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초등학문 아래 갇혀 있는 불쌍한 기독교인들이여!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갈라디아서 4:9).


   에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강하게 책망하셨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리새인들이다. 주님은 때때로 그들과 진지하게 대화하기도 하셨지만 성경 여러 곳에서 그들을 질타하시며 책망하시곤 하셨다. 그러면 그들은 왜 책망을 받아야 했던가?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여기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저들은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마태복음 23:3).

   첫째로 이 말씀에서 보는 것같이 그들은 모든 것에 대하여 말로만 하고 행함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시키는 데는 잘 훈련되어 있었으나 자신은 그런 일을 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섬기는 자로 있지 아니하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들이었다. 쉽게 말하면 그들은 양들을 위하여 고난 당하는 목자의 모습이 아니라 양들 위에 군림하며, 행세하는 선생의 자리에 있었으며. 양들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책망하는 말씀 중에 이미 지적되어 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있을 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에스겔 34:2~3.

   주님이 에스겔을 통해서 지적한 이 목자상은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쉽게 볼 수 있는 목자상이 아닌가?

   여러분이 주의 깊게 에스겔 34장 나머지 말씀들을 살펴보면 오늘날 기독교의 큰 문제점 중 하나를 알게 되리라 믿는다. 그것은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위에 군림하여 사람을 임의로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한 사람이 하나님과 인간을 중보하는 중요한 교량역할을 하는 것처럼 행세하는 모습은 얼마나 가증한 모습인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어떤 신령한 자라도 인간으로서 예수님의 중보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수는 없다. 이와 같은 거짓 목자가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양떼를 이익의 도구로 삼는 일이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자행되어도 이상하게 보지 않으니 이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가슴 아플 따름이다.

   둘째로, 바리새인들이 지적 받은 것은 그들의 심한 형식주의였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마태복음 23:5).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은 말씀 외에도 많은 형식과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절기와 기록되지 않은 절기를 만들어 지키되 알맹이는 빼고 형식주의에 빠져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

   필자가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이 부분, 즉 초등학문의 내용 중 "달과 날과 절기를 삼가 지키므로"(갈라디아서 4:10) 바울을 근심케 하였던 부분이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죄가 용서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밝히 보였거늘(갈라디아서 3:1) 사단의 간계로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져서 점점 복음의 초점이 흐려져 가고 있었다. 그 율법주의는 사람이 믿음으로만 구원받기에 부족해서 행위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므로 하나님께서 온전히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훼손시켰던 것이다.

   오! 독자여, 부디 하나님을 자존심 상하시게 하지 말라.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인간의 행위를 조금 받고 구원을 반쪽 선물로 주시겠는가? 신성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온전한 선물이다.

   또한 그들이 빠졌던 형식주의는 신앙의 핵심인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하나님과 십자가의 도를 깨달아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보다 형식과 외식에 치우침으로 구원받는 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날과 달과 절기 등은 형식적으로 피곤하게 지켰지만 그들의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구속의 도리를 따르는 데는 약해지고 있었다.

   이제 바리새인들이 지켰던 절기를 생각하여 보자. 그들은 유월절을 열심히 지켰고 대대적인 행사를 행했지만 실제로 유월절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다락방으로 내몰아버리지 아니하였던가? 그들은 안식일을 열심히 지켰지만 안식일의 주인 되는 예수님(마태복음 12:8)을 몰라볼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던가?

   필자는 한국의 기독교 상황을 보면서 예수님 당시의 모습과 상당히 흡사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신자의 가슴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가 새겨져 있지 아니하다면 크리스마스가 무엇 때문에 필요하겠는가? 만약 크리스마스가 이방인을 전도하지 못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크리스마스만 되면 왜 청소년들은 거리에서 방황하며 밤새 돌아다니는 것인가? 예수님의 탄생하심과 12월 25일이 1년 중 술이 제일 많이 팔리는 것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심지어 어떤 잡지에서는 "크리스마스 베이비"라는 신조어마저 생겼음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이와 관련된 한 산부인과 의사의 말에 의하면 크리스마스 후 정확히 10개월 후에는 부모 없는 사생아가 갑자기 늘어난다는 것이다. 오! 이 얼마나 탄식할 일인가? 성탄절이라고 하는 이 절기가 오히려 세상을 타락시키는데 한 몫을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또한 오늘날 부활절마다 초교파적으로 대대적인 행사를 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의 현실이지만 필자가 만나본 수많은 기독교인 중에는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 왜 죽으셔야만 했는가? 예수님의 부활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시원스러운 해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부활의 의미를 질문하면 단순히 다른 종교 창시자는 다 죽고 그후에 소식이 없는데 예수님만이 죽음을 극복하셨다고 하는 위로가 고작이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가 그대의 양심에 새겨지지 않았다면 부활절 행사에 몇 십 번 참석하였다 할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 기독교가 쉽게 망하는 지름길은 형식과 절기에만 집착하여 참된 믿음의 의미를 신자의 마음에 심는 일을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대적자들이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이 옳은가 물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무었이었는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누가복음 20:25) 하지 아니하셨는가?

   하나님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양심이요 마음이요 영혼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외모와 형식이 아니라 그들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이제 계속해서 마태복음 23장을 통해서 주님께서 지적하신 바리새인의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태복음 23;23).

   이 십일조 문제를 잘 분석해 보면 형식과 내면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14장 17~20절에 십일조가 처음으로 언급되어 있다. 아브람이 조카 롯을 사로잡아갔던 왕들을 파하고 조카 롯과 모든 사로잡힌 사람들과 물건을 찾아 가지고 돌아오던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나와서 이김의 근원은 하나님께로부터임을 강조했다.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세기 14:20).

   이 말씀을 정밀하게 분석하여 보면 먼저 아브람이 깨달은 것은 이 전쟁이 아브람이나 그의 군대들의 용맹으로 승리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 아브람이 멜기세덱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 중심의 상당 부분이 자만에 빠져서 자기의 능력으로 이긴 것처럼 생각하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 전쟁의 승리의 원인을 깨우쳐 주었으며 아브람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고 감격하여 그에게 10분의 1을 드렸다. 이것은 주님의 베푸신 은혜에 대한 넘치는 감사의 표시였던 것이다. 이 멜기세덱은 예수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는바(히브리서 7장 참조), 오늘날 우리가 주님께 어떤 자세로 헌금과 헌물을 드려야 할 것인가를 깨우쳐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십일조는 형식만 남고 그들 중심에 이루어져야 할 내면적 깨달음, 즉 의와 인과 신은 사라졌던 것이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드릴 때에 가졌던 하나님을 경외하던 믿음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말라기 시대에도 역시 하나님은 경외하지 아니하고 외식적으로 드렸던 십일조와 헌물 때문에 차라리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말라기 1:10)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중심이 빠진 형식적 절기와 의식은 주님의 마음에 얼마나 고통을 주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태복음 23:27~28).

   바리새인들의 또다른 문제점은 외형적인 것을 너무 꾸미고 단장하였으나 내면적인 것은 썩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특별한 옷을 지어 입었으며 경문을 차고 다녔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100년의 세월을 흐르면서 양적 팽창과 물질적 부요에는 성공하였으나 신자의 마음 중심에 믿음의 본질을 심어주어 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데는 무관심하였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물질이 풍요하기 때문에 수 십, 수 백억을 들여 거대한 예배당을 지어 몇 부로 나누어 예배를 드리고 있다. 실로 그 숫자와 그 외형적 장중함에 있어서 엄청난 발전이다. 한국 기독교 100년 사에 이와 같은 양적 팽창은 세계 어느 나라 기독교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생각하여 보라. 예수님이 이 거대한 예배당에서 성가대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으며 예배를 진행하고 헌금자의 명단을 일일이 불러서 드러내어가며 에배하는 곳에 기쁨으로 동참하실 수 있다고 보는가?

   가난한 신자들은 돈 몇 푼이 없어 자식들 학업을 중단하고 공장으로 보내야만 하지 아니한가? 소년 가장의 눈물어린 호소나 불쌍한 이웃의 호소를 교회가 외면하고 형식주의, 외형주의에 빠져서 거대한 건물 짓는 데만 혈안이 되어도 괜찮다고 보는가? 한국의 기독교가 이와 같은 길로 계속 치닫는다면 스스로 자멸하고 있음을 어찌 알지 못하는가?

   신앙의 본질은 외적인 꾸밈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 자체가 아닌가? 찬송가에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되고..."(찬송가 208장)라는 가사가 있는데 참으로 신앙의 본질을 잘 말하여 주고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죄인의 마음에 깨달아지게 될 때 그는 전혀 새 사람으로 변화된다. 왜냐하면 복음이 그의 영혼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죄를 짓고 죄인의 신분으로 지옥을 향하여 가고 있던 저주받은 자들에게 복음은 이제 그가 모든 죄에서 벗어났음을 가르치고 있다. 이제 그는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나 의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천국의 소망을 가지며 당당한 성도가 되었다는--"머리털보다도 더 많던 내 죄가 눈보다 더 희어졌네" (찬송가 208장)--사실을 깨달을 때 그의 중심은 기쁨으로 가득 채워질 수밖에 없다. 그의 중심에 있었던 의심과 근심의 구름이 모두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의심의 구름이 사라져 버림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찬송가 208장).

   날과 달과 절기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한 가지만 생각하여 보자. 만약 한국인이 너무 부모에 효도하여 효심이 지나치므로 나라 발전 및 공업 발전에 지장이 있을 정도라고 하자. 쉽게 말하여 부모님께 효도하느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결근하고 직장에 불성실한 상황이라면 구태여 "어버이날"을 따로 만들어서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가르칠 필요가 있겠는가? 오히려 너무 부모를 등한시하고 돌아보지 않기에 어버이날을 정한 것이리라.

   기독교 절기도 이와 같아서 신자의 내면에 이 놀라운 변화와 깨달음을 통해서 주님의 오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내 죄를 용서하신 주님을 눈물로 날마다 감사하는 신자에게 부활절이 따로 필요하겠는가?

   신앙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독자여! 그대의 마음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모셔 들이라. 그리하면 그대의 죄가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해결된 사실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주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찬양하여 1년 365일이 날마다 성탄절, 부활절이 될 것이다. 그대의 마음에 이와 같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기를 기도드린다.

   오, 독자여! 주님의 오심은 그대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며(요한복음 3:16), 주님의 죽으심은 그대의 죄를 다 용서하셨으며(요한복음 19:30), 그분의 부활하심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대를 구원하신 증인으로서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25).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그대의 마음 중심에 자리 잡았는가? 그대의 마음으로 믿어졌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구원 받은 자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10).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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