을 당하셨는가를 잊지 못합니다. 이제 그는 그가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하는 자의 종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과거에는 항상 죄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생활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16~21절).


   8.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크게 사모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속에 나타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종으로 드리는 것입니다(22,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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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생활의 원리

                                                                                                 윌리암 맥도날드 저

 

                6장     침 례

                  Buried in Baptism

 

   침례는 무엇이며 누가 침례를 받아야 하는가?

 

   주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19~20).

 

   주님은, 제자들이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가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선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어디에 있는 누구든지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기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좋은 "소식" 입니다. 주님은 또한 복음을 믿은 사람들이 침례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먼저 "침례의식은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가?" 이고 두 번째는 "침례의 의미는 무엇인가" 입니다.

 

   우리는 첫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사도행전 8장 26~39절까지 찾아봐야 합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어떤 남자가 구원을 받고 나서 곧장 침례 받는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남자는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담당하는 중요한 관리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레를 타고 가면서 구약 말씀을 읽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자신이 읽고 있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절히 알기 원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같은 시각, 성령님은 빌립이라고 하는 전도자에게 에디오피아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장소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은 순종했습니다. 빌립이 수레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빌립은 그 사람이 이사야 53장을 크게 소리 내어 읽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빌립은 그가 읽고 있는 성경이 곧 주 예수에 대한 것임과 주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빌립에게 자신이 침례를 받을 수 있는 지 물어보았습니다. 빌립은 그가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었기 때문에 침례 받는 것에 찬성했습니다. 그들은 물 가까이 수레를 세웠습니다. 사도행전 8장 38~39절을 보면 그가 어떻게 침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데,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침례(세례)를 주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라는 말씀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는 침례 받은 사람은 물속에 잠기는 그 순간에 장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징, 혹은 모형(picture)인데, 곧 이어지는 두 번째 질문에 답변할 때 논의 될 것입니다.

 

   오랜 옛날, 길가에서 그렇게 간단하게 행해진 침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또 침례가 오늘날 의미하는 것은 무었일까요?

 

   1) 침례는 주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의 행동입니다(마 28:19).

   이것은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물로써 씻겨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요일 1:9). 따라서 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이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행 18:8). 침례를 받음으로 주님의 뜻에 순종할 때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 또는 내적인 깨끗함 그리고 평화를 가지게 됩니다(벧전 3:21).

 

   2) 침례는 영적인 진리에 대한 상징이며 모형입니다(롬 6:3~5).

   <1> 때때로 성경에는 물이 심판과 죽음에 대한 모형으로 사용됩니다.

   <2>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을 때, 그분은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심판과 죽음의 물 아래로 내려가셨습니다(시 42:7).

   <3>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을 때 믿는 자들도 함께 죽었던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었을 때 믿는 자들도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믿는 자들도 함께 부활했습니다. 이렇듯 침례는 성도들의 죽음과 장사됨, 그리고 부활에 대한 모형입니다. 그분은 물속으로 내려가셔서(장사되어) 하나님을 위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4> 하나님은 믿는 자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으로 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성도 안에서 보시는 생명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성품의 생명입니다(갈 2:20).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 그리고 구원 받기 전의 모든 것에 대해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더는 그를 죽은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음 받은 새사람으로 보십니다(고후 5:17).

   <5> 그리스도인이 침례를 받을 때,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로 인해 얻게 된 자신의 신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는 죽음, 장사됨 그리고 부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습니다(골 2:12, 3:1~2).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지금부터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는 침례 받을 때에, 자신이 사랑한 죄의 옛성품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고 친구들에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는 데 사용하신 그 큰 힘(엡 1:19)을 또한 그리스도인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데도 사용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새 생명을 보여 주기를 기대하십니다(롬 6:4).

 

   3) 진실로 침례를 받은 사람은 그의 새로운 생명으로 그의 옛 성품, 즉 인간의 본성이 죽었음을 보여줍니다. 만약 옛 성품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을 뿐더러 새로운 생명이 살아 있지 않다면 침례는 쓸모없는 외적인 의식일 뿐입니다.

 

   오래 전에는 종종, 침례를 받은 신자가 고문을 받기도하고,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새로운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만 하면, 그들 역시 침례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새로이 침례를 받은 사람들이 사형당한 사람들을 대신했습니다.(고전 15:29). 오늘날에도 몇몇 지역에서는 이 침례가, 신자들을 반대하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굉장한 적대심을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때때로 어떤 사람이 침례는 받지 않고 자신의 입으로 그리스도를 고백만 한다면, 그는 외톨이가 되는 정도의 고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침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를 시인했을 때에는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이 그를 대항해 흉포한 공격을 시작할 것입니다. 이렇듯 침례를 받는 신자는 큰 고난을 겪기도 하지만, 에티오피아 내시가 가졌던 것과 동일한 기쁨 또한 갖게 됩니다. 우리는 에티오피아 내시가 흔연히 길을 갔다(충만한 기쁨을 가지고 자기의 길을 갔다 -역자 주) 는 것을 읽었습니다.(행 8:39).

 

   이제 당신은 이 진리를 압니다. 당신이 이 진리를 실행에 옮긴다면 당신은 아주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요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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