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국 칼럼] 불교권 선교 이렇게 접근하자
한정국 목사(KWMA 사무총장) l 등록일:2016-02-05 20:22:35 l 수정일:2016-02-09 16:30:41
▲한정국 목사 ⓒ뉴스미션 |
한국인은 불교권에서 자랐기에 불교를 잘 이해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권에서 일하는 한인 선교사들이 각 지역마다 다른 불교 상황에서 상당히 고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따라서 우리는 불교도 심연에 있는 그들의 두려움과 함께 그들이 갖는 수치심 그리고 죄의식의 세계를 분석적으로 해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관계성을 연구한다면 그들을 향한 우리의 선교전략 접근도 상당히 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움과 수치, 그리고 죄의식의 관계성
불교권의 사람들은 두려움과 수치 문화 속에 종교적 DNA가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 문화는 두려움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희구가 강하며, 수치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수많은 종교적 노력을 추구하고 있다. 이 두 감정은 그들이 인생의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벗어날 수 없는 감정이다. 죄의식은 이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감정일 뿐이다.
그러나 현재 서구적 교육과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동양 불교인들은 서양인의 사고방식인 죄의식에도 공감을 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 불교권 사람들은 사뭇 3개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세 감정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닌, 전체적인 감정으로 어우러져 불교인들의 행동에서 들쑥날쑥하게 발현되기도 한다.
어쩌면 이러한 불교권에서 일하는 기독교 선교사들은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인정케 하는 로마서 3장 23절, 6장 23절에 따른 접근보다는, 이들 내면에 있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끌어내는 요한복음 14장 27절의 접근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이것은 필자의 간증이기도 하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peace)을 말한 예수님의 약속이 유ㆍ불ㆍ선 3교권의 필자에게 훨씬 어필했고, 필자는 이 평안을 체험한 후에 죄의식의 깊이가 드러나고 수치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이 체험은 필자에게 깊은 회개의 눈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했다.
그래프로 그려본 두려움, 수치 그리고 죄의식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불교인이나 기타 종교인이나 아담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으로 갖는 감정일 것이다. 특히 불교권에서의 두려움은 아주 깊고 다양해서, 다신교적 불교를 만들 정도로 순수 불교가 아닌 혼합적 불교, 심지어 죽은 조상까지도 신으로 떠받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필자는 이들의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이 창의적으로 생각해보았고, 이를 그래프로 설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우리는 불교도 심연에 있는 그들의 두려움과 함께 그들이 갖는 수치심 그리고 죄의식의 세계를 분석적으로 해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관계성을 연구한다면 그들을 향한 우리의 선교전략 접근도 상당히 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움과 수치, 그리고 죄의식의 관계성
불교권의 사람들은 두려움과 수치 문화 속에 종교적 DNA가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 문화는 두려움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희구가 강하며, 수치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수많은 종교적 노력을 추구하고 있다. 이 두 감정은 그들이 인생의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벗어날 수 없는 감정이다. 죄의식은 이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감정일 뿐이다.
그러나 현재 서구적 교육과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동양 불교인들은 서양인의 사고방식인 죄의식에도 공감을 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 불교권 사람들은 사뭇 3개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세 감정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닌, 전체적인 감정으로 어우러져 불교인들의 행동에서 들쑥날쑥하게 발현되기도 한다.
어쩌면 이러한 불교권에서 일하는 기독교 선교사들은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인정케 하는 로마서 3장 23절, 6장 23절에 따른 접근보다는, 이들 내면에 있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끌어내는 요한복음 14장 27절의 접근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이것은 필자의 간증이기도 하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peace)을 말한 예수님의 약속이 유ㆍ불ㆍ선 3교권의 필자에게 훨씬 어필했고, 필자는 이 평안을 체험한 후에 죄의식의 깊이가 드러나고 수치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이 체험은 필자에게 깊은 회개의 눈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했다.
그래프로 그려본 두려움, 수치 그리고 죄의식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불교인이나 기타 종교인이나 아담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으로 갖는 감정일 것이다. 특히 불교권에서의 두려움은 아주 깊고 다양해서, 다신교적 불교를 만들 정도로 순수 불교가 아닌 혼합적 불교, 심지어 죽은 조상까지도 신으로 떠받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필자는 이들의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이 창의적으로 생각해보았고, 이를 그래프로 설명하고자 한다.
상기 그래프처럼 불교인은 두려움이 많을수록 수치감의 지수도 높아지는데, 현대 불교도들은 여기에 죄의식까지 가세해 그 수치심이 상승한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 이르면 수치감이 더 상승하지 않고 도리어 범죄에도 양심이 무뎌지는 순간을 맞기도 한다. 이것은 그의 내면적 두려움이 증가하면서도 수치심을 억누르는 작용을 통해 내면의 폭발을 막고자 하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인도차이나에서 가난의 깊은 굴레에 빠져있는 불교도 부모의 경우, 장성해가는 딸들에 대한 교육과 대안 마련이 속수무책임에 대한 두려움과 아비로서의 수치가 함께 증가한다. 두려움이 어느 정도까지 수준일 경우에는 수치감을 크게 느끼나, 그 시점을 넘어서면 자신들의 딸들을 인신매매하는 것까지도 허용하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패턴을 보인다. 이들은 마치 딸들을 취직시켜준다는 명분 속에 자신들의 수치심을 억누르고, 미래에 닥칠 두려움이 점증함에도 이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부처의 자비에 맡기는 모순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 불교인들에게 나타나는 이 같은 모순적 행동은 다음과 같은 그래프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싶다.
죄의식과 수치심이 비례할 수 있다는 것이 서구적 사고이자 서구적 기독교 세계관이라면, 이는 동양적 세계관과는 사뭇 다르다. 동양적 관점에서는 수치심와 죄의식이 서로 비례하지 않으며, 현상적으로는 사뭇 반비례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관찰이다.
과거 한국인들은 수치감이 커질 때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정절을 지켰으며, 일본인들은 할복자살함으로써 집단을 위험에서 보호하고자 했고, 심지어 파키스탄 등 회교권에서는 명예살인이라는 것이 정당화되기도 한다. 한 가정의 소녀가 성폭행을 당했음에도, 그 오빠와 아버지가 소녀를 죽임으로써 가정의 수치심을 명예로 승화시키는 어이없는 일이 수치문화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특히 이런 일이 서구 교육의 영항으로 인해 많이 이성화되고 있음에도 동양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음은, 이들의 상관관계가 복잡하면서도 뿌리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내와 딸이 받은 뇌물 80여억 원을 검찰이 점차 추궁해올 때, 인권변호사 출신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를 지금도 그리워하고 칭송하는 노사모의 심리적 구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수천억 원을 기업으로부터 징수하여 감옥살이까지 하고도 아직도 엄청난 추징 세금을 내지 않은 채, 죄의식 없이 살아가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저의 전 재산이 29만 원"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뻔뻔한 그의 죄의식은 그가 수치로 느끼는 수많은 민중들의 냉소와 함께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이 오늘날 유ㆍ불ㆍ선 3교로 살아왔었던 그가 백담사에서 깨달은 민속불교인의 현주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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