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의 결과 (행 4:31~37)

  조준안 여주교회


사도행전의 ‘성령 충만’이란 단어가 일곱 번나온다. (행2:4, 4:8/31, 6:3, 7:55, 11:24, 13:9) ‘성령 충만’이란 성령의 지배를 말한다. 어떤 대상을 향하여 마음이 몰두하고 사로잡히는 것을 말한다. 가정에서 부부나 부자관계에도 성령충만이 필요하다(엡5:18-6:4). 직장생활에도 교회 안에서 모든 봉사도 성령 충만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과 예배를 위해서도 성도들 간의 화목하고 사랑하는 일에도 영혼들에게 복음의 빛을 발하고 전도하는 일에도 성령 충만이 전제되어야 한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생리학적 인간으로 자기본능과 욕정에 끌려다니는 사람이다. 본능의 욕구충족만을 위해 돈을 버는 사람이다. 둘째로, 철학적 인간이 있다. 이성과 양심과 도덕과 윤리를 중시하고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사람이다. 음식을 먹어도 무작정 먹지 않고 내 몸에 이로운가를 따져 먹는다. 또한 자기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삶으로 지성과 양심의 충실한 사람이다. 셋째로, 영적인 인간이 있다. 성령과 더불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다. 성령이 이끄는 대로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대로 사는 사람이다. 우리 이성과 욕망과 양심이 성령의 지배아래 놓인 사람이다. 초대 성도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의 결과로 성령 충만하게 된다. 그들은 성령이 충만하게 되자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는가?
1.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였다.
성령의 사역을 객관적이고 역사적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성부하나님께서 구약에 역사의 주도적으로 나타나셨다. 창조,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자기 백성과 함께 동행하며 말씀하시고 인도하시고 기적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은 공생애동안에 많은 기적과 말씀을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셨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무엇인가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체험은 다음이다. 기독교 비평가들은 체험을 인간의 심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일어나는 일종의 종교적 현상으로 규정해버린다. 그러나 기독교는 객관적 진리되신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사건을 일으키신 일이다. 기독교는 먼저 주관적 체험이 앞서지 않는다. 이제 성부성자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일하시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성령하나님께서 우리 개인 안에서 주관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성령 충만은 그것을 말한다. 복음안의 역사는 인간의 이성으로 다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이 이해나 설명이 가능하면 철학이 되어버린다. 하나님의 기적과 초자연적인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조차도 다 이해할 수 없다. 초대 성도들의 기도의 특징은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계시한 복음진리를 전하는 일을 위해서 기도한다. 그들은 세상적으로 유능하거나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다. 거대한 종교정치권력에 맞서 오직 성령의 충만을 위해서 기도한다. 성령이 충만하자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담대함으로 하나님말씀을 전한다. 복음을 전하는 자신도 성령의 충만이 필요하고, 말씀을 듣는 청중도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베드로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였지만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은 삼천명이 회심하여 구원받았고 (행2),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복음을 거부하므로 이를 갈고 스데반을 죽여 버렸다. (행7)

(1) 성령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 어떤 일들을 하시는가?(요16:7~11) 첫째로, 성령은 죄에 대하여 책망하신다. 책망한다는 말은 ‘설복하다, 죄를 입증하다’라는 말이다. 법정에서 죄인이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고 죄를 완강히 부인하다 죄를 입증할 증거나 증인이 서게 됨으로 유죄가 판결되고 마침내 죄를 자백하게 된다. 성령은 먼저 율법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 스스로 죄인인 것을 깨닫도록 죄를 입증하는 일을 한다. 둘째로, 성령은 의에 대하여 책망하신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시고 주님은 의인이셨고 의로운 삶을 사셨다. 그 주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를 다 짊어지고 가셨고 부활하심으로 의로운 길을 열어놓으셨다. 우리 죄는 하나님의 거룩 앞에 공의로운 심판 앞에 설 수가 없다. 우리 인간은 거룩하고 의롭게 살 수가 없다. 이러한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 죄를 담당해주시고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주셨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롬3:24~25, 고후21, 빌3:8~9) 셋째로, 성령은 심판을 말씀하신다. 이 세상의 신인 사단이 이미 심판받았음을 드러내신다. 마귀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패배하였다. 그리하여 주님은 십자가로 승리하셨다. 마귀가 사람을 죄와 율법을 가지고 끌고 다녔다. 주님은 율법의 요구인 죄를 다 짊어지고 가심으로 마귀가 공격할 근거를 제거해버리셨다. 그래서 마귀는 정죄하고 송사할 빌미가 사라진 것이다. (요12:31, 골2:15) 다만 불신자들에게는 이 복음이 아직 가리어져 있다. 이 세상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복음의 광채가 비치치 못하게 한다. (고후4:3~4) 성령은 복음을 통하여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나라로 옮기고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다. (골1:12~13, 행26:16~18) 그래서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을 이 세상에 빛으로 증인으로 부르셨다. 그래서 그 복음의 광채를 말과 삶으로 잘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은 기도한 것이다. (행1:8, 벧전2:9)
(2) 행4:33절에서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한다. 초대교회가 전한 복음의 내용과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구원과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다. 실제 인간의 문제를 두 가지로 요약하면 죄와 죽음이다. 죄로부터 인간의 모든 고통과 환란과 전쟁이 있게 되고 죄의 결과로 죽음이 오게 되었다. 사람들은 죽음이라고 하는 무서운 정체를 두려워하며 살게 된다. (히2:15) 또한 이것은 모든 사람의 존재의 깊은 곳으로부터 일어나는 갈망은 사랑받고자하는 욕망이다. 사람들이 돈을 벌고 학문을 쌓고 성공과 출세에 목말라하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사람은 필요한 것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돈, 지식, 권력을 얻으려고 한다.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존재감과 자기를 더 드러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야 사람들의 칭찬, 인정, 존경,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진흙으로 만드시고 그 속에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을 넣으셨다. 그래서 사람은 한없이 존귀한 것을 추구하면서 또 한없이 무가치한 자신을 보며 좌절한다. 그래서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가 거부당하고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자아상은 풍선과 같아서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 풍성해지고 모욕과 무시를 당해서 바늘로 찌르면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된다. 나는 가치 있고 쓸모 있는 존재인가? 이런 것에 실패할 때 술로 자신을 잊어보려고 하고 때로 치장도 하기도 한다. 인생의 최대의 적은 성공이나 인기가 아니라 자기거부감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 진정한 가치는 어디서 오는가? 사람이나 세상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내 진정한 가치와 자존감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찾을 수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만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어떤 희생의 값을 치르셨는가를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너져 내린다. 거기에 진정한 자기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인생은 좀더 오래 살고자 하는 깊은 갈망이 있다. 그러나 역대 영웅호걸 중에 그 어떤 사람과 죽음 앞에 정복당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오래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친다. 병과 건강과 싸우고 음식과 싸운다. 인생에게 죽음의 문제, 영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늘 불안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람은 죽음 앞에 설 때 비로소 참된 가치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까를 생각한다. 기독교 복음에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영생의 길이 있다. 부활은 죽음 외에 분명한 세계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된다. 그것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 초대의 성도들은 부활에 대한 확신 때문에 삶을 다르게 살았다. 우리 주변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을 때 몸이 잘리는 아픔을 겪게 된다. 지금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많은 병이 치유되고 편리한 시대이다.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살아가는 통신, 교통이 발달되었지만 아직도 세상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죽음의 원인과 결과를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은 죄가 원인이요, 죄의 결과가 사망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원인인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의 문제를 부활로 해결해주셨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망을 향해서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다. 모든 인류는 죄의 독침과 병균에 감염되어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이기셨다. (고전15:53~57)
2. 성도들간의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행4:32)
그들의 공통점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하신 일을 믿는 자들이다. 그들은 머리가 바뀐 자들이다.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인 된 자들이다. 그들의 마음의 보좌에 성령을 모신 자들이다. 그러나 성도들 간에는 다른 점이 너무나 많다. 성장배경, 성격, 정서, 문화배경, 식성, 정치성향, 취미, 생김새, 개성과 기질 등이 다 다르다. 이들이 하나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두 사람이 모여도 하나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악한 일이나 선한 일에 하나 되는 경우는 있다. 부부가 한 마음이 되는 것도 쉽지 않다.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지만 갈등은 계속된다. 간혹 나 혼자 안에도 하나 되지 못하여 갈등한다. 음식점에 들어가면 무엇을 먹을까 갈등할 때가 많다. 그러나 초대성도들은 성령이 복음으로 하나 되게 하셨다. 아버지가 하나요, 주님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다. 몸이 하나 되는 것은 머리의 통제를 받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지체는 서로 사랑하므로 하나 되어 있다. 그래서 교회도 머리의 통제를 받으면 하나 되고 우리가 한 피로 구원받은 한 형제요 가족임을 인식할 때 우리는 하나 된다. 초대교회는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 됨의 결과를 나타낸다.
3. 그들은 물질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령 충만 하게 되자 그들은 소유욕에서 자유로워졌다. 그그들이 주님을 주인으로 모실 때 내 몸, 내 재능과 은사, 물질, 가족, 직업 모든 것에 주인이 주님이시고 소유자가 주님이 되신다. 우리는 관리자요, 청지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게 된다. 또한 그들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내세지향적 삶을 산다. 종말이란 끝이라는 말이다. 세상가치가 끝나고 영원하고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는 말이다. 영원하고 진정한 가치인 진리와 생명을 준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삶이다. 종말이란 또 다른 의미는 주님의 초림과 재림사이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초림이 끝이 아니라 재림이 완성이다. 롬8:15~17절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기업을 상속받을 후사다. 그 나라를 위해 준비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다. 이것이 종말론적 삶의 성격이다. 그래서 교회가 무엇을 목표로 하는 것과 그 목표를 향해 지금 어떻게 달려가는지가 다른가를 보여준다. 이 세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오는 세상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그것을 목표로 원리로 사는 삶이다. 그 삶을 위해서 이 땅은 학습장이요, 훈련장이다. 이 땅에 훈련의 대표적인 것은 물질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난다. 돈은 이 세상의 가치의 중심에 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 주인이요, 돈을 목표로 하고 돈을 사랑함으로 산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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