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왕의 권능(마태복음8, 9장)-3
마태를 부르심과 그의 집에서 열린 잔치(9 :9-17)
이제 마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애 가운데 가져오신 중요한 영적인 전
환점에 대해 기록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증오의 대상이던 로마
정부의 세금 징수원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좇으라"는 짤막한 두 마디
를 그에게 던지셨습니다. 그의 반응은 무조건적이었고 즉각적이었습니다.
아마 그는 이전에 주님에 대해 소문을 들었을 것이며, 주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대가를 염두에두고 있었기에 주님의 부르심이 떨어졌을 때 기꺼이 순
종했을 것입니다. 자기의 새 주인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자기 동료들에게
주님을 소개하고자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가장 영예로운 손님
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사귐을 갖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관습을 깨뜨리는 심각한 행
위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
들과 함께 잡수시느냐"(11절)라고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
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게 하기는 커녕 긍휼을 기뻐하시며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의 참된 제사를 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무지만을 드러
내었을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병든 자만이 의사를 찾으며, 오직 죄인들만이 구
주를 필요로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위해 오셨으며, 바리새인들
의 자기 만족은 자신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가로막는 장애물
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운문을 잘 파악하고 있었지만 말씀의 의미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셨습
니다. 그들은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겼지만 긍휼에 대해서는 아
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참으로 깨닫고자 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주님의 제자들에게 나아오지 아
니하고 직접 주님 앞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요한에게는 아직
도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11 :2). 요한의 제자들
은 그들의 행동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동 사이의 차이점을 깨닫고 혼란가
운데 있었습니다. 그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왜 금식
하지 않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대답이 본문에서 주어지고 있습니
다. 신랑과 그의 손님들은 함께 즐기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의 즐거움은 합
당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지속되지 않습니다. 신랑이 언젠
가 그들에게서 떠날 것이며, 그때에는 금식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배척당하심에 관해 마태복음에서 처음 사실적으로 암시하고 있
는 부분입니다. 주님의 배척당하심 뒤에는 오랜 동안의 슬픔과 절제의 시간
이 올 것이며, 그때에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금식 뿐만 아니라 세상의 적
으로서 어울리지 않는 다른 많은 것들을 스스로 금하며 슬퍼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하나의 예는 압살롬에 의해 왕 위를 찬탈당하고
이스라엘의 참된 왕인 다윗이 떠나있는 동안 므비보셋이 보인 태도에 잘 나
타나 있습니다(삼하 19 :24).
주님께서는 다음으로 자신이 배척을 당한 후에 일어날 급격한 변화의 일
부를 지적하십니다. 유대주의와는 현격히 다른 새로운 질서가 소개될 것입
니다. 낡은 옷은 단지 새 천으로 기우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새 옷으로 교
체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옷은 외적인 행동이나 외적인 의를 말해 줍니
다(사 61 :10 ; 64 :6 ; 롬 3 :21, 22). 기독교의 복음은 낡은 옷을 기우는 생베
조각을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의의 새 옷을 제
공해 줍니다.
새 포도주는 우리의 심령에 새로운 힘을 공급해 주는 성령님의 능력, 다
시 말해서 의식주의의 메마르고 형식적인 그릇 안에는 담을 수 없는 새로운
삶의 능력과 기쁨을 의미합니다. 낡은 옷과 헌 가죽부대는 쇠퇴해 가는 율
법주의를 상징합니다. 기독교의 새로운 능력을 율법의 체계안으로 도입하
려고 시도함으로써 사람들은 모두를 망가뜨리고 말았습니다. 복음은 새로
운 내적인 능력과 더불어 새로운 외적인 옷도 제공해 줍니다.
한 여인과 한 남자가 그리스도를 만남(9 :18-26)
다음 두 기적은 마치 하나의 기적처럼 뒤섞여 있습니다. 주님께서 남자를
돕기 위해 가고 계실 때, 한 여인이 주님의 뒤로 와서 주님의 겉옷을 만짐으
로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경륜적인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죽
은 자와 같은 이스라엘이 살리심을 받기 전에 주님께 나온 이방인들이 축복
속으로 들어옵니다. 현재 이방인들 가운데 행하시는 주님의 역사가 마쳐지
면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회복
은 모든 "종교적인 음유시인들"(religious minstrels-자신들을 의
롭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푸시는 은혜를
거부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짐-역주)을 제거
하신 이후에야 이루어질 것입니다(35절).
21절에 나오는 "만지다"라는 단어와 25절의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라는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죽어가고 있던 여인은 그분을 만졌지만 죽은 소녀의
경우에는 그리스도께서 그 소녀를 잡아 일으켜 주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에
있어서의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인 요소를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이 두 기적
은 모두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남자의 경우에는 자신
의 죽은 딸을 대신한 아버지에 의해 믿음이 행사되었습니다. "그러면 살겠
나이다"(18절)라는 그의 말은 주님께 대한 자신의 온전한 신뢰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혈루병을 앓던 여인의 믿음은 개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을 것이다"(21절)라고 말했습
니다.
죄인은 죽은 자와 병든 자의 상태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상태에 놓여있는 죄인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넣으실 수 있습니다. 위대
한 의사이신 주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치유의 기적을 베풀어 죄인을 살리실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주께서는 가련하고 불쌍한 죄인들은 은혜롭게
다루셨지만 조롱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은 엄히 다루셨습니다(25절).
소경은 보고, 벙어리는 말하고, 비판자들은 주님을 훼방함(9 :27-34)
두 소경은 단지 육체적으로만 소경이었을 뿐 그들의 믿음의 눈은 매우 밝
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러한 표현은 본 복음서에서 처음
사용된 표현임)으로 인식했으며, 그분이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이
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에 따라 그들의 눈먼 상태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스도는 기적의 근원이셨으며그들의 믿음은 그 근
원을 여는 수단이었습니다.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마귀는 그 선물을 왜곡
시키거나 파과하기를 기뻐합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귀신을 내어쫓
으시고 언어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언적인 의미에서 이 사건은 이스라
엘이 자기의 찌른바 메시야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가
운데 그들에게 다시 임하여 그들에게 베푸실 메시야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슥 12 :10 ; 습 3 :9).
자기들의 믿음에 대한 주님의 반응으로 시력을 되찾은 두 소경과는 대조
적으로 영적으로 온전한 시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던 종교 지도자들은
진실로 눈 먼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야로
서의 증거를 거절했으며, 그분의 기적을 사단에 의한 것이라고 비난했기 때
문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을 크게 모독하는 행위였으며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에게 있어서 이 보다 더 큰 모욕은 있을 수 없었
습니다.
전하시고,가르치시며,치료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왕(9 :35-38)
종교 지도자들의 독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가운데
능력과 동정어린 마음으로 계속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우리는 35
절 말씀으로부터 주님께서 모든 성을 다니시며 모든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관심을 끌기에 너무 작은 마을이나, 주님
께서 고치시기에 너무 중한 질병은 전혀 없었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스리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천국 복음"은 육체적이 치유를 포함했으며, 특히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었습니다(4 :23 ; 10 :7, 8 ; 24 :14).
우리는 사람들이 "목자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는 말씀을 대하
게 됩니다. 그들은 "괴롭힘을 당하며 버려진 상태"(다비역)에 있었으며, "지
치고 낙심한 상태"(새 미국 표준역)에 있었으며, "혼돈되고 비참한 상태"(필
립스역)에 놓여 있었습니다. 목자없는 양들의 이러한 상태는 이스라엘의 참
목자이신 주님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주님에게는 직업적인 냉냉
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목자없는 양들과 추수할 곡식에 비유되
어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먹이기 위해 필요하며, 추수할 일꾼은 추수하
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람들은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주인에게 간청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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