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소식]
오! 길 잃은 한 마리 양 그대여!
- 허윤욱
"야곱이 가로되 해가 아직 높은즉 짐승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뜯기라"(창 29:7).
그대는 양이다. 길 잃은 양이다. 힘없는 양이다. 목자 잃은 양이다. 희망 없는 불쌍한 양이다. 지옥문 앞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불쌍한 양이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 앞과 세상과 사단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불행의 씨앗이다. 인간은 강한 것 같으나 결코 강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지혜로운 것 같으나 결코 지혜로운 동물이 아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속고 자신에게 속고 마귀에게 속고 사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는가. 결국은 속아서 멸망의 지옥에 떨어지고 마는 미련하고 힘없는 인생들이다. 사람이 스스로 풀 수 없는 수없이 많은 문제들을 안고 안타깝게 살아가는 힘없는 양인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다. 이번에는 이 문제를 생각하여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겸손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서두에 기록한 말씀은 야곱이 삼촌 라반의 양떼와 목자들을 만나서 목자들에게 한 말이다. 야곱은 목자였다. 그러므로 양들의 일에 대하여 조언한 것이다. 양들에 대하여 잘 아는 야곱이 조언한 말을 생각해 보면서 양들에 대하여 생각하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 깨달아야 할 것이다.
먼저 양들의 특성을 몇 가지 살펴보자. 양은 모든 동물 중에 가장 연약한 동물에 속한다. 양은 공격용 뿔도 발톱도 이빨도 없고, 방어용 무기도 없고, 탈출용 준족도 없는 동물이다. 거기에다가 양은 눈도 좋지 못하여 멀리 보지 못한다고 한다. 가까이 있는 것만 겨우 보는 것이니 멀리서 공격해 오는 맹수들을 볼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다. 양은 성격이 순하여 싸운다거나 공격한다는 생각도 못하는 순한 동물이다.
이와 같은 특징을 살펴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는가. 양은 목자가 없으면 그냥 죽은 목숨이다. 심지어는 작고 별로 강하지도 못한 동물들에게도 잡혀 먹힐 수 밖에 없는 연약한 동물이다. 그래서 양 곁에는 반드시 목자가 있어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신 뜻은 여기에 있다. 우리 주님은 온 인류의 목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목자는 양들을 지키기 위하여 때로는 위험을 무릅쓴다. 죽음을 무릅쓴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삯군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싸우지 않고 자기의 안전을 위하여 도망하기도 하는 것이다.
성경은 양들을 공격하는 짐승들에 관하여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짐승들을 살펴 보는 것은 흥미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이 동물들은 오늘날 양된 인생들의 고뇌를 생각나게 하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성경에 다윗이 양들을 공격하는 짐승들을 언급하고 있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게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하면 내가 그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삼상 17:34-35).
먼저 곰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곰은 우직한 동물이다. 힘이 세고 우직하여 무서운 폭력자를 연상하게 하는 동물이다. 그는 폭력적으로 양을 거침없이 짓밟아 죽이고 망가뜨려 잡아먹는 무지막지한 동물이다.오늘날 영적인 양들인 수많은 사람들이 폭력에 시달리며 고생한다. 강한 자의 폭력에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고뇌한다. 그들은 힘으로 사람들을 괴롭힌다 아주 쉽게 말하여 돈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얼마나 종처럼 무시하고 괴롭히며 고통을 주는가. 세상은 돈에 의하여 서열이 매겨지는 슬픈 세상이다. 무시하고 짓밟다가도 그가 돈 있는 사람인 것이 밝혀지면 그 앞에서 아부하고 유순해진다. 함부로 말하고 달려들다가도 돈으로 유혹하면 갑자기 유순하게 협상한다. 사람을 다루는데 돈 만큼 효과 있는 것이 또 무엇인가. 가난한 이유로 폭력에 시달리며 가슴에 한을 품고 죽어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권력도 그러하다. 권력 앞에서 사람들은 어찌할 줄을 모른다. 어떤 형제가 군대를 갔는데 괜찮은 곳에 근무하였다. 주변의 사람들이 끈질기게 묻기를 무슨 권력이 있는가. 집안에 장성이라도 있는가 하고 묻더라는 것이다. 필자도 군대에 갔을 때 설문지에서 집안에 장성이나 고급 장교가 잇는가를 캐물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군대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곳에 권력의 힘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상처받아 비참하고 억울한 삶을 살다 가는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보아오고 있다. 세상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 의지할 곳 없는 슬픈 나라이다. 사람 취급을 못 받아 억울하고 원통해도 그냥 참고 사는 수밖에 없다.
세상에 유행하는 말이 유전무죄 무전유죄 하는 말이 있다. 아무리 옳고 법을 지켜도 경우에 따라서 원통하고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꼼짝 못하고 한 많은 삶을 살다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찌 말로 다 하랴. 얼마 전에 특별한 잘못도 없이 재벌2세에게 끌려가 매를 맞고 손톱만한 매 값을 받고 나온 사람의 이야기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슬프게 하였다. 그러하고도 별일 없이 사회생활 하는 그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힘없는 일반인이 그런 폭력을 휘둘러도 같은 대접을 받을까.
이와 같은 큰 이야기에서부터 집안 이야기까지 가난하고 힘이 없어 무시당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는 형제 간 사이에서도 강약에 의하여 서로 싸움이 나서 말하지 않고 지내는 형제간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중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는 재미있는 예화다. 한 법대생이 여러번 사법고시를 보았으나 떨어졌다고 하였다. 그날도 시험에 또 떨어지고 속상해서 술 한 잔 먹고 통금을 어겨 집으로 가고 있었다. 파출소로 붙들려 갔는데 술김에 보니 만약 고시패스만 하였으면 너희들은 별것 아닌데 하는 생각이 나서 엉겹결에 고시 패스한 영감을 몰라보느냐 하였다. 경찰들은 충격을 받아 정중하게 집으로 모시고 가 인사하고 돌아 갔다. 그런데 얼마 후 고시 패스자가 아닌 것이 드러나서 끌려가 맞고 혼나고 나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일년 후에 이제 제대로 고시 합격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파출소 직원이 다 같이 와서 사과하였다고 하였다.
어렸을 때 이 실화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세상은 힘 있는자의 세상이다. 국제 관계에서부터 사회, 경제, 문화, 예술, 체육계 할 것 없이 힘 있는 자의 세상이다. 이 사이에서 수많은 폭력의 희생을 당하는 불쌍한 양들을 어찌할 것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가 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것인가. 이들의 한을 풀어줄 것인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두 번째 동물로는 사자가 있다. 사자는 똑같은 폭력을 사용해도 때를 지어 다니는 특성이 있다. 이것은 인간 세상의 또 다른 폭력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조직적인 폭력이다. 단체의 폭력이다. 쉽게 아이들이 고생하는 학원 폭력이 그러하고, 직장에 들어가면 기득권과 거기에 따른 조직의 틀 속에서 눈물 나는 고생을 해야 한다. 지역사회의 힘을 말하는 텃세를 말할 수 있다. 시장이나 상점에서 장사를 하여도 텃세로 인한 폭력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심지어 거리에서 장사를 하여도 기득권들의 텃세는 무서울 정도다. 조직에 의한 폭력이 온 세상을 덮고 있다. 그래서 선하고 착하던 사람도 살아남기 위해서 양심을 버리고 조직의 틀 속에 들어가서 본의 아닌 타협을 하면서 폭력을 휘두르는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사회의 모습이다. 오늘날 지역감정을 이용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온 세상을 피곤하게 하고 있지 아니한가. 사람들의 생각은 정의를 부르짖거나 양심을 부르짖어 보아야 알아주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성공할 수도 없다는 결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정을 저지르고 폭력을 휘두르며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형제가 간증하는 데 군대 갔다가 와서 공무원을 하였단다. 요직이라서 사업가들과 늘 교류를 하여야 한다. 그는 힘들어서 위에 과장님과 사업가를 직접 연결시켜주고 일만 열심히 하였다. 어느날 결제서류를 가지고 들어갔는데 읽어보지도 않고 집어 던지더라는 것이었다. 너무 화가 나서 "당신 밖으로 나와라. 한판 붙자. 당신 태권도 했다면서, 나는 해병대 나왔다. 계급 떼고 한판 붙자. 나는 부정 안하니까 직접 챙기라 하였는데 왜 또 괴롭히나. 내 월급에서 상납하라는 거냐" 하였다. 그도 놀라고 주변에서 말려서 더 이상 싸움은 진전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는 한 달 이내로 한직으로 발령이 나서 수 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 주님을 잘 섬기고 있다. 지금은 교회를 개척하고 섬기면서 크게 쓰임 받는 장로가되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양들이 조직 폭력에 고생하고 있는가. 주먹 싸움 하는 사람들만 조직 폭력배가 아니다. 온통 세상은 조직 폭력 세상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조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억울하고 원통한 일들을 당하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지 아니하는가. 그래서 조직을 조직으로 맞서서 싸우는 것이 노조요 민주화운동, 학생운동 등이다. 세상은 온통 전쟁터임을 누가 부인한단 말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가 이들의 아픔을 제대로 치료하여 준단 말인가. 누가 저들의 아픈 상처에 약을 발라 준단 말인가. 구세주 예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세 번째 양들을 공격하는 동물은 늑대와 이리다. 늑대와 이리는 간교하기로 유명하다. 늑대와 이리는 간교한 방법으로 양을 잡아먹는 것이다. 이들의 간교함은 간교한 사람들에 의하여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세상은 순진하고 정직한 자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속고 속이는 싸움 속에 거짓이 온 세상을 꽉 채우고 있다. 세상은 거짓말 하지 않고는 살 수 없고 간교하게 속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슬프고 무서운 곳이다. 온갖 자선 단체를 돕고 실망당한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고아원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다. 고아들이 고아원 관계자들을 부모로 생각하는가 물으니, 그것은 희망사항이고 자기들을 이용하여 이익을 챙기는 장사꾼 정도로 알고 있다고 하였다. 물론 진실하게 자선하는 단체들이 많은 줄 아나 노출된 경우들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와 예수님 이름 팔아서 장사하는 교회나 단체가 얼마나 많은가. 주님은 오늘의 기독교를 직접 예언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오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라" (마 7:15). 최근 기독교 지도자를 뽑는데 수십억을 뿌린 사건이 메스컴을 탔다.
누군가가 한국에 거짓 선지자가 얼마나 되는가 물었다. 나는 그냥 참 하나님의 종을 보기가 힘들고 어렵다고만 대답하고 말았다.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행동을 하면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거룩한 척하는 거짓선지자가 이 나라의 기독교를 꽉 채우고 있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아주 쉬운 이야기로 성경은 헌금을 무기명으로 은밀하게 하라고 하였으나 어느 교회에서 헌금을 무기명으로 하는 곳 있는가 찾아보기 바란다. 이것이 기독교 핵심 진리는 아니어도 거짓을 알아보는 방법 중 하나는 되리라.
간교한 사단은 오늘의 기독교를 타락시켜 양들의 생명을 도둑질하여 영원한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다. 오,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양들이여, 얼마나 피곤한가. 온갖 폭력과 악행과 간교한 속임수에 속아 얼마나 고통에 시달리는가. 앞의 말씀처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가 하나님, 예수님 앞에 나와 쉼을 얻어야 한다. 어떻게 쉼을 얻는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용서 받고 구원 받으면 영생을 얻어 천국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어떤 형제가 간증하였다. 자기는 가족부터 시작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속이고 힘들게 하며 폭력으로 괴롭게 하여 자살을 몇 번이나 시도하려 하였단다. 나는 왜 이렇게 팔자가 기구한가 늘 원망하였단다. 그런데 구원을 받고 보니 자기가 그렇게 고통스럽고 불쌍하고 억울하지 않았으면 어찌 주님을 믿었을까, 어찌 겸손을 알았을까. 이제는 불쌍하며 가난한 삶을 오히려 감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럼으로 하여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참된 쉼이다.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지옥에 가는 것이기에 지옥을 면하고 나면 이와 같은 고통의 세월을 도리어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가. 사람은 세상에 살아가면서 자기의 죄와 타인의 죄 때문에 얼마나 고뇌하는가. 그러나 예수님께 나와서 모든 죄 용서받고 그 안에서 천국의 소망 중에 살아가는 것이다. 이 놀라운 진리를 몰라서 사람들은 자살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자신을 목자라고 하셨다. 고통하는 양들이여, 선한 목자 예수님께 나아와 푸른 초장에서 쉬기 바란다. 선한 목자에게 영생을 얻어 천국에 가며 세상에서 보호받고 위로받는 축복을 받기 바란다. 아멘.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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