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양육 - 2]
자녀들과
그 가정 - 존 그랜트
자녀들을 위해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어떤 가정을 만들어주어야 할까요? 성경이 말하는 가정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가정은 육아실입니다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살전 2:7).
데살로니가의 어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태도를 묘사하면서 바울은 자신이 그들 중에서 유모처럼 부드러웠다고 말합니다. 그는 육아를 맡아 자기 아이를 보살피는 어머니와 같이 그렇게 그들을 대했습니다. 이것은 어머니가 유모를 한명 고용해서 자기 아이를 돌보게 하는 상황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머니가 손수 아이를 보살피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어린 자녀들을 돌보는 것에 대하여 훌륭한 조언을 듣습니다. 어머니는 자기 아이들을 온화하고 차분하고 관대하게 대해야 합니다. 이것은 아이들을 징계하지 않아서 그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성가신 존재로 만든다는 의미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진정한 의미는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괴로움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어머니들은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어머니의 인내심을 한계까지 몰고 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 아이들을 사랑하고 보살펴주는 어머니는 아량을 가지고 그들을 대해줄 것이며 이를 지켜보면서 아이들은 종종 놀라워합니다.
가정 안에서 어머니는 자녀들을 소중히 기릅니다. 그녀는 아이들의 열정이 식지 않도록 해주고 불경건한 영향력들이 내보내는 차가운 바람이 아이들에게 미치지 못하도록 막아줍니다. 이와 같은 어린 시절에 그녀는 분명 아이들이 최대한 보호를 받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새겨지는 감명들은 주 예수님께 대한 경건과 헌신에 관한 것이기를 열망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구절을 뒤따르는 구절에서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내어주겠노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어린 이 신자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자신의 행복은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 가득한 어머니는 아이들을 지켜주며 자녀의 행복에 견준다면 자신의 행복은 두 번째로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만일 아이가 하루 중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타인의 돌봄에 맡겨진다면 어머니가 담당하는 이 중요한 역할은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없습니다. 현대적인 풍조는 어머니가 아기를 출산한 후에 곧 바로 일터로 복귀하고서 그 아이는 근무 시간 동안에 조부모나 보모에게 맡겨서 돌보게 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머니가 내어주는 시간과 사랑과 관심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힘든 상황이 있을 수 있고, 그런 형편에서는 주님께서 그 아이를 돌아보실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의 경제적인 능력을 뛰어넘는 생활수준에 올라서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령한 부부는 자신들의 생활수준을 남편의 소득의 한계 안에서 유지하기로 주님 앞에서 결정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그 아이를 훌륭하게 돌볼 것입니다.
부모 둘 다 종일 직장에서 일함으로써 야기되는 혼란이 있지만 이를 크게 만회하는 어머니의 수입 덕택에 아이들은 물질적인 유익을 누리게 된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머니가 자녀 양육에 있어서 담당하는 역할의 커다란 중요성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또한 어머니의 으뜸가는 역할은 날마다 자녀들을 보살피는 책임을 다하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음을 드러냅니다.
가정은 학교입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에수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디모데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디모데의 생애의 초기부터 그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디모데가 어린아이였을 때 그가 이렇게 가르침 받은 내용은 구약성경 이었고, 이 가정에서 성경말씀이 두드러진 자리를 차지한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디모데는 그 책으로 이끌림 받았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 거룩한 말씀을 베껴 쓰는 방식으로 읽고 쓰도록 가르침 받았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그가 성경을 환히 알게 된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성경말씀은 유년 시절부터 그의 마음에 깊은 감명을 주었고 그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디모데와 성경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이라는 이 지극히 중요한 문제를 학교에 맡겨두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참석하는 주일학교에 맡겨두어서도 안 됩니다. 배움의 과정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되며 그 목표는 아이들을 성경의 기본적인 교훈을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들은 성경의 페이지들 속에서 발견되는 이야기들과 교훈들을 가르침 받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부모에게 있습니다. 그들이 겉으로 보기에 그 일을 할 만한 자격을 얼마나 잘 갖추었는가와 상관없이 그러합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목적은 아이의 지식을 늘려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혹은 다른 어린이들보다 일찍부터 우세한 입장에 서도록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부모가 마음에 두는 것은 성경은 그것을 아는 이들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성경을 통해서 아이들은 모든 것 중에서 으뜸으로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죄인이며 자신의 구원은 주 예수님 한 분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어린 아이의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 지를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가 학교에 압학하여 교사들의 영향력을 받을 날이 올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제아무리 교육 전문가이며 선한 뜻을 가지고 수고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부모가 가진 신앙과 반대되는 내용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때부터 마치 입증된 사실인양 배우는 진화론이 그러한 내용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여 어떤 부모들은 그러한 내용을 가르치는 수업을 듣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결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고 아이의 학교생활에 더 큰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만나 부모가 해야 하는 일은 가정에서 충분하고 주의 깊게 성경을 가르쳐서 아이들로 하여금 다른 데서 듣는 거짓된 가르침에 맞서게 하는 것입니다. 학교를 상대함에 있어서 당신이 기억해 두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신자들인 해당 교사들은 그들이 가르치는 바를 그들 스스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오류라고 알고 있는 내용까지 굳이 가르쳐주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권유하면서 당신의 신앙을 그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 자녀들이 대중매체의 어린이 프로그램들에 계속적으로 노출되지 않게 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또한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성경이 첫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모든 서적과 문학 등에도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합니다. 이는 모세의 부모가 아들을 갈 상자 안에 보호해 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아들이 바로의 궁으로 옮겨지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젖먹이면서 가르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세의 부모는 아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생애의 기초를 마련해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도 자녀들 생애의 기초를 놓아 줄 목적을 가지고서 자녀들을 보호하고 가르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 부모의 책임입니다.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는 생애를 살아 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만일 주님의 뜻이면 장래에 어른이 되어 살아갈 때 그들이 성숙해지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되기를 부모들은 기대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주님을 섬기기 위해 준비하는 그 과정은 어릴 때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부모가 알고 있다면, 그 자녀들은 실로 복된 아이들입니다. 그것이 자녀들의 구원을 보장해주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어깨에 지워진 그 책임을 이행하는 일이 됩니다.
가정은 성소입니다.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삼상 1:27-28).
자녀들이 반드시 성소의 분위기 속에서 양육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이들을 기름에 있어서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가정은 주 예수님이 영광을 얻으시고 부모들이 그분의 임재를 지속적으로 갈망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인생의 초기부터 기도가 삶의 정상적인 한 부분임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예컨대, 음식을 놓고 드리는 감사는 식사 전에 필수적임을 그들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일들의 수행은 주일에만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것은 날마다의 삶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자녀들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들이 반드시 성경의 교훈을 배워야 함을 우리는 이미 확인했으나 이러한 교훈들을 반드시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사실도 그들은 알아야 합니다.
한나에게 주어진 아들은 기도로 주님께 구한 아이였습니다. 그 아들을 낳는 기쁨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을 향한 책임을 잊게 하지 않았고 자신의 아들을 향한 책임도 잊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최대한 어렸을 때 그를 실로로 데려가 회막을 돌보는 이들에 의해 길러지게 해야 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오늘날은 이것을 위하여 자녀들을 멀리 떠나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가정이 자녀들을 양육하는 성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나의 동기는 뚜렷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시대의 영적인 하락을 주목했고 주님의 백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그녀의 간절한 바람은 자기 아들이 그러한 중대한 임무를 감당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러한 충성스런 헌신은 보답을 얻었고 그 아이가 자라서 이스라엘의 놀라운 인도자들 중 하나가 되었음을 지금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한나 편에서 그것은 희생을 요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속에 선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희생이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무엘의 육체적인 복지가 무시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해마다 그녀는 옷을 지어서 아들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모든 필요가 다 채워지도록 확실하게 돌보았습니다.
오늘날 주님께 헌신되어 자기 아이들을 그분께 바치려는 부모들의 필요성이 여전히 절실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자녀들이 성인이 될 미래를 내다보면서 하나님의 임재가 실재하는 가정에서 그들을 양육하는 부모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녀들이 훗날 주님께 유용한 섬김을 행하는 생애를 살도록 훌륭한 기초를 놓아주고 있는 것입니다.그것이 자녀들이 주님을 알고 그분을 섬기게 되리라고 보장해주지는 못하나, 그들은 부모로서의 책임을 이행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자신의 가정과 다른 아이들의 가정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 차이점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가정을 결코 언제나 '안 돼'라고 말하는, 하나도 즐겁지 않은 곳이 되게 하면 안됩니다. '안 돼'라고 할 때마다 받아줄 수 있는 '그렇게 해'도 있다고 반드시 말해 주십시오. 그러면 행복한 가정이었다는 기억이 자녀들 마음속에 계속 남게 될 것입니다. 즐거웠던 부모에 관한 기억, 주님을 향한 헌신의 중심지였던 가정에 관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 자녀들을 의탁하는 기도를 드리던 부모의 기억을 남겨주십시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어릴 때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력적인 삶임을 알게 해주십시오.
험담의 폐해가 이러한 분위기 속으로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자녀들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서 부모들이 유익하지 못한 대화를 한참동안 나누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아이들이 듣는 데서 다른 이들에 대해 비난하는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아이들은 그 대화 내용을 비상한 기억력으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나중에 가서 당신은 그들이 그 대화를 절대로 듣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이 듣기에 적합하지 않은 문제들 역시 반드시 아이들이 듣지 않을 때에만 이야기하십시오. 아주 어리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그릇된 인상이 남는 주제들을 그들이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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