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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7.20 갈라디아서 제7과 어린 자녀들과 아들들

갈라디아서


                           제 7 과

                       어린 자녀들과 아들들(4:1-16)


   4장의 첫부분에서 바울은 계속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과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린 자녀와 장성한 아들이라는 두 부류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4:1, 2 이것은 자기의 재산권을 그 아들이 어떤 성숙한 나이가 되면 넘겨주려고 하는 부유한 아버지의 어린 자녀에 대한 묘사입니다. (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4: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그러나 어린 자녀인 때에는 아직 미성년자로서 마치 종과 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에게는 그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와 그의 인격을 책임지고 있는 후견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 유산이 분명히 그의 것이지만, 그가 자랄 때까지는 그것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4:3 이것은 율법 아래있는 유대인의 상태입니다.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그들은 어린 자녀들이며, 마치 종들처럼 율법에 의해 혹사 당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매여있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유대 종교의 초보적인 원리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예식과 의식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아버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하여 계획된 것입니다. 조각들을 사용하여 산술계산의 기초를 배우거나, 그림들을 사용하여 사물을 알아 맞추거나, 알파벳을 배우는 어린 아이에게서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율법은 완전한 그림자요, 묘사이며, 육체적이고, 외적인 것을 사용하여 영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할례가 한 예입니다. 유대교는 육체적이요, 외적이며, 일시적인 것이고, 기독교는 영적이요, 내적이며, 영구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외적인 것들은 "자녀들" 에 대한 "속박" 의 한 형태입니다.

4:4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는 2절의 예화에 있는 "아버지의 정한 때" 에 해당하는 시대를 말합니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요컨대, 여기에서 우리는 구주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주님은 여자에게서 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단지 사람이셨다면, 주님께서 여자에게서 나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사람으로 나실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의 경우에는 그 표현 자체가 주님의 독특한 인성과 주님의 탄생의 독특한 방법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주님은 율법 아래에서 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으로서 주 예수님은 결코 율법 아래 계신 분이 아니시며, 율법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시는 은혜로 주님의 생명 안에서 율법을 존중하며, 주님의 죽음 안에서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만드신 율법 아래 자신을 놓으셨습니다.

4:5 율법은 그것을 어긴 사람에게 그 삯을 요구하는데 그 삯은 사망입니다.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삯을 치루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그 놀라운 아들의 신분으로 이끌어 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인류의 한사람으로서, 유대 민족의 한사람으로서 세상에 오셔서 율법이 요구하는 삯을 치루셨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죽으심은 무한한 가치가 있으므로 아무리 많은 수의 죄인일지라도 충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대속자로 죽으실 수 있었습니다. 고벳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인자(사람의 아들)가 되심으로 사람의 아들들인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교체인가!" 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종이 된 동안은 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아들로 받으시기 위하여 그들을 율법의 구속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의 차이점에 주목하십시오(롬 8:14과 16을 비교하십시오). 신자는 어린 자녀로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납니다(요 1:12을 보십시오). 여기에서의 강조점은 아들로서의 특권과 책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탄생에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아들로서 가족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즉시 아들이며 후사(상속자)로서 유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있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가르침들은 성도들 사이에서 아무도 어린자녀가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모두는 성숙한 아들들로 다루어집니다.

   영적인 의미에서의 양자됨은 현대 생활에서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우리가 양자됨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다른사람의 자녀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자녀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양자됨의 의미는 신자들에게 성숙한 아들들이라는 신분과 함께 그 신분에 어울리는 모든 특권을 주는 것입니다.

4:6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 신분의 위엄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성령님은 아들됨에 대한 자각을 하게 하시고 성도들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문안하게 하십니다. "아바, 아버지" 는 다정한 문안의 형태이며, 아버지에 대한 아람어와 헬라어를 결합시킨 것입니다. 어떠한 종도 한 가정의 가장에게 이러한 방법으로 문안하지 않으며, 그것은 오직 가족 구성원들만의 것으로 사랑과 신뢰에 대한 표현입니다.

4:7 신자는 더 이상 종이 아니며, 율법아래 있지 않습니다.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제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든 재산에 대한 후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후사입니다. 하나님이 소유하신 모든 것은 믿음으로써 그의 것입니다.

   해리슨은 "주님의 사랑하시는 자녀여, 만유는 당신의 것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상상을 능가하는 재산의 실제에 대해 당신을 깨우기 위해 주님께서 고린도전서 3:22, 23에서 이것을 당신에게 말씀하셨다. 우주를 생각해 보라. 그것이 누구의 것인가, 주님의 것이기에 당신의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왕답게 살아가라" 고 말했습니다.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어리석음(4:8-11)


   갈라디아인들은 우상과 신화적인 신들에 대한 속박 아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들은 다른 형태의 속박에 속하였는데 그것은 율법의 속박입니다(4:8-11).

4:8 그들은 회심하기 전에 나무와 돌로 만든 거짓 신들인 우상을 섬기던 이교도들이었습니다.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4:9 그러나 지금 갈라디아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그들은 하나님을 알았고, 혹 그들이 깊은 체험적인  방법으로는 주님을 몰랐을 지라도 최소한 그들은 주님께서 알게 하신 자들 즉, 구원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능력과 부 (그들이 상속받을)로부터 약하고 천한 일들로  돌아섰으며, 그일은 율법에 관련된 것으로, 할례나 성일, 식사에 대한 규칙들입니다. 그들은 다시 그들 자신을 구원하지도 부유하게 하지도 못하는 일에 속박시켰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그 모든 예식들을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 으로 분류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주셨으며, 다른 곳에서 이 율법을 거룩하고 선한 것이라고 주장한(롬 7:12) 그 율법을 강한 어조로 묘사한 것입니다. 이 설명은 율법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보여진 것처럼 어떤 목적과 어떤 시대를 위해 의도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서 율법을 사용하려는 것은 구원과 거룩의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를 대치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을 그리스도와 견주어 본다면 그 율법은 약하며, 무익하고, 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정하신 율법은 그들의 시대와 장소에서는 아름다운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주 예수님으로 대치하려할 때 분명한 장애물입니다.

4:10 이것은 그리스도로부터 율법으로 돌아서는 우상숭배입니다.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그러나 갈라디아인들은 유대인의 안식일과 명절과 절기를 지켰습니다.

4:11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고백한 사람들이 아직까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려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했습니다.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도 날과 달과 해를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쁜 얼굴을 구하기 위해 그들의 힘으로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 강한 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어떤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 범위에서는 그들에게 구주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이러한 태도로 기록하였다면 오늘날 율법을 지킴으로 거룩에 도달하려고 하는 고백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떻게 기록했겠습니까? 바울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들어온 유전-사람이 임명하는 제사장, 제사장의 구별된 의복, 안식일 준수, 거룩한 장소, 초, 거룩한 물 등등-을 비난하지 않았습니까?


개인적인 호소(4:12-16)


4:12 분명히 갈라디아인들은 그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하여준 바울에 대한 감사를 잊었던 것입니다.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실패와 그들에 대한 근심 대신에 그들에게 "형제들" 이라고 문안했습니다.

   바울도 율법아래 있던 유대인이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에서 구출되었고 더 이상 율법아래에서 살지 않는 "나와 같이 되" 라고 말했습니다. 이방인인 갈라디아인들은 율법아래 있던 자들이 아니며, 지금도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유대인이었던 내가 너희와 같이 되어 이제는 이방인들이 늘 누리고 있었던 율법에서의 자유를 즐기고 있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무엇을 염두에 둔 것인지 아주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그는 갈라디아인들이 자신을 대우한 것에 어떠한 개인적인 침해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로부터 거짓 선생들에게로 돌아선 것은 바울에게 개인적인 타격을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타격을 준 것으로 그들 자신에게 해를 입힌 것입니다.

4:13 이 구절은 "육체의 약한 것으로" (다비역)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복음은 처음에 육체의 약한 것으로 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약한 것, 멸시받는 것, 가난한 것을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주님의 일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십니다.

4:14 여기에서의 시험(temptation)은 시련(trial) 또는 검사(test)를 의미합니다.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바울의 병은 그 자신과 아마도 그에게서 듣는 사람들에게 시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인들은 바울의 육체적인 모습이나 언변 때문에 그를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즉, 하나님의 보내신 전도자로서, 그리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전하는 말씀을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전도자들을 대우하는 것에 관한 교훈이 됩니다. 우리가 그들을 진심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주님을 그렇게 영접하는 것입니다(눅 10:16).

4:15 그들이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 그것이 그들의 영혼에 얼마나 부요한 복인지 깨달았습니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들의 감사가 너무도 커서 할수만 있었다면 그들의 눈이라도 바울에게 주었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육체의 가시" 가 안질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감사의 정신이 어디에 있습니까? 불행하게도 아침 이슬과 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4:16 바울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변한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그는 지금도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정직하게 복음의 진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그들의 대적이 되었다면, 그들의 위치는 사실상 위험스러운 것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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