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요10:1-18)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시에 팔레스타인의 유목민들의 삶의 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두 종류의 양우리가 있었다. 첫째로 개인의 소유로 산간벽지에 작은 양우리가 있었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에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셨는데 그곳이 이러한 양우리다.(눅2:8-14) 둘째로 마을마다 커다란 양우리가 지어져 있었다. 그것은 마을의 공동의 소유였다. 낮 동안에는 양들을 데리고 풀을 뜯게하고 밤이되면 여러 목자들이 양떼를 공동의 우리로 인도하여 우리안으로 들여보내고 문지기의 보호아래 두고 각기 집이나 잠잘곳으로 돌아갔다. 문지기는 문에서 절도나 강도, 들짐승의 출몰을 인하여 밤새 보초를 서게 된다. 아침이 되어 여러 목자들이 돌아오면 문지기는 목자를 한 사람씩 들여보내고 그 목자는 자기 양들을 부르게 한다. 양들은 그 음성을 듣고 자기 목자들을 따라 목초지로 인도되는 것을 보게 된다. 양을 몇 마리 가져왔는지 셀 필요가 없었다. 목자가 양을 부르면 그 목소리를 알고 따라가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생활에 익숙한 자들을 향하여 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이 말은 9장에 소경의 기적사건과 연결되어 있다.유대교지도자들은 눈뜬 소경을 회당에서 쫓아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찾아와 자기를 분명히 드러내시므로 소경은 주님을 따르게 된다. 이를 배경으로 10장의 말씀이 주어진다. 참 목자와 거짓목자를 말씀하시고 양과 목자의 관계를 설명하신다. 서론을 이해하게 되면 요10:1-6절을 잘 소화할 수 있다.1. 참 목자되신 주님은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구원하는 일을 하신다.(10:1-6)
(1) 모든 사람은 목자 없는 양들로 묘사한다(마9:36, 눅15:1-7, 사53:6 벧전2:25)
양들의 특성을 보면 첫째로 보호받지 못한 상태가 되면 예를 들어 사자나 곰이나 늑대에게 발견되면 스스로 도망하거나 공격할 수 없으므로 그들의 먹잇감이 된다. 둘째로 양은 감각이 둔한 동물이다. 소나 개는 집을 잃으면 다시 찾아오지만 방향 감각이 둔한 양은 계속 방황하고 고생하게 된다. 셋째로 양은 주변머리가 없는 동물이다. 낙타는 멀리서도 물냄새를 맡고 독수리는 높이 있으면서 먹잇감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양은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넷째로 양은 의존적인 존재임에도 고집이 센 동물이다. 따라서 양은 목자가 없이는 보호될 수도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을 수도 없게 되므로 생존이 불가능하게 된다. 죄인의 상태를 잘묘사해준다.
(2) 잃어버린 죄인들을 위하여 선한 목자 되신 주님께서 양들을 찾아 오신 것이다.
왜 양을 찾아 오셨는가? 첫째로 본래 양이 목자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기억이 있다. 소중한 자녀를 잃어버리고 찾아 나선 경우도 있다. 어린아이를 잃어버린 엄마의 심정이 어떠할까? 가끔 TV에 37년 만에 아들을 찾는 극적인 상봉의 과정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 부모의 심정을 들으면서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둘째로 이 목자는 양들을 사랑하므로 목자없는 양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시고 그 긍휼과 사랑의 풍성함 때문에 그 하나님 되심의 영광의 자리를 뒤로하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까지 찾아오신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으신다. 양에게 집중하고 끈질기게 전심전력하여 모든 난관을 극복하여 찾게 되는 것이다.
(3)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소개하신다.
팔레스테인의 개인의 작은 양우리는 작은 울타리가 있고 목자가 밤에 문에 누우면 양들은 안심하고 자게 된다. 양이 밖으로 나오려면 목자를 밟고 나가야 하고 맹수가 우리에 들어오려면 목자를 밟고 들어와야 한다. 그래서 목자는 양을 보호하기 위해서 문에서 누워서 자게 된다. 그런 문화적 배경 때문에 주님께서는 자신을 문이라고 소개하신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에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은 주님께서 요14:6절에 내가 곧 길이라고 하시는 말씀과 같은 뜻이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10:7~9절에서 주님은 자신을 문이라고 하셨고 자신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신다. 10절에도 자신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시고 주님은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고 11절에 말씀하신다. 그리고 16절에서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하는 다른 양들은 구원받지 않은 이방인을 말한다. 오직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처럼 잃어버린 양을 찾으신 일을 하신다.
2.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구원받은 양들의 풍성한 삶을 살도록 도우신다.
성도가 구원받은 것은 끝이 아니고 구원받고 나서 성장을 필요로 한다. 부모가 자식을 낳게 되면 평생을 통해 자식을 양육하는 일을 하게 된다. 주님께서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고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하여 이제 양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으로 그들을 양육하신다. 요10:9절에 구원받고 나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고 하셨다. 10:10절에는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한다는 말씀이 나온다. 우리가 구원받고 나서 늘 주님으로부터 꼴을 먹고 주님 안에 풍성한 삶을 누리고 있는가? 여기서 풍성한 삶이란 무엇인가? 라틴어에 풍성이라는 어원이 ‘파도를 일으키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그것은 파도가 일어나고 끊임없이 파도가 해변을 치는 모습을 말한다. 그것은 시간세계동안에 끊이지 않고 계속 일어나는 은혜의 풍성함을 말한다. 또한 풍성이란 헬라어는 수학적 의미로 추가분을 말한다. 예를 들어 요6장에 오병이어 기적에 열두 광주리가 남았을 때 쓰는 말이다. 주님 안에는 추가할 수 없는 풍성함, 부족함이 없게 된다. 풍성한 삶이란 첫째로, 시23:1절에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다. 주님께서 나의 아버지요, 목자가 되시니 나는 부족한 것이 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둘째로, 주님께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므로 부족함이 없다. 우리는 영육간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 셋째로, 모든 원수의 핍박과 시험에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목자는 막대기로 맹수들을 공격하고 지팡이로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져내며 그들을 인도하신다. 넷째로, 모든 고난과 환란 가운데 함께 해주신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내 삶의 잔이 넘치도록 하신다. 이것은 세속적인 물질적인 풍성을 말하지 않고 주님께서 내게 채워지고 경험됨으로 오는 인격적인 삶의 충만이다.
3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으로 돌보신다.
주님께서는 양들을 아신다. 자신을 통하여 낳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을 안다. 또한 자식들도 부모를 안다. 그래서 생명을 이어받고 그의 사랑으로 양육 받았기 때문이다. 엄마의 품과 손때에 의해서 자식은 자란다. 또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
(1) 목자의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가 있는가?
목자는 어떻게 양들에게 말을 하는가? 이것은 구체적으로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일을 하신다. 롬8:14절에 성령의 인도하신바가 되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구원받은 자 안에는 성령님이 계셔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깨닫고 들을 수 있게 된다.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양은 죽은 양이다. 우리가 거듭난 확실한 증거는 목자의 음성이 하나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한다.(2) 목자의 말씀을 순종하며 따른다.
우리가 주님의 양으로서 어떻게 순종하는가? 우리는 교회 안에서나 가정이나 직장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기를 힘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을 뿐만 아니라 내 음성을 따른다고 말씀하셨다. 요한일서에 보면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주님을 모르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3) 참 목자와 거짓 목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참 목자는 양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다. 롬8:32절에 자식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하신 그분이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사랑으로 양들을 돌아보신다. 약하고 방황하고 길을 잃어버린 양들을 돌아본다. 또한 선한 목자는 자기를 헌신하고 희생한다. 이해관계나 이익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 목자는 숫자를 보지 않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위해서 거기에 집중한다. 오늘 날 지도자들은 성공을 위해서 숫자에 약해있다. 또한 감정이 없는 지도자, 자기 이익을 위한 지도자들이 많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왕과 장군, 권력지향적인 지도자였다. 보수의 리더십이다. 그러나 주님은 섬김의 지도자셨다. 오늘날 지도자들은 감정이 없는 지도자이다. 위기가 오면 떠나버린다. 왜 사람들이 돼지를 키우는가? 돼지가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키우는 게 아니다. 결국은 먹기 위해서 키운다. 우리는 양들을 왜 키우는가? 털과 살을 팔아서 이득을 얻기 위해 키우는 것인가 아니면 사랑으로 키우는가? 사랑의 특징은 요10:18절에 스스로 버린다고 말씀하신다. 스스로란 누가 시켜서 강요가 아니라 좋아서 하는 것을 말한다. 감옥에 가고 핍박을 받고 죽음에 갈지라도 좋아서 사랑해서 하는 일이다. 타율적이 아니고 자율성에 의해서 하는 일이다. 내가 주님을 섬기는 것은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리고 헌금하고 차량봉사를 하고 모든 것을 자원해서 하는 일이어야 한다. 스스로 좋아서 하는 사람은 불평하지 않는다. 욕을 먹고 손해를 보아도 기꺼이 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이므로 그 사랑을 실천함으로 놀라운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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