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기념]


                                                                하나님의 저주


                                                                                                                                                    - 다니엘 스미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 21:23).


   사람의 말 중에 가장 무서운 단어는 저주, 그것도 하나님께 저주받았다는 것이다. 이 단어는 모든 가능한 비참함, 고통, 공포, 절망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고통도 만일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온다면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하나님의 사랑스런 백성들이 극도의 고난의 짐을 조용히 인내하며 심지어는 기쁨으로 감당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없다면, 단지 하나님의 진노만이 무섭게 나타났다면, 이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저주 안에 담긴 무서운 고통과 비참함을 누가 측정할 수 있겠는가!


  저주

   죄인은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의 저주 하에 있다. 이 저주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온전히 이해해야 한다. 이는 불순종에서 나온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이 같은 저주는 없었다. 지구는 이 저주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 사람이 순종을 선택해야 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순종을 도울 능력을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자 머리인 첫 사람의 불순종으로, 모든 후손이 저주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

   이는 사람의 모든 영혼에 놓여있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우주에서 반역자, 즉 타락하여 부패하고 오염된 백성이라는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것이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이라는 저울에 달아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0).

   이는 분명한 말씀이다. 이 말씀으로 모든 계층과 상태의 사람은 다 저주 아래 들어가게 된다. 사람이 가난하다고 변명할 수 없다. 배운 사람도 변명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아담의 죄 아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율법의 저주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대체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 21:23). 이 말은 나무에 달린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아무 죄 없는 사람도 나무에 달린 경우도 있다. 악한 정복자들이 핍박의 시대에 많은 사람을 나무에 달아 죽였다. 십자가는 로마가 항복을 거부한 자들을 사형시키는 방법이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에게 적용된다. 주는 우리 대신 하나님의 저주를 받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이 보낸 구속자가 잔인한 나무에 달릴 것이라고 모세가 예언적으로 말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나무에서 죽음은 법이 죄에 대해 요구하는 모든 벌을 담당할 것이다.

   이는 사랑의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식은 의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사랑받은, 영원한 아들에 적용될 때, 무서운 음성이 된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이는 하나님의 사랑받은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을 가장 단순하게 예언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맹세이다. 그러므로 때가 되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이는 이미 역사가 되었다. 후대를 사는 우리는 이를 뒤돌아보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하나님과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들리고, 하늘과 땅에서 버림받았다. 이스라엘이 독립 국가였다면, 주님은 유대인의 방식으로 돌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에 정복당했다. 십자가는 로마의 잔인한 발명품이다. 주님이 오시기 거의 2천 년 전에 말한 예언이 주님에 위해 성취되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나무에 달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 인간의 끔찍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저주는 그 전체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떨어졌다.


   문제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갈 3:13). 이는 사람을 구속하는 값이었다. 주가 우리 죄를 지셨고, 이는 영원 전 하나님의 의도였다. 이는 십자가의 깊은 의미이며, 하나님이 반역한 죄인과 맺은 화평의 언약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를 행할 의무는 없다. 주가 이를 행하신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죄가 주님 위에 놓였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어긴 모든 것이 주님에게 넘어갔다.

   그래서 모든 신자는 법의 고소, 사단의 하나님 앞에서의 비난에서 다 해방된다. 생각, 말, 행동의 모든 죄가 완전히 보상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난을 받지 않도록 주님이 모든 고난을 다 받았다. 이게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마음이 세운 영원한 계획이다.

   우리의 보증인이 우리를 위해 담당한 것을 우리가 다시 받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두 번 재판을 받지 않는다. 법은 그 형벌을 두 번 요구할 수 없다. 그렇게 하면 부당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 구주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기에 우리는 안전하다.  주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겼을지 상상해보라. 우리는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제 일어나 주를 찬양하고 그 거룩한 이름을 영원히 찬송하자.


   오 거룩한 머리가 상하셨네.

   슬픔과 수치로 숙이시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가시면류관 쓰셨네.


   고통으로 창백해지셨네.

   조롱과 학대로

   아침 해처럼 밝은 얼굴이

   내 주님이 받으신 고난은

   모든 죄인을 위한 것이네.


   죄는 내가 지었는데

   무서운 고통은 주가 당하네.

   여기 내 구주 앞에 엎드리네.

   내가 주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은헤로 나를 바라보시고

   은혜로 나의 보호자가 되셨네.


   내 무슨 말로 감사하오리.

   사랑하는 친구인 주님께.

   주가 슬픔 속에서 죽으시고

   끝없는 동정을 베푸시네.

   나를 소유하소서.


   주여, 내 사랑이 약화되지 않기를

   결코 두 번 다시

   주님을 향한 내 사랑이.*

   - 끌레보르의 버나드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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