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 결의로 다시금 주목 받는 주기철 목사의 ‘순교 신앙’
정원희(juventus88@hanmail.net) l 등록일:2016-08-01 18:24:54 l 수정일:2016-08-02 09:53:53 
     

지난해 개봉한 영화 <일사각오>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이자 항일 독립운동가인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를 다뤄 기독교인들은 물론, 비기독교인들에게도 큰 감동을 선사했다. 이런 가운데 예장합동은 지난 1939년 당시 주기철 목사의 목사직을 면직키로 했던 교단 내 결정을 번복하고, 주 목사의 복직 및 복권을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최근 다시 주목 받고 있는 주 목사의 생애와 신앙을 살펴봤다.
 
 ▲예장합동이 최근 주기철 목사의 복직을 결정하며, 다시금 주 목사의 삶이 조명받고 있다. 사진은 평양 산정현교회를 담임하던 당시의 주 목사(앞 줄 왼쪽 네 번째)와 제직들의 모습

이름처럼 평생 '기독교를 철저히 신앙한'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의 원래 이름은 주기복으로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에서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주 목사는 집안 어른이었던 주기효가 세운 개통학교에 입학해 민족 정신에 대해 배우고, 이후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에 유학하며 애국애족 마음을 품게 된다.
 
그는 오산학교에 재학할 당시 세례를 받고, 아명이었던 기복에서 기철이란 이름으로 바꾸게 되는데, 이는 '기독교를 철저히 신앙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엔 산업을 일으켜 민족을 바로 세우겠다는 뜻을 품고 연희전문대학 상과대에 진학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앓던 지병이 심해져 이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다시 창원에 돌아온 주기철 목사는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한 집회에 참석하고, 이곳에서 목회자의 길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집회는 한국교회 최초의 부흥사인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였다.
 
이날 이후 주 목사의 삶은 자신의 이름처럼 평생 철저하게 믿음을 고수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양산읍교회에서 전도사로 첫 사역을 시작했고, 졸업 이후엔 목사로서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를 담임했다.
 
주 목사는 담임 목회 당시 말씀에 입각해 철저하게 원칙을 지켰고, 특히 교육과 재정관리에 철저하게 임하는 등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구제 및 선교에 앞장섰다.
 
기도와 말씀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나라에 대한 기도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부산 초량교회에서는 구덕산, 마산 문창교회에서는 무학산에 올라 매일 기도에 힘썼고, 기도로 쓴 설교 원고는 수십 번씩 낭독하는 열정을 보였다. 또한 점점 심해지는 일제의 탄압에 맞서 신사참배를 말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신사참배반대 결의안'을 소속 노회에 제출해 가결 받기도 했다.
 
"나는 내 주님 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 꿇고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더럽게 사는 것보다 죽고 또 죽어 주님을 향한 나의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서 가는 죽음은 나의 소원입니다. 다만 나에게는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입니다."
 
1935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사경회 강사로 초빙돼 ‘일사각오’의 설교를 전한 것이 바로 이 시기다. 주 목사의 죽음을 각오한 민족정신과 신앙을 느낄 수 있어 지금까지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이 되고 있다.
 
“하나님만 알고, 하나님께만 붙잡혀 산 인물”
 
주기철 목사는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뒤엔 철저하게 복음만을 마음에 품고, '민족의 광복'보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더 우선돼야 함을 성도들에게 늘 강조했다. 특히 당시는 조선총독부가 평양의 교회를 압박하기 시작할 때였으며, 이러한 강력한 탄압 앞에 평양에서 열린 제 27회 장로회 총회에서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무기력하게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 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러나 주 목사는 이를 절대 묵인하지 않고 당당하게 일본군의 총칼 앞에 맞서 끝까지 저항한다. 그는 1938년 처음 투옥된 이후 5차례 투옥과 석방을 계속하며 채찍칠, 쇠못밟기, 코에 고추가루 뿌리기, 발바닥 때리기 등 수많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럼에도 그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주 목사의 옥중 수난의 모습은 산정현교회 성도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줬다. 그러나 결국 광복을 1년 여 앞둔 1944년 4월 13일 순교한다.
 
주기철 목사는 마지막으로 투옥되기 전 산정현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최후 설교를 전하게 되는데,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했던 그의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다시 한 번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둘째, 기나긴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셋째,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옵소서.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한국교회 원로 중 한 명인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는 주기철 목사에 대해 “하나님만 아신 분, 하나님께 붙잡혀 사신 분, 하나님만 섬기기 위해서 순교의 길로 가신 분”이라고 소개했다.
 
김 목사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주 목사의 믿음과 삶을 본받아 하나님의 재물이 되고자 하는 순교신앙을 갖게 되길 소망한다”며 “이러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화해와 평화, 통일을 허락하실 것”이라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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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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