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전략]
하나님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부모와 자식으로
설명하라
- 허윤욱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 15:21).
변화된 탕자를 보시라. 얼마나 감동적인가. 그가 입을 삐죽이며 아버지의 통제를 벗어나 멋지게 살아보겠다고 나간 탕자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이 아닌가. 전도하는 사람이 이러한 변화를 볼 때 참으로 힘이 나는 것을 필자도 부인하지 못한다. 이번 호에는 탕자의 변화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학생회를 돌아보는 교사들이나 가정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가 모두 동일하게 아이들이 변화가 분명치 않다는 이야기를 한다. 또한 그러한 현실이 많다. 이와 같은 문제는 왜 왔을까? 해결책은 무엇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과연 문제가 있는 것인가? 이러한 주제를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중요하며 즐거운 일이며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피고 있는 대상은 원칙적으로 성도의 자녀들을 중심하여 살피는 것이다. 부모가 다 성도이거나 한쪽만 성도이거나 하는 경우들이다. 많은 분들이 변화가 없다고 우려하며 심지어는 전도자가 전도를 잘못하여 변화가 없다는 쪽으로 몰아가는 듯한 이야기도 필자는 듣고 있다. 물론 설득력 있는 논리일 수도 있다. 그래서 더욱 폭넓게 이 문제를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변화에 관하여 지나간 경우들을 먼저 살피고 싶다. 현재 성도의 자녀로 성장한 1세대쯤이 35세에서 많게는 40세까지가 되고 있다. 필자는 성도의 자녀들로 자란 이들을 오랫동안 지켜본바 변화가 없다는 질책을 받으면서 자란 세대들이 실제는 대부분 자라가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성도로 성장해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 지금 주일학교나 학생회를 돌아보는 교사로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들이 전에 변화가 없다는 질책을 받으면서 울던 사람들이다. 세상으로 가거나 구원받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 경우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잘 섬기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학생 시기를 통과하는 동안 변화가 없다는 질책으로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가. 현재 저들은 변화된 성도로서 잘 살고 있다. 그렇다면 저들이 변화가 없다고 하는 시기를 지나 어느 날 변화된 경험을 한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질책의 시간들을 견디면서 성도로 나타나게 된 경우이다. 그렇다면 저들에게 변화가 없다고 다그친 것의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그 부분을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래서 이번에는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의 정도와 과정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는 변화가 없다고 다그치는 것이 부정적인가. 긍정적인가를 생각해보자. 대답은 양면이 다 있다고 보여진다. 긍정적인 것은 이와 같은 질책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고생은 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갈등과 고뇌의 시간들이 자신의 문제를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구원 문제에 매달리게 하여 결국은 좋은 결과를 나타내는 방향으로 인도하여진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를 촉구하는 질책이긍정적인 면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현장에서 들어보면 아이들이 긴장하고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데 큰 역할을 한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어떤 학생은 스트레스를 받아 구원을 위하여 금식하고 기도하여 확신을 얻는 경우도 보고 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부분만 생각하고 구원의 확신과 변화를 살핌에 너무 느슨하게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이들을 다룸에 있어서 지나치게 변화를 요구함으로 인하여 아이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먼저 생각할 것은 아이들에게 너무나 큰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탕자가 아버지앞에 회개하고 돌이킨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를 버리고 나갔던 사람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멀리 떠난 사람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경우는 두 가지 면에서 탕자와 같은 수준의 변화를 요구할 수 없는 것이다.
첫째, 저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고 예배당에 출석하고 있으며 친구들과 종교 논쟁을 심하게 하면서 기독교를 변호하는 수준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지금 부모는 이들에게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이 수준에서 보면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회개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저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태어날 때부터 회개한 셈이다. 저들이 탕자처럼 하나님께 방향을 돌리는 회개를 하여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저들은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사랑하고 있으며 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불신하다가 돌이키는 것이 회개라고 한다면 그런 회개는 이미 이들에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두 번째, 저들은 부모님의 보호 아래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죄악에 빠져 타락하여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 성인은 돈을 벌기 위해서 생활 전선에 나가 죄를 지으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고 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생활 전선에 나가 싸우지 않아도 된다. 또 성인은 출세를 위해서 온갖 죄를 지어야 하지만 아이들은 그와 같은 일이 별로 없다. 대인관계를 위해서 술을 먹거나 담배를 피워야 할 이유도 없다. 다시 말하여 마음속의 내면적인 죄는 있지만 이들은 성인들이 짓는 죄를 지어야 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하는 세대인 것이다. 저들의 외형적인 죄는 성인들에 비하여 훨씬 적은 것이다. 성경은 죄악이 많은 곳에 은혜가 더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죄악을 크게 짓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기에 이들이 죄를 깨닫는 데도 한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성인들은 죄악 된 삶을 살다가 죄악의 모습이나 습관들을 거부하고 돌아오기 때문에 변화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성인들의 변화된 모습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그러면 혹자는 그런 변화를 요구한 적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본 많은 경우는 자신들의 변화를 생각하면서 저들은 왜 그러한 현상이 없는가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필자가 이 주제의 초창기에 썼던 것처럼 아이들은 성장기에 있기 때문에 믿음도 서서히 성장해 나가는 경우를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저들을 인도함에 있어서 저들을 살필 것 중의 하나는 저들이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믿음을 품고 있는지 여부이다. 그리고 저들의 믿음이 자라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저들에게 변화되지 않았다고 다그치기 전에 저들이 변화되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다음 번에 자세히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러면 변화가 없다고 다그치는 태도의 문제점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는 아이들 앞에서 구원받지 않았다. 변화가 없다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이유는 첫째로 정밀하게 말해서 아이들의 언행이나 생활의 상태는 부모나 교사가 살필 수 있겠지만 저들의 마음까지 살피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부모나 교사가 아이들에게 변화가 있는지 살피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저들 앞에서 함부로 변화가 없다느니 구원을 받지 못했다느니 하는 말은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만나본 아이들의 거의 대부분은 "나는 분명히 믿는데 주위에서는 안 믿는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부모가 야속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양심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자신은 분명히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니라고 하니 속이 상하고 답답하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구원은 그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이지 제 삼자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자신이 알고 있는 만큼 우리는 저들을 심판하는 위치에 있지 말고 도와주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만약 실제는 아이들이 구원을 받았는데 부모나 교사에 의해서 부정되어져서 고통 중에 있다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어쩌면 이러한 일은 한국교회에서 많이 일어났을 수도 있는 것이다. 구원받지 않은 자를 인정하는 것도 문제이고 구원 받은 자를 우리의 선입견으로 부정해도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돕는자의 위치를 벗어 날 수 없음을 알고 행하면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아이들 앞에서 변화가 없다. 구원받지 않았다는 말을 삼가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아이들이 상처를 받을 수 있는 말이다. 아이들은 구원의 문제를 도와 주려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기 보다는 오히려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상처를 받을 위험이 있다. 더구나 양심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 일로 낙심하고 고통당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았다. 어떤 경우는 상처받고 힘들어 하다가 반항적으로 나가는 경우도 보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아이들에게 구원받지 않았다 변화가 없다고 말하는 세대는 아이들의 형편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성인일 때에 구원 받았기에 어려서부터 복음을 들으면서 자라는 세대와는 경험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험하지 못한자가 다른 경험 속에 있는 자를 조언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넘어 갈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저들을 조언하지 말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저들을 도와 줄 때 이러한 입장을 잘 생각하여 참조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들의 입장이나 형편 또한 생각을 더 많이 살피고 연구하여 잘 도와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변화가 없다.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을 삼가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아이들이 가진 생각 중에는 이러한 것도 있었다. 자신들은 변화가 없다고 하니 그러면 변화되어 구원 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여기는 부모나 주변 성도들을 살피는 것이다. 즉 판단을 하면 판단을 받는다는 말씀대로 저들을 보면서 실망스런 부분이 나타나면 마음에 그들을 판단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 문제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인성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부모나 주변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몰면 자신들도 극단적으로 생각하게 되어있다.
네 번째로 이와 같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아이들을 위축시키어 자라지 못하게 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초중고 시절은 아이들이 믿음으로 잘 자라 신앙의 기반을 다져야 할 시기이다, 그런데 구원 문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하고 고통당하는 일들이 없었다고는 못하리라. 필자가 만난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신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데 주변에 있는 성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형편에 있었다. 이와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극단적으로만 대처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정말 그러한가? 부모나 교사가 아이들의 구원 문제를 가지고 갈등하고 돕는 것은 당연 하거니와 그 방법에 있어서는 연구하여야 할 부분이 있다고 본다.
결론적인 것은 무엇인가. 먼저 아이들의 구원 문제에 부모가 극단적인 말을 삼가고 좀 더 지혜롭고 긍정적인 방법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이다. 여전히 아이들의 구원 문제를 도와야 하고 해결해야 하고 고뇌해야 한다. 그러나 입에서 변화나 확신에 대한 부분을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말하지 않고도 저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하여 다음에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자 한다.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열심히 연구하면 주께서 선히 인도하여 주시리라 믿는다. 필자는 전도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부족하여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고 지금도 거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것은 혹시라도 이와 같은 문제로 고뇌하는 부모나 교사들에게 작은 도움이 될까 하는 바람이 있어서이다. 이 글과 다른 견해를 가진 분들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혹시라도 연락을 주시면 좋은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전도에 관한 부분은 전도자마다 견해 차이도 있을 수 있고 경험의 차이도 있을 수 있는 만큼 "이것이 전도다" 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크신 사랑과 이해 속에서 읽어주시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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