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장 예배와 기념]

                               주님만찬에서의

                     소망

                                                                      - 다니엘 스미스


                "...오실 때까지" (고전 11:26).


   주님의 만찬에는 미래의 소망이 있다.

   주님은  베다니 맞은 편 감람산에서 승천하셨다. 부활 후에 땅에서 보낸 40일간 주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확신을 심어주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쁨과 찬송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눅 24:50-53). 제자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확신했다. 주님의 만찬은 이 주님의 재림을 계속해서 기억나게 하고, 그 맹세이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 11:26).  


   만찬은 우리를 위로한다.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8).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이 주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쓴 구절이다. 바울이 쓴 것은 명백하게 말한 대로 주님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것은 주님 자신의 직접적인 계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안에서 죽은 자들에 대해 슬픔에 잠길 필요가 없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은 먼저 죽은 자들이나, 그 날에 땅에 남아있던 자들에게나 동일하게 최후의 구속의 날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지만 "밤이 깊었다"는 것을 안다. 즉 사람의 패역의 어두운 밤도 깊은 것이다. 그리고 또 아는 것은 "낮이 가까웠다"는 것이다. 즉 주님의 영광스런 재림의 날이 가깝다. 주님은 오셔서 우리를 이 음산한 집에서, 우상이 가득한 애굽에서, 이 세상적인 바벨론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이 사실은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위로가 된다.


   만찬은 깨어있게 한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멈추어서거나 주저앉을 위험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재림에 대해 단지 감정적인 수준에서 고대해서는 안 된다. 그 날은 엄숙한 판단의 날이다. 그 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비록 갈보리 십자가에서 이미 심판받을 우리의 죄에 대해서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나 그러나 우리의 섬김에 대해 평가받고 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 중에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혹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는 사람이 있어서도 안 된다. 주님은 주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조금이라도 지체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은 "깨어 있으라, 예비하고 있으라" 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매 주 주의 만찬으로 모이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게 해준다. 활짝 열린 밝은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러 나와야 할 것이다. 부끄럼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옛날 로마 사람들은 쓸데없는 제안을 받으면 "나는 로마 사람이다!" 라는 말로 거절했다고 한다. 모든 죄의 유혹이 우리를 엄습할 때 우리도 우리가 주님의 것임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마치 요셉처럼,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 39:9). 주의 만찬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을 돕고 우리 영혼을 부지런히 돌아보게 한다.


   만찬은 경건을 불러일으킨다.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3:3).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벧후 3:11-12).

   매주 돌아오는 주의 날에 우리는 조금씩 천국으로 가까이 간다.우리 눈과 마음과 소망이 하늘에 속한 것에서 쉼을 누린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 3:20).

   오, 주님께서 속사람이 거룩케 되는 우리의 소망을 부흥케 하신다면!  우리의 형제 사랑을 소성케 하신다면! 주님이 곧 오시리라는 소망 중에 주님께 대한 헌신을 되살린다면! 확신하건대 주의 만찬에 바르게 참여한다면 이는 경배와 존경과 찬양과 감사의 영적인 연습이 될 것이고, 우리로 경건의 길을 걷게 할 것이다. 거룩에 거하면 우리는 땅에 속한 모든 것이 점점 싫어질 것이고, 하늘에 속한 영적인 것이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


   만찬은 소망을 품게 한다.

   우리는 만찬에서 주님의 영광을 본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 17:4).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사무엘 러더포드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단지 하늘의 왕 되신 주님의 얼굴을  뵈옵는것뿐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보기 위해 일곱 번 죽어 일곱 번 지옥에 가는 고통을 겪을지라도, 결코 손해가 아니다." 주님의 영광을 가리운 휘장은 이제 걷혀졌다. 우리는 주님을 계신 그대로 볼 것이다. 그날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게 되면, 지금의 몸으로는 볼 수 없었던 주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볼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그 영광을 입을 것이다.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살후 2:14). 혼인예식에서 신랑처럼 주님은 모든 영광을 입으실 것이다. 그런데 그의 신부가 주님과 연합할 때에 넝마를 입고 나타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리 없다! 신부 또한 영광으로 빛날 것이다. 교회는 전 우주의 놀라움이 될 것이다!

   주님은 하늘에 우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다. 거기서 우리는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그리고 우리의 참 친척인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거할 것이다. 그곳은 영원한 행복의 천국이요, 더 이상 대적이 없는, 더 이상 친구와의 이별이 없는 곳이다. 그곳에는 영광스런 주님이 보좌에 계셔 당신의 사람들을 생명수 샘으로 이끌 것이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씻기실 것이다. *


   "오실 때까지"

   오 이 말씀에 마음이 울리도다.

   "잠시" 라는 말이

   황금빛 가운데 엿보이도다.

   "오실 때까지" 라는 말씀너머

   하늘 본향이 보이지 않는가?


   우리가 사랑한 자가

   하늘 안식에 들어가고

   그의 사랑과 격려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어도

   모든 입술은 조용할지어다.

   이는 오직 "오실 때까지"만 있을 일이니.


   구름과 암흑이 우리를 에워싸

   우리가 가진 것은 슬픔뿐인가?

   십자가의 쏘는 고통

   모든 것이 손해라고 세상은 말하네.

   죽음과 암흑과 모든 무덤

   고통은 오직 "오실 때까지" 만 있으리.


   하나님의 사랑의 잔치.

   찢어진 떡과 부어진 포도주.

   감미로운 기억들.

   주님이 우리를 하늘의 상으로 부르셨네.

   어떤 것은 땅에 속하고 어떤 것은

   영광스러운

   이 같은 일은 오직 "오실 때까지" 만

   있으리.

   - Edward H. Bickerste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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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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