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을 나누는 다섯 마디


   "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고전 14:21-25).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않겠느냐?" 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하는 강력한 꾸중입니다.

   이는 은사가 하나님이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봉사임을 놓친 것이 얼마나 커다란 문제인가를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방언은 불신자를 위한 표적" 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방언이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 해도,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인정하게 만드는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인가요? 아닙니다.

   이는 이사야 28장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언하며 꾸짖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지도자들도 다 타락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꾸중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았으므로, 앗수르의 침략을 당하리라."

   이스라엘을 정복한 앗수르는 앗수를 언어(방언)로 통치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 방언을 듣게 될 것입니다.

   방언이란 성경에서는 항상 외국어이며, 이를 듣는 것은 하나님의 형벌, 재앙을 의미합니다.

   앗수르가 말할 때 이스라엘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앗수르는 강압적으로 고통을 주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서 고통, 징계를 위해 방언이 사용되었듯이, 신약의 방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사는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통역이 없어 그 내용이 전달되지 않는다면, 형벌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애굽에서 내린 열 재앙과 같은 것입니다.

   은사가 하나님의 은혜, 사랑을 담고 전달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 형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용보다 뭔가 신령한 열정으로 감동하며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깨닫는 마음으로 하는 다섯 마디가 낫다."

   "하나님의 생명이 전달되지 않으면 미친 짓이다."

   은사는 그 내용이 중요합니다.

   나의 남다름을 드러내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게 은사입니다.

   평범한 것을 교회를 위해 사용하는 게 중요합니다.

   다른 지체를 위해 낮아지는 게 가장 중요한 섬김입니다.

   이같은 섬김이 모임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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