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 멈춘 ‘펀치볼’에서 6·25를 만나다 [중앙일보]

2010.03.16 02:16 입력 / 2010.03.16 06:40 수정

베를리너판 1년 기획 - DMZ를 가다(1부)
전쟁 60년, 전후세대의 155마일 기행

가칠봉 정상에서 바라본 펀치볼. 펀치볼은 강원도 양구에 있는 해안분지로 6·25 때 격전지였다. [김태성 기자]
전쟁은 몸에 새겨진다. 한 세대가 저물고 또 한 세대가 갔다. 내 몸은 전쟁의 기억을 모른다. 그런데도 전장에 가듯이 몸이 굳는다. 궁금하다. 세월을 얼마나 물려야 전쟁의 상처는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첫길을 떠나며 이런 짐스러운 마음과도 저항하고 싶다. 마음은 홀홀하고 몸은 가벼웠으면 한다. 사실 그런 저항감은 나이 마흔에 이르기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있다. 우리 세대는 부모 세대와는 다르게 살 수 있지 않은가. 그게 가능한 것처럼 살아가기도 한다. 휴전선이 눈앞에서 멀고 전쟁의 기억은 더더욱 멀다.

전쟁은 나에게 항상 종전이었다. 6·25는 1953년 여름에 끝난 것이다. 그러나 비무장지대는 전쟁의 현장이다. 최전방 초소 건너편 능선이 북방한계선이다. 능선과 고지를 따라 남북방 한계선 철책이 드리워져 가까운 곳은 750m를 사이에 두고 남북이 대치한다. 비극의 전장 펀치볼은 끝나지 않은 전쟁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국전쟁은 몸에만 새겨진 전쟁이 아니다. 대지에도 새겨졌다. 전쟁과 분단은 유전자처럼 세대를 거듭해 내면화됐다. 전쟁은 망각과 기억을 동시에 요구한다. 아이러니한 전쟁이다. 이것이 휴전이고, 한국전쟁의 특수성이다. 그러므로 이 발걸음에 얹히는 짐을 덜어내려는 저항도 부질없는 짓이다. 이 여행은 때로 노병들과 더불어 60년 저쪽에 가 닿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전하는 전쟁을 받아 적을 생각이다. 긴장과 대치 속에서 생명과 희망도 찾을 것이다.

양구 가는 길에 눈이 내린다. 양구는 높고 깊은 중동부전선 최전방이다. 3월의 눈은 이 산악지방에서 대수롭지 않다. 내금강으로 드는 31번 비포장 국도가 풀려서 질척일 뿐 양구에는 아직 봄소식이 이르다. 4월 말까지 해발 1000m 넘는 준령 고지마다 적설이 남아 있다. 이곳 장병들은 양구에는 계절이 셋이라고 말한다. 빙하기와 겨울, 그리고 여름이다. 봄·가을은 흔적이 없다. 양구는 전쟁의 기억을 두껍게 덮고 있다.

태백관측소는 비무장지대(DMZ)에서 끊긴 31번 국도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고지. 관측소가 위치한 능선을 따라 남방한계선상에 3중 철책이 드리워져 있다. 철책 너머로는 비무장지대다. DMZ 북방으로 흘러내린 산자락에 태극기와 유엔기가 펄럭이는 우리 측 GP가 전진해 있다. 그 건너 능선은 북방한계선이다. 아군 GP 아래 골짜기에 오래전 누군가 흘린 손수건처럼 길 한 자락이 놓여 있다. 31번 국도는 북녘 땅 하청송·중청송을 지나 금강산으로 이어질 테지만 이제는 누구도 걸어갈 수 없다. 금강산까지 36㎞, 찻길로 40분. 옛 양구 학생들은 그 길을 걸어 금강산으로 소풍을 갔다고 한다. 디뎌보지 않고는 길은 상상력을 허용하지 않는다. 철책에 막힌 풍경은 그저 그림 같은 평면이다.

1953년 맺은 휴전협정은 한국어·중국어·영어로 된 문서에 각각 서명되었다. 김일성, 펑더화이(彭德懷), 마크 웨인 클라크가 서명하였다. 클라크 장군은 파커 만년필을 치우며 “나는 이 순간이 기쁘지 않다”고 했다. 평화도 승리도 없는 휴전이었다. 서명자들이 돌아간 후 전선에 남은 소총수가 여든 살이 되었다.

휴전선 그늘 아래, 동면 팔랑2리(八郞里) 한동규 할아버지. 황해도 신계에서 혈혈단신으로 내려와 사지(四肢)에 네 발의 총상을 입은 상이군인이다. 그는 전쟁 중 미 10군단 첩보요원으로 군번도 없이 사선을 넘나들다가 종전 후 정식 군번을 받고 18년을 직업군인으로 복무했다. 공교롭게도 전쟁 중 총상을 입은 양구에서 그는 군복을 벗었고, 부대 앞에 구멍가게를 내고 주저앉았다. 전쟁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했을 때 그는 부상으로 끝마디가 꺾여 굳은 새끼손가락을 들고 열정적이었다. 여러 전투를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꿈에 대해 묻자 시무룩해졌다. 이산가족 찾기를 신청했으나 그쪽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다. “이제야 뭘… 내 세대에서 내가 조상이 되어 사라져갈 뿐이지.” 그의 목소리는 신음처럼 들린다. 60년을 격하고 클라크 장군의 독백에 답하는 한 노병의 대답 같기도 하다.

전선이 휴전선 일대로 고착될 무렵 양구는 최대 격전장이었다.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되자 양측은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일진일퇴했다. 그해 여름에서 가을까지 피의 능선 전투, 가칠봉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무명고지 전투 등에서 피아간 2만5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31번 국도는 민통선을 넘자 조브장하니 옛길의 정취를 풍긴다. 사스래나무, 갈매나무, 물푸레나무 같은 떨기나무들이 맨몸으로 적나라하다. 박수근 화백의 ‘나목(裸木)’들은 이 고향 산야에서 얻은 기억이리라. 이제 이 길은 부식 나르는 군용트럭과 그리고 멧돼지와 산양과 고라니만 다니는 길이다. 길은 사태리 계곡을 거슬러 비무장지대로 스며든다.

중동부전선에서 가장 높은 고지 가칠봉(加七峯·1242m)에 오른다. 금강산도 이 가칠봉을 더해야 비로소 일만이천봉이다. 북방한계선 너머로 매봉·첨봉·운봉·문필봉·처녀봉·쌍봉하는 금강산 자락들이 보인다. 기러기 떼가 소리 없이 하늘을 접으며 넘어간다. 등을 돌리면 산릉에 둘러싸인 드넓은 고원분지가 펼쳐진다. 전쟁 때 미군들에게 얻은 지명 ‘펀치볼(Punch Bowl)’로 더 자주 불리는 해안분지(亥安盆地) 마을이다. 분지 전체가 1개 면(面)으로 여의도의 여섯 배에 달한다. 민통선 내에 존재하는 민간 거주 지역으로는 가장 크다. 순식간에 분지 전체가 눈보라와 운무 속으로 사라진다. 꿈결에 보았다는 무릉도원을 떠올릴 만한 장관이다. 분단은 언어마저 간섭한다. 그 눈 시린 대지를 마냥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양구가 고향인 문하승(81) 할아버지.
펀치볼은 분단과 냉전의 지층과 같다. 전쟁도 모르고 지나갔을 것 같은 이 별천지는 그러나 전쟁의 무덤이 되었다. 해방 후 인공치하에 들었다가 전쟁 후 수복되었다. 전쟁 중 남은 주민은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 인민군을 따라 이북으로 소개되고, 극히 일부는 남쪽으로 피란했다. 펀치볼은 수복지구로서 54년까지 미군이 군정을 실시했다. 미군으로부터 관할권을 넘겨받은 정부는 56년 대북 선전촌으로 키우기 위해 펀치볼에 개척민을 이주시켰다. 땅을 맘껏 개간해 먹고 살라는 소리에 각지에서 개척민 150가구가 고개를 넘어왔다. 문하승(81세) 할아버지도 그 이주민 대열에 끼어 펀치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에게는 고향이었다. 식솔 거느린 농부였던 그는 인민군 징발을 피해 숨어살다가 전쟁 중 국군이 되어 탈향해 6년 만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들은 흔적이 없었다. 이웃들은 이북으로 넘어가버렸고, 손수 일군 전답은 풀과 나무 무성한 황무지로 변해 있었다. 고향에 돌아왔으나 고향을 잃어버렸다. 이주민 20여 가구가 그와 같은 원주민들이었다. 고향에서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이들 중 많은 주민이 술로 세월을 살다가 세상을 등졌다.

이주민들의 처지도 나을 게 없었다. 제 땅 한 뙈기 가질 일념으로 불발탄과 지뢰가 지천인 땅을 맨손으로 일구었으나 원주민들과 땅 소유권을 두고 다투다가 빼앗겼다. 개간지마저 정부에서 국유화해 그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아직도 이들은 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토지분쟁을 벌이고 있다. 이 비극의 땅으로 함박눈이 자우룩이 뒤덮어왔다.

◆DMZ(Demilitarized Zone)=비무장지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로 탄생. 길이 155마일(248㎞). 협정 체결 당시 전선(戰線)을 군사분계선(MDL·Military Dividing Line)으로 정하고 여기서 남북으로 각각 2㎞씩 후퇴한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사이를 DMZ로 지정했다. 이 때문에 남·북방한계선 간의 거리는 4㎞여야 하나 남북 모두 병력을 전진 배치시켜 짧은 곳은 1.2㎞가 되는 지역도 있다.

글=소설가 전성태
사진=김태성 기자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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