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봅시다]

                             너울을 벗으려고요?

                                                                                                                                  - 이현웅(네팔선교사)


   너울을 벗으려고요? 왜요? 말씀이 그것을 증거해주고 있기 때문이라고요? 그러면 지금까지는 무엇을 근거로 너울을 쓰고 계셨나요? 지금까지 너울을 쓰고 있던 것이 말씀에 대한 잘못된 분별 때문이라고요? 어떤 말씀을 잘못 분별하셨나요? 고린도전서 11장 5절 말씀이라고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이 말씀은 여자가 기도를 하거나 말씀을 가르칠 때에만 너울을 쓰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모든 집회에 여자가 너울을 쓰는 것은 말씀의 가르침을 바로 쫓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렇습니다. 이 말씀의 기도와 예언을 하는 주체를 여자로 본다면 그렇게 분별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여기 이 말씀에서 기도나 예언을 하는 주체가 여자라는 것을 다른 말씀들이 뒷받침을 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여기 이 말씀의 기도와 에언을 하는 주체가 여자라면 고린도전서 14장 34절을 어떻게 설명하지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여기서 잠잠하라고 하는 것은 기도나 예언이 아니라 질문을 하지 말라는 것이라고요? 그러면 디모데전서 2장 8,11,12절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나요?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8절에서는 남자들이 기도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해주고 있고 11절과 12절은 이 집회 중에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고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금하며 오직 집회 시에는 조용할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집회 시에 기도하고 가르치는 일은 바로 남자들의 일이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명확하게 집회 시에 여자가 조용할 것을 말씀해주고 있는데도 여자가 너울만쓰면 기도나 예언(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요? 그것은 잘못된 분별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1장 5절의 기도와 예언을 하는 주체가 여자가 아니라는 분별이 바른 분별입니다. 이와 같은 바른 분별을 가지고 성경을 번역한 번역본이 있습니다.

   "But every woman who has her head uncovered while praying or prophesying,"

   우리나라 성경은 기도와 예언을 하는 주체가 여자라고 말씀해주고 있지만 여기 이 번역은 "기도와 에언하는 중에 자신의 머리를 가리지 아니한 모든 여인"이라 말씀해주며 기도와 예언의 주체가 여인이 아니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아우르는 바른 번역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집회 중에 기도와 예언을 하는 일은 주님께서 남자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여자들에게는 금하셨고요. 그러므로 이 말씀의 기도와 예언을 하는 주체는 남자들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기도와 예언을 하는 집회 중에 여자들이 너울을 쓰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 머리 민 것과 같은 부끄러움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오히려 모든 형제들과 함께하는 기도와 말씀집회 중에 자매들이 너울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 때만 너울을 쓴다든지 하는 것도 이 말씀이 가르쳐 주고자 하는 의도와 맞지 않습니다. 너울은 형제들과 함께 하는 모든 집회에서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질서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고전 11:3).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고전 11:10).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신다면 너울을 벗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가르치는 것입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좇게되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말씀을 교묘하게 곡해를 하며 벗기를 고집하는 이들의 고집을 누가 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잘못된 영향을 받는 이들에 대한 염려로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너울을 쓰기까지


   저는 구원을 받기 전부터 고린도전서 11장 말씀을 읽을 때마다 "성경은 이렇게 여자들이 너울을 쓰라고 말씀을 해주고 있는데 왜 우리 교회는 쓰지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곤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천주교가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생활을 하던 중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고 갈등에 갈등을 거듭한 끝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씀을 좇아서 모임에 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임에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의 그 모임이 말씀을 좇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이 모임은 약식 만찬을 하고 있었고 너울은 쓰지 않고 있었으며 목사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의 눈에는 교파와는 달리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 거듭난 이들의 무리로 보였습니다.

   모임으로 오므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경건하게 사는 이들이 받는 고난이 내게도 왔다고 여기고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이렇게 모임 안에서 고난과 기쁨이 겹치는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에 한 형제가 너울에 관한 워치만 니의 글의 복사본을 저를 비롯한 여러 형제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이때에 우리 모임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때였습니다. 목사의 호칭도 버리고 침례교로 들어가자는 유혹도 떨쳐버리고 어찌하든 주님께서 보여주신 바대로 순종하자고 하는 가르침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고난과 핍박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이자고 하는 교제가 주류를 이루며 나중에 알게 된 교회진리에 대해서 진일보를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너울에 관한 가르침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것을 깨달으며 하나로 모아졌습니다. 그리고 사역하는 형제님에게 "너울을 쓰자" 고 제의를 하였습니다. 그 후에 이 일이 말씀을 좇아가는 바른 길이라는 결론을 갖게 되었고 그 때부터 우리는 너울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지금의 모임들을 만나기 직전이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우리를 모임들과의 교제로 주님께서 인도해주셨고 먼저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이들을 통해서 우리의 결정이 바른 결정이었음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기쁨으로 너울을 쓰기로 결정하게 되었을 때에 몇 몇 인도자 급에 해당하는 형제들이 반발을 하였고 교회를 반분해서 나갔습니다. 그들은 나가면서 "이제 이 교회의 전도는 끝이 났다. 지금까지도 교파가 없어서 이단시비에 말리고 있는데 여기에 너울까지 덮어썼으니 누가 이 교회로 발걸음을 하겠는가?" 라는 예언 아닌 예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에언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오히려 너울을 쓰고 난 후의 복음집회에 가장 많은 구도자들이 참석을 하였으니까요. 그리고 이때로부터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저희들보다 앞서서 말씀대로 모이고 있는 모임을 만나게 하셔서 위로와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160명의 성도들 중에 80여명을 잃어버리는 대가를 지불하고 순종한 너울이기에 우리에게 이것은 너무도 소중합니다. 또 이것이 말씀을 좇는 이들이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라고 믿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며 우리는 너울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현재 복음전파의 장애를 운운하며 너울을 벗으려고 하는 이들이 모임 안에 있다고 하니 우리들에게는 이 소식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이 되겠습니까? 참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그와 같은 움직임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움직임은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다른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요란케하는 이들의 일들과 동일한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가만히 들어와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형제들이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는 일을 하였는데 사도 바울은 이들의 숨은 의도를 밝히 드러냈습니다.

   "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갈 6:1-12).

   대서를 하던 바울이 갑자기 친필로 서신을 쓰기 시작했고 그것도 다른 구절보다 크게 썼습니다. 이것이 그가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려는 이들의 의도를 얼마나 밝히 드러내기를 원하는가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핍박을 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은혜의 복음을 전하므로 받는 핍박을 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없이 어찌 구원이 있습니까? 또 십자가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어찌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까?

   주님께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칼을 휘두른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주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을 막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있기까지 주님의 고난이 있었고 전도자들의 고난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주님의 고난과 전도자들의 고난 이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하신 바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을 전하던 거짓 형제들은 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핍박하는 이들과 같은 모양을 가지면 면할 수 있는 핍박을 왜 고집하느냐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오늘날 복음전파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를 대며 너울을 벗으려는 시도를 하는 이들의 움직임에 대한 소식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데 이것도 너울 때문에 받는 고난을 면해 보려는 술수를 부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너울을 벗으면 이것 때문에 받는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기는 하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되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참으로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 구원 그리고 교회의 성장은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눅 18:26-27).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고전 3:-7).

   위의 말씀들이 사람의 구원도 교회의 성장도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한 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을 통해서 역사하시어서 사람들의 구원과 교회성장의 일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너울을 쓰고 나자 이것으로 인해서 이상히 여김을 당하고, 이단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지만 이와 같은 것들을 무릅쓰고 순종한 후에 더욱 주님께서 우리들을 사용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신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우리의 보존과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주님께서 우리의 보존을 위해서 악한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악에 빠지지 않게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 17:15).

   핍박의 환경을 제거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고 핍박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주님의 기도의 목적이었습니다. 너울을 벗음으로 핍박을 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을 감수하고 계속 너울을 쓰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비록 핍박을 받을지라도 너울을 쓰고 주님을 섬기는 교회로 보존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다음에는 "왜 너울을 쓰게 하셨나" 라는 제목으로 너울을 쓰게하신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많이 부족한 형제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성경의 길이라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잘못된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서 방황하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때문입니다.


   너울을 쓰게 하신 이유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고전11:10).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여자들에게 너울을 쓰게 하신 이유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십니다. 그 이유를 "천사들을 인하여" 라고 말씀해주고 있고, 너울을 쓰는 것을 "권위 아래 있는 표" 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여자가 너울을 쓰는 이유가 천사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해주고 있는 "천사들"은 타락한 천사들, 곧 사탄과 그를 따르는 악한 영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최초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무너뜨린 존재들입니다. 이 일을 유다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유 1:6).

   자신에게 주어졌던 지위 곧 자신의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난 천사들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있는데, 이들이 바로 하나님과 자신을 비기려고 한 루시퍼를 비롯한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시 14:13-14).

 루시퍼를 비롯한 타락한 천사들은 자신들의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자리를 취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탄은 하나님의 통치 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권위에 대항한 사탄과 그 무리들을 인해서 여자들이 너울을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너울을 권위 아래 있는 표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권위 아래 있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 안에 있다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바로 하나님께서는 사탄과 그의 무리들의 범죄를 교회를 통해서 가르치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비뚤어진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바른 것이 필요한 것과 같은 원리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비롯해서 피조물들의 지위를 정해주셨습니다. 천사의 지위를 정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지위도 정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고전 11:3).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고전 11:8-9).



   피조물들이 자신의 자리에 있는 것을 질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자기 자리를 떠나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고 하므로 이 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유혹하여서 여자로 또한 자기의 자리를 떠나게 했습니다. 곧 여자도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자신의 잘못을 따르게 하므로 하나님과 피조물의 질서를 무너뜨리게 하였고, 또 남자를 주장하게 하여서 죄를 범하게 하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남자와 여자의 질서도 무너뜨리게 하였습니다. 여자가 남자로 하나님께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하고 자신이 사탄에게 받은 거짓을 따르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탄은 자신이 먼저 질서를 무너뜨렸고 또한 여자를 이용하여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질서 그리고 남자와 여자 사이의 질서도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원래의 자리에 있게 하시고 그 자리에 있겠다고 하는 순종의 표로 머리에 너울을 쓰게 한 것입니다.

   사실 여자가 너울을 쓰지만 여자는 교회를 대표해서 너울을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의 머리가 없는 새 한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자매들이 너울을 쓴다고 하는 것은 "우리는 스스로의 머리가 없고 우리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곧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권위 아래 있는 표인 너울을 쓴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셨던 원래의 그 질서를 회복했음을 의미합니다. 곧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 질서가 회복되었다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통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 세상의 왕들이 사용하는 강제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느부갓네살과 벨사살과 같이 자신의 통치에 굴복치 않는 이들을 불못에 넣고 사자굴에 넣는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불순종하는 이들에게 칼로 위협하거나 돈으로 유혹하지 않으셨습니다.오직 십자가로 하셨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6).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에 굴복하고 원래 자신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의 나라는 참으로 신비로운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 안의 여자들은 남자를 주관하거나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자들 또한 교회 안에서 자신의 뜻이나 방법을 주장하거나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있어서도 세상권력이나 금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더 나가서는 불순종하는 이들에게도 완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너울을 통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운 통치를 회복하시고 사탄의 범죄를 정죄하시려는 계획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너울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이셔서 나타내신 극진하신 사랑에 대한 사람의 반응입니다. 그러니 어찌 십자가의 사랑을 입은 이들이 너울을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결코 남존여비의 상징도 남녀차별의 표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고전 11:11-12). 이 말씀이 그것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여자가 너울을 쓰고 잠잠한 것은 남녀의 차별이 아니라 질서의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가치에 있어서는 남자나 여자나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머리되시는 성부 하나님과 그분의 계획을 실천하시는 성자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주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이 동등하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요 10:30).

성령께서도 이것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6).

   그렇습니다. 주님과 성부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동등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두 위 안에 있는 질서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여자들이 가르침을 받고 순종하는 위치에 있지만 그 가치는 동등된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남녀를 차별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탄에 의해서 무너진 질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님으로 그 심령에 부어지지 아니한 이들입니다.

   이제 너울을 쓰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기쁨으로 너울을 쓰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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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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