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소식]
핏줄
'야곱이 그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서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와삼촌 라반의 양들에게 물을 먹이고 그가 라헬에게 입 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비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됨을 고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비에게 고하매" (창 29:10-12).
하나님과 내가 핏줄이었다. 또한 핏줄이 될 수 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번에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핏줄에 관한 부분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말할 때 "피는 물보다 진하다" 라는 말을 많이 한다.
위에 기록된 말씀은 수 천 년 전에 아비 집을 떠나 자기의 핏줄을 만나 기뻐하는 야곱의 이야기이다. 멀리 밧단 아람까지 먼 길을 여행하고 드디어 자기의 혈육을 만나서 기뻐 우는 야곱의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지 아니한가. 이번에는 이 핏줄을 살피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핏줄을 이어가는 역사를 족보라고 하는데, 세상의 민족들은 대부분 족보를 심하게 따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족보를 상당히 중요시 여기고 우리 민족 역시 족보를 중요하게 여기는 민족이다. 이러한 현상은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 물론 유대인과 우리 민족은 족보외에도 너무나 많은 부분이 닮은 민족이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아무튼 족보를 이야기하자면 결국 핏줄을 더듬는 역사를 말한다. 평상시에는 다투면서 사이가 나빴던 형제간도 다른 이웃과 문제가 생기면 당장에 편들고 나서는 것이 핏줄이다. 핏줄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는 서로 형제임을 말한다. 즉 하나님과 내가 핏줄의 관계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냥 간과할 수 없는 놀라운사실이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나는 아들이니 핏줄이 아닌가.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서로 핏줄 같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무슨 뜻인가. 또한 하나님과 나도 핏줄 같지 아니한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핏줄로 말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인가.
사람들은 생각 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얼마나 가슴을 흔드는 이야기인가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여기에는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핵심이 있는 것이다. 세상 인간들에게 아버지가 있다. 그것은 자신이 그 아버지의 핏줄이라는 뜻이다.
오래전에 어떤 성도가 들려준 이야기는 눈시울을 적시는 사연이었다. 일본에서 성공한 어떤 사업가가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하러 와서 자기 핏줄을 찾아보겠다고 고향을 찾았다가 자기를 만났다는 것이다. 자신이 어렸을 때에 일본에 갔는데 일본에서 성공하고 보니 고향을 생각하며 혹시 자기의 핏줄이 있나 하여 찾아보다가 형제를 만나서 얼마나 반가워하고 기뻐하는지 몰랐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눈시울을 적시면서 핏줄이라고 선물까지 주고 가면서 후에 그를 불러다가 사업의 중요한 자리에 기용했다고 한다. 핏줄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필자가 캐나다에 갔을 때 장현식이라고 하는 형제를 만났다. 그는 태권도 사범이었으며 인디언 추장의 아들을 가르친 계기로 추장의 초청을 받아 인디언 마을에 갔었단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상여매는 소리를 들려주었더니 얼마나 감동스러워 하는지 몰랐단다. 그들의 상여 매는 소리와 우리의 소리가 같은 것을 확인하고 우리는 형제라고 껴안고 놓을 줄을 모르고 기뻐하였다고 한다. 핏줄이라고 하는 것은 놀라운 힘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아버지라고 표현하여 주시는 것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놀라운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아버지라고 하는 핏줄을 생각하면서 그 의미를 통하여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아버지라고 하는 호칭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이다. 세상의 어느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정상적인 아버지라고 한다면 당연히 자식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어느 때에 청년에게 전도하고 있었다. 청년이 분노 섞인 소리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나의 말에 그는 "왜 나를 사랑합니까? 사랑하지 말라고 하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그에게 "불쌍하니까" 하고 답변하였다. 그는 주춤하였다. 또 어느 때는 똑같은 상황에 "아버지니까" 라고 답변한 적도 있다. 이 두 가지 답변은 다른 것 같지만 다르지 않다. 아버지니까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식을 불쌍히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상시에 아버지가 자식을 미워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는 자식은 불쌍히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신다. 왜냐하면 핏줄이기 때문이다. 오 사랑하는 형제여! 하나님이 그대를 핏줄이라고 부르시는데 하나님 아버지께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겠는가!
집을 나간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부모가 세상에 있지 아니한가. 하나님도 집을 나간 그대를 지금 기다리고 계신다. 왜 기다리냐고 묻지 마라. 핏줄이니까 기다린다. 핏줄은 눈물겨운 것이다. 핏줄은 사랑의 원천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을 지으실 때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을 그대가 알아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세상에 나왔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독특한 사랑을 받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과 인간의 부자관계가 사단의 계략으로 와해되어버렸다. 이것을 선악과 사건이라고 한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하였거니와 죽는다는 뜻의 성경적 개념은 분리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죄인이라고 한다. 인간이 죄인이며 죄인 그 상태로 죽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이와 같은 뜻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은 마치 절벽에 매달려 올라가는 등산가의 줄이 끊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집을 나간 자식을 찾아 헤매는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 수 있으리라.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복원하여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사건을 우리는 "거듭남"이라고 부르며 "구원" 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에게 돌아와 죄용서 받고 교제하는데 있어서 구약에서는 동물의 피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 17:11).
이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구약에서는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동물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구약의 순례자들은 성전에 나갈 때마다 양이나 소나 비둘기들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예배를 드린 것이다. 만약에 피를 가지지 않고 성전에 나아가면 당장에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
피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피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연결시켜주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두려운 날에 아론의 아들 제사장들의 제사로 인하여 재앙을 피하게 하셨다.
"만일 한 사람이 그릇 범죄하거든 일년 된 암염소로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릇 범죄한 사람이 그릇하여 여호와 앞에 얻은 죄를 위하여 속죄하여 그 죄를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사함을 얻으리라" (민 15:27-28).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이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피의 제사였다. 얼마나 놀라운가. 여기에 피의 역할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그러면 이것도 핏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하다. 다만 이것은 온전한 것의 상징이요 예표요 그림자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배신하고 타락의 길로 가버린 인간들을 한시도 잊지 못하시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준비하셨다. 저들이 돌아오기를 희망할 때 돌아오기를 위하여 길을 준비하시고 방법을 준비하신 것이다. 이 제사법이 그것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길을 만드신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자적인 것은 신약에서 완성되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히 10:1).
이 말씀대로 구약의 속죄 제사들은 장차오는 좋은 일을 위한 그림자였다. 레위기의 약속대로 하나님은 인간들이 피를 통해서 드리는 제사를 받으시고 저들의 죄를 용서하셨다. 그러나 그 제사는 문제점이 드러났다.
자주 자주 죄를 짓는 인생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인간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기에 온전한 속죄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위의 말씀 후반에 나오는 것처럼 해마다 늘 드리는 제사가 우리를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가 없어서 인간 구원의 완전한 방법이 되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것을 온전히 해결하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피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주신 것이다.
"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히 10:5).
한 몸, 이것이 누구를 나타내는가?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피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께서 이제는 피를 흘려 온 인류의 죄를 단번에 속죄하심으로 자주자주 드리는 불완전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2).
이제 이 놀라운 속죄의 십자가로 인하여 인간이 영원히 죄용서 받는 길이 열렸다. 영원한 속죄라 함은 과거로도 영원이요 미래로도 영원하니 우리의 죄가 그렇게 용서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하나님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진정한 핏줄이 된 것이다. 주님의 피로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요 나는 그분의 친아들이 된 것이다. 성경은 이 진리를 깨달은 날을 구원 받은 날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가는도다" (골 1:8).
십자가의 피로 죄용서 받아 죄인이 아닌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핏덩어리로 태어났으니 그 날로부터 자라가는 것이다. 이것이 앞의 말씀의 뜻이다. 오 그대가 하나님의 핏줄이 되었다는 것이 놀랍지 아니한가.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속죄가 확정되지 못하였으므로 정식 핏줄이 아닌 것이다. 핏줄이 얼마나 놀라운 관계인가.
구약의 다윗이 압살롬의 배반으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자기를 죽이려하는 아들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당부하였으나 요압이 죽이고 말았다. 요압의 생각에 이런 패륜아는 죽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그는 전쟁의 승리도 소용없이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삼하 18:33) 하고 울었다. 요압의 생각에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이 장면은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마음이었다. 다윗은 자기의 핏줄 압살롬이 비록 자기를 대적한 패륜아였지만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의 혈육 핏줄이 된 우리도 동일한 사랑을 받고 살고 있다. 전날에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했던 패륜아였지만 십자가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핏줄이 된 것이다. 또한 구원 받은 이후에도 우리가 때때로 아버지 앞에 수많은 불효를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오 이 글을 읽는 독자여, 하나님과 핏줄이 되었는가. 십자가로 인하여 완전한 죄용서 받았는가. 그 피가 그대를 하나님과 연결시켰는가. 이제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그대가 하나님의 핏줄이면 영원히 하나님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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