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칼럼]
"...아버지여 내가 ...죄를 얻었사오니..." (눅 15:21).
아버지가 그를 맞으러 달려나가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춘 것은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 비로소 이루어졌습니다. 회개가 있기 전에 먼저 용서를 베풀었다면 그것은 의로운 처사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성경의 원칙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입니다(눅 17:3).
탕자가 먼 나라에 있는 동안 아버지가 그에게 도움을 보냈다는 기록은 일절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그 거역자의 삶 속에서 행해질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목적은 그 완고한 자를 철저히 무력한 상태로 끌어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탕자가 자기 포기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과, 그는 밑바닥에 내려가기 전에는 결코 올려다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 방황자가 그런 상태에 속히 이르면 이를수록 그는 속히 회복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이에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주님께 맡기고 그러한 철저한 참회의 순간이 오기를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부모에게-특히 어머니들에게-가장 하기 어려운 일 중 하나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거역한 아들 딸을 주님께서 내리신 모든 징계조처에서 구제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모들이 해내는 일은 주님의 목적을 방해하고 그 사랑하는 자녀의 고통을 연장시키는 것뿐입니다.
스펄젼은 말하기를, "잘못을 행한 자들에 대한 가장 진실한 사랑은 그들과 친근히 지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예수님께 충성하는 것이다" 라고했습니다. 범죄한 사람을 계속 그 가운데 머물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 사람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그를 회복시켜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다윗이 범한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는 압살롬을 회개하기 전에 데려온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압살롬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면서 그의 부친에게 반역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의 부친을 예루살렘에서 쫓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가 군대를 거느리고 다윗을 죽이려 나섰을 때에도 다윗은 그의 군사들에게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생각을 바꾸고는(압살롬을 데려오자고 왕에게 권한 자가 요압이었음-역주) 압살롬을 살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들 딸을 비참한 삶 가운데 처하게 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고통을 기꺼이 견디는 부모들은 종종 보다 큰 슬픔을 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