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등대]


                                                           섬김집사들(2)


                                                                                                                                                          - W. E. 바인


진정한 가치


   어떠한 종류의 섬김이든지 그 섬김에 위엄과 가치를 부여하는 분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의 눈에 보기에는 아무리 보잘 것 없다 해도,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을 위한 모든 섬김을 그분은 하늘의 기준을 따라서 평가하신다. 그분은 모든 섬김을 보배롭게 여기시며 때가 되면 칭찬과 보상을 주실 것이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너는 나에게 그 일을 행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이들의 놀라움을 이해할 수 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37-40).


   인간의 전통


   섬김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성경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성직제도의 고착이 교회가 의식들 위주로 운영되는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심판대와 관련해서 생각해야 한다. 이는 지극히 중요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는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과 교훈을 기준으로 해서 모든 것을 평가할 것이다! 인간의 교훈과 실행을 따르는 대신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순종하고 있는가? 각 신자는 이에 순종하는 만큼 그 엄숙한 심판대에서 영원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섬김은 무엇인가?


   섬김이라는 주제에 대해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생각해보자. 이 표현은 기독교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용례와 다르다. 다음 구절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즉시 알게 한다.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벧전 4:10-11). 여기서는 몇 가지 사실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명백히 성령님께서 영적인 은사들을 교회들에게 나눠주신다. 이러한 섬김은 성도들 가운데서 행해진다. 누가 말하려고 한다면, 즉 성경을 구두로 가르치려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섬김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섬김은 그 성격과 횟수에 있어서 강단에서의 말씀증거 이상의 폭넓은 의미를 갖는다. 참으로 여기서 말하는 섬김은 포괄적이다.

   다시 한 번 고린도전서 12장을 살펴보자. 거기서는 지역교회 안에서의 영적인 은사들이 다양하며, 직임이 다양하며, 역사가 다양함을 알려준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고전 12:11). 섬김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봉사이다. 그런데 섬김과 관련된 이 구절은 교회 안의 어떤 특별한 성직자를 암시하지 않는다. 또한 교회가 목사를 지명하거나 선택하는 것을 암시하지도 않는다. 여기서 가르치는 바는 지역교회 전체가 섬기는 몸이며 성령님께서 지체들 안에서 또 지체들을 통해서 권한을 행사하시고 기능을 담당하신다는 것이다. 분명 교회들을 향해 보내진 서신서들 중 어느 것도 성직자를 말하지 않는다. 성도들 가운데서 그런 칭호로 불린 이는 나오지 않는다.


   차이점


   로마서에서도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롬 12:4-8). 여기서도 섬김은 구두로 하는 증거, 가르침, 권면보다 포괄적이다. 또한 어떠한 형태의 섬김이든지 성도들은 그것을 위해 자신을 드려야만 한다. 알아야 할 다른 한 가지는 가르침과 권면과 기타의 영적인 유형의 섬김은 한 사람에게 집중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구절들에서도, 성경의 다른 어떤 구절들에서도 그와 같이 하도록 말하지 않는다. 교회의 지체들로서 우리는 받은 은혜를 따라서 다양하게 섬김을 행한다.


   기독교계


   성령님께서 교회들의 각 지체들에게 은사를 주신다. 그리고 다양하게 나눠주신 이 은사의 사용에 있어서도 그분께서 통제하시고 인도하신다. 하지만 기독교계에서 행하는 성직자제도는  이러한 가르침과 완전히 불일치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확실하게 떠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교회시대 초기에 발생할 이와 같은 배도에 대하여 사도들이 친히 예언했다. 성경은 회중과 구별되는 교회 내의 공적인 "성직자"에 대해 결코 말한 적이 없다. 또 성찬식을 주관 하도록 임명된 자에 대해서도 결코 말한 적이 없다. 명백히 영적인 은사들은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성장시켜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계에 고착화된 성직자제도와 완전히 다르다. 성직자제도는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와 전통이다.


   디아코노스, 둘로스, 레이투르고스


   과거에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있었고 현재에는 전도자들과 목자들과 교사들이 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1-12). 여기서 "봉사"의 원어는 디아코니아이다. 그 연관어들은 '종'을 뜻하는 단어인 디아코노스와 '섬기는자'를 뜻하는 단어인 디아코네오가 있다. 이 단어들은 '추구하다'라는 뜻을 가진 디아코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일반적인 섬김을 본다.

   그리스도의 종의 경우에는 둘로스라는 단어가 제일 많이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주로 종을 의미한다. 하지만 언제나 반드시 속박의 생각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도들은 이 단어를 하나님과 관련하여 그렇게 했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딛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 (약 1:1). 또한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사용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 (유 1:1).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가르침을 받는 성도들과 관련해서도 사용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후 4:5). 신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여겨야 한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엡 6: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벧전 2:16).

   자신의 선교 사역을 언급하는 중에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롬 15:16). 여기서 그가 사용한 단어는 레이투르고스이다. 이 단어는 종교적이든 다른 것이든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을 말해주는데 그는 이 단어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영적인 제사라고 말한다. 한편, 그는 고린도 교회에서 편지를 보낼 때에는 자신 및 다른 사도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고전 4:1) 여기의 "일꾼" 이라는 단어의 원어는 휘페레테스이다. 이 단어는 본래 전투용 함선에서 노젓는 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상관의 명령을 수행하는 하급 장교를 가리킨다.


   가르침


   성경을 가르치는 섬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교회가 모일 때 우리는 다양한 섬김을 통해서 덕 세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살전 5:11).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고전 12:7-8).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런 일들을 하기에 적합한 형제들이 성경을 가르친다(엡 4:8,11-14; 고전 12:18,28-30). 이러한 종류의 섬김은 제한을 받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고전 14:29)  또한 이 섬김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행해지고(고전12:11)). 자기통제가 요구된다(고전 14:32). 교사들은 자신의 사역을 자신이 평가하지 않는다. 교사들은 서로 자신의 사역에 대한 다른 교사들의 생각을 존중한다. 가르침은 신중하게 행해져야 하는 동시에 부지런함으로 행해져야 한다. 교사들은 자신의 가르침에 자신을 드려야 한다. 자신이 제공하는 섬김이 지닌 위엄과 엄숙함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가운데 그와 같이 해야 한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벧전 4:11). 이러한 명령과 원리는 교회들에게 영구적으로 주어졌다. 그러므로 교회들은 이것들을 절대로 버리지 말아야 한다. 신약 성경의 가르침들이 주어진 다음 후세대의 교회 인도자들 중 어떤 이들은 이 가르침들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터무니없다. 성경 자체의 내적인 증거가 그것을 반박한다.

   성경이 "예언"에 대해 준 명령들은 "가르침"에도 적용된다. 근본적인 원리들은 동일하다. 이는 성경이 완성된 후 예언은 사라졌고 선지자의 역할을 교사가 대신했기 때문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벧후 2:1).선지자는 즉각적인 계시를 받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말해주는 자이다. 교사는 성경의 메시지를, 성경에 부합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이다.


   성령님을 소멸함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이러한 권면이 주어졌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살전 5:19). 문맥을 살필 때, 이것은 교회가 모일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이에 대해 성령님께서 권한을 행사하시고 인도하시는 것과 관련된다. 이러한 때에 성령님을 소멸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자기생각으로 인해 그분의 뜻과 인도를 인정하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무지함에서 그러하든 알면서도 그러하든, 육신의 충동을 따라가는 것이다. 이를 생각할 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성직자제도로 대체하는 것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일이다. 회중 위에 목사를 두는 것은 어려움을 피하는 쉬운 길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탈하는 길이다, 지역교회로 모일 때  우리에게는 겸손과 자신을 살핌과 하나님을 기다림이 요구된다. 어떤 때에는 충성되면서 은혜로운 책망이 필요하기도 하다. 이것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 인간이 고안해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났기 때문에 그와 같이 하여 올바르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날에도 성경은 변함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계의 종교 체제는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과 진리를 따르고 있지 않다. 심지어 말씀과 완전히 상반 되는 교리들을 추가하기도 한다. 이처럼 거짓된 원리들을 실행하는 곳에 속해 있다면 말없이 묵인함으로써 동조하지 말고 거기를 떠나야만 한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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