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6.03.29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1 거듭남(중생)의 확신
  2. 2015.08.24 갈라디아서 제12과 결론

                        

                                           하여

                                                               존 필립스

                                        CHAPTER 1


                 거듭남(중생)의 확신

                                     Being Born Again


   이탈리아의 로마에 힌두교도인 인도 노인이 이탈리아 태생의 부인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때 이집트에서 힐튼호텔과 고층빌딩 안에 있는 보석체인점들을 운영하여 큰 돈을 모았습니다. 그 후 그는 보석상점들을 팔고 이탈리아로 이사하여 로마의 고급 호텔안에 다시 새로운 보석상점을 개업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그의 아들을 로마로 초청하여 자기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상점과 재산들을 관리하도록 위임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는 아들이 변호사와 결탁하여 자기 재산을 조직적으로 빼돌려 횡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재산을 스스로 지켜 장래를 대비해야만 했습니다.

   그 노인은 아들의 비행으로 말미암아 큰 실망과 비애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 부부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우연히 이탈리아어 기독교 방송 채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흥미를 느낀 그들은 방송 프로그램 순서들을 살피는 중에 또 다른 여섯 가지의 외국어 기독교 방송 프로그램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엠마오 성경통신학교 교재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곧 엠마오 교재를 신청하여 진지하게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점차적으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야 할 필요를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곧 자신들을 위하여 누군가가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마침내 엠마오 성경통신학교 로마지부 담당자가 이 힌두교 노부부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노부부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힌두교도이던 이 노인의 마음을 열게 하시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와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인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케 되는 구원의 길을 발견하게 해주셨습니다. 이들 노부부는 영 안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게 되었으며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계속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주님의 은혜 가운데 그 영혼이 성장하며, 더욱 깊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기를 기도했습니다.

   이제 이 노부부는 그들이 잃어버린 세상적인 물질의 부요 대신에 영원히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새로운 영적 보화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너 가지의 다른 언어의 성경들을 가지고 엠마오 성경통신 교재들을 계속 공부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과오를 저지른 그의 아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이와 같은 일들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일들은 과연 진실일까요? 그렇습니다. 앞의  노부부는 그들의 삶을 통하여 이런 일이 명백한 사실임을 우리에게 증명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삶의 중심과 목적이 새롭게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은 영원한 새 생명(Eternal life)을 얻는 일이며 그리고 그 새 생명 곧 영생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요 10:28-29). 이러한 새 싱명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Believe)을 통하여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디도서 3:5).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새 생명과 새 마음과 새 성품을 얻게 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얻은 생명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생명입니다. 이 신령한 생명은 거듭남(중생)을 통하여 시작되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보존됩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때까지 계속 됩니다.

   본 성경 통신교재를 공부하는 분들 중에는 이미 이와 같은 중생의 체험을 가진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간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중생은 그 시작이고 본질이며 기적이고 그 외의 모든 것입니다. 이러한 중대한 이유 때문에 한 사람이 하나님과 초자연적인 만남을 갖고, 그 결과 중생을 경험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하여 12개의 과 중 한 과의 분량을 할애하기 원합니다. 앞으로 함께 공부해 나아가면서 거듭남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신령한 새 생명을 얻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거듭남의 조건 (The Requirement)


   1. 거듭남은 필수조건이다 (The Requirement Expressed)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이 모든 인간들에게 필수조건임을 아주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그분은 경건하고 양심적이며 성경을 믿으며 종교심이 강하며 또한 정통적 유대교인인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스스로 자기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을 볼 수 없느니라" "너는 거듭나는 게 좋다" (You should be born again), 혹은 "너는 거듭나는 것을 원하는가?" (Would you like to be born again?)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는 반드시 거듭나야만 한다" (You must be born again) 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남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그래서 약 일세기 전, "당신은 반드시 거듭나야만 한다." 라고 항상 외쳤던 위대한 전도자 조지 휫필드(George Whitfield)에게 한 부인이 그 이유에 대해서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부인, 그 이유는 당신이야말로 반드시(MUST) 거듭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2. 거듭남은 어째서 필수조건인가? (The Requirement Explained)


   거듭남이 필수 조긴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살펴봅시다. 한 예화를 들겠습니다. 임금님의 왕궁이 가까운 산속에 한 벌목꾼이 살고있었습니다. 그는 임금님을 만나면 간청하고자 하는 특별한 소원 하나를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어느 날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그가 벌목을 하고 있는 가까운 곳으로 임금님의 행차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임금님 앞으로 재빨리 달려 나아가 엎드리며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폐하, 저는 폐하께 복종하는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입니다. 저는 법을 잘 지키고, 정직하며, 도덕적이고, 양심적으로 깨끗하게 살며, 선하고 그리고 종교적인 사람입니다. 저는 제 아내에게 훌륭한 남편이며, 자녀들의 좋은 아버지이고, 이웃들의 좋은 친구로 살아왔습니다. 저는 결코 그 누구를 해롭게 한 적이 없으며, 빚진 것을 항상 제때에 갚았습니다. 저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동정하여 베풀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폐하, 저는 폐하께서 이와 같은 저를 귀히 여기셔서 왕궁으로 데려가 주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를 폐하의 가족과 왕자들 중 하나처럼 대우해 주실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인가를 곧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가 왕자 가운데 하나로서 왕궁 안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그는 반드시 임금님의 가족으로 태어났어야만 합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해서 매우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오 하나님,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습니다. 나는 성경을 믿고 있으며, 기도를 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사랑과 자선을 베풀며, 충실히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나는 깨끗하게 살려고 애쓰며, 도덕적이고 존경받는 삶을 살고자 노력합니다. 나는 산상수훈의 황금률을 따라 내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는 날 하나님께서는 천국 문을 여시고 나를 영접하여 당신의 자녀들중의 하나로 삼아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강청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한마디로 말씀하십니다. "너는 반드시 거듭나야만 한다" (You must be born again).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가정 안에서 살고, 천국 시민권을 얻으려 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의 가족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요한 1:12).


   거듭남에 대한 논증(論證) (The Reason) 


   위대한 설교자 토레이 박사(Dr. R. A. Torrey)는 스스로의 선행으로 능히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청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토레이 박사에게 자신은 그가 알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중 그 누구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생활을 하며 살아왔노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때 토레이 박사는 두 개의 사각형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이 첫 번째의 사각형은 거듭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주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이를 거듭난 자의 주라고 부르겠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사각형은 거듭나지 못한 자의 주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는 계속 말하였습니다.

   "자, 이제 한 가지 예화를 들어보겠습니다. 당신이 현재 미국 콜로라도주에 살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당신은 그 콜로라도 주 안에서 해발 1만 4천 110 피트 높이의 정상(Pike)에 살 수도 있고 아니면 그와 반대로 정상에서 훨씬 아래의 지역에 살 수도 있습니다. 혹은 정상으로부터 900 피트 쯤 더 아래 지역에 살 수도 있으며, 아니면 이상의 어느 위치들과도 다른 어느 한 지점에 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는 지점이 어느 곳이든지 당신은 어쨌든 콜로라도 주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그린 이 두개의 사각형의 주(States)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의 주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가령 그가 아주 높은 도덕적 표준 위에서 깨끗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지, 혹은 평균적인 삶을 살고 있던지, 아니면 그 어떤 중간 상태의 삶을 살고 있던지간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여전히 그는 거듭나지 못한 자의 주 안에 속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기 전(born again)까지는 거듭나지 못한 자의 주 속에 여전히 남아있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반면에, 거듭난 자는 거듭난 자의 주를 상징하는 사각형 속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승리하고 열매 맺는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던지, 혹은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던지, 심지어 실패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그는 여전히 거듭난 자의 주 안에 속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당신에게 더 중요한 것은 현재 당신이 어느 주에 속한 사람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거듭난 적이 있습니까? 과연 당신은 지금 거듭난 자의 주 안에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거듭나야 하는 이유는 우리 인간은 모두가 처음부터 그릇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그는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창 1:2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인간 한 쌍을 만드시고, 또한 그들을 완전한 장소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우리 조상 아담과 이브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인류의 타락 후 아담의 후손에 대해 "아담이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 (창 5: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은, 하나님의 형상대로가 아니라 이미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따라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우리들은 모두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 (시 51:5)고 고백하였습니다.

   모든 인간은 출생에 의해, 자신의 선택에 의해, 그리고 스스로의 행위로 인해 모두 죄인들입니다. 성경은 "너희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하였느니라." (사 59: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타락한 심령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을 보응하느니라" (예레미야 17:9-10).

   이러한 이유로 범죄한 첫 사람,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류는 마지막 아담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고 거듭나야만 합니다(롬 4:12, 17). 우리의 죄는 반드시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방법으로 해결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어 변화되게 하시며, 범죄한 아담의 가족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구원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수년 전 한 의사가 병상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저명한 사람이었으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준비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한 그리스도인 친구가 그의 병상 곁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에 대해 힘써 증거했습니다. 그 친구는 곧 그에게 거듭남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그 때 그 의사는 누워있다가 몸을 일으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야" 그는 계속 이어서 "나는 거듭남이 필요해. 나는 많은 아기들이 새로 태어나는 것을 보았지. 그리고 새로 태어나는 아기는 과거가 없고, 오직 미래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지. 내가 어떻게 아기처럼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거듭남의 법칙 ( The Rule)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나이까?" (요한복음 3:4)라고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이에 우리 주 예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 (요한복음 3:6)고 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이 바로 "(그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11-13)는 말씀 안에 있습니다.


   1. 세 가지의 놀라운 부정 (Three Starting Contradictions)


   요한복음 1장 13절은 거듭남에 관해서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분명히 부정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이란,


   가족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님 (Not by Family Influences)

   선한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님 (Not by Fine Intentions)

   육적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님 (Not by Fleshly Impulses)


   첫째로 거듭나는 것은 가족의 영향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 나는 것은 혈통으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요,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그 자녀가 거듭난 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이던 자녀이던 우리 모두는 각자 하나님께로부터 영적인 자녀로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하나님께는 많은 자녀들이 있으되 손자들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나는 것은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 부모라도 그의 자손에게 거듭남을 유산으로 물려 줄 수 없습니다. 육신의 부모로부터 우리가 물려받는 것은 단지 죄의 성품입니다. 아무도 어린아이에게 반항심, 불순종, 고집, 성냄, 부정직함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특성들은 자연적인 출생을 통하여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성품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후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된 곳으로 들어 간 어느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고통 중에 저 멀리 아브라함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향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어떤 도움을 기대하여 탄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향하여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지만, 그런 혈연 관계가 잃어버려진 죄인인 그를 구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그의 간청에 이렇게 단호하게 대답하였습니다. "내 아들아 기억하라. 너는 네게 주어졌던 가족의 특권을 저버리고 구원의 기회를 놓쳤노라" 그러므로 성경은 믿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하여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가 없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출생하는 일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큰 기회인 동시에 믿지 않았을 때 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거듭나는 것은 자신의 선한 의지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즉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요한복음 1:13). 많은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그릇된 관념은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근본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그릇된 종교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사람의 뜻을 앞세워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에베소서 2:8-9).

   그 누구도 어떤 종교적인 노력이나 행위 혹은 어떤 계획에 따라서 하나님의 가족의 신분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순례, 참회, 금식, 육체적 고행, 규칙준수, 결단들로써 우리의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사람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의지와 결심은 그 영혼을 거듭나게 만들 능력이 없습니다. 거듭남은 단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새 생명의 시작입니다.

   셋째로 거듭나는 것은 육신적인 감정이나 욕망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욕망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백만장자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욕망만으로 백만장자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육의 의지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육체의 행위들을 제거시킬 힘이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로마서 8:7) 비록 육체가 그 최선을 다 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옷과 같을 뿐입니다(이사야 64:6).

   사도 바울은 한 때 자신의 인간적인 노력으로 쌓아온 종교적인 모든 공로들을 열거하면서, 그렇지만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 (빌립보서 3:4-8)고 말하였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 자신의 의지에 의해 그 행위가 어느 정도 달라진다 해도 근본적으로 육적인 본성 자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내 속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8)고 탄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9)고 말씀하십니다. 거듭남은 반드시 성령님에 의해 이루어질 뿐 결코 육적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2. 거듭남의 세 가지 조건 (Three Simple Conditions)


   우리는 결코 우리를 거듭나게 할 수 없는 세 가지 부정적인 조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요한복음 1:12 말씀을 잘 주목해 보기 바랍니다. 이를 체계적인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 (Believe)

   영접 (Receive)

   변화 (Become)


   자연적 출생을 위해서는 사람에 속한 기능과 역할 또 하나님께 속한 기능과 역할이 필요합니다. 육체적 출생을 위해서 일부분에는 인간의 기능과 역할이 있어야 하고 또한 생명의 출생을 위해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이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으며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감당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이러한 역사가 이뤄질 수 있을까요?


   첫째는 믿음(Believe)입니다. 특별히 그의 이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이름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요셉에게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예고하실 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 1:21)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구주(Savior)라는 뜻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니라" (행 4:12)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죄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나 감출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자책감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범한 죄로부터 도망할 수 없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피할 수도 감출 수도 없는 괴로운 짐이라서 때때로 죄짐의 무게로 몸부림칠 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양심의 평안과 해방을 찾는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에게 죄가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고전 15:3-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24).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벧전 3:18).

   자신의 죄로 인해 괴로워하던 수많은 영혼들이 이와 같은 말씀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이는 얼마나 분명하고 놀라운 기쁜 소식(복음)인지요! 우리는 이와같은 복음(Good News)을 믿음(Believe)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죄사함과 구원을 얻게 됩니다.


   둘째는 주를 영접(Receive)하는 일입니다. 거룩한 진리에 대한 지적인 긍정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젊은 여인이 결혼을 통하여 한 젊은 청년을 자신의 남편으로 받아 들임과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자신의 구주로 영접해야만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절차의 한 부분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천불짜리 수표를 주겠노라고 제의했다고 합시다. 당신이 그와같은 제의를 전혀 의심치 않고 그대로 믿고(believe) 있다 할지라도 그 돈을 당신 손 안에 실제로 받아들기(receive) 전까지는 그 선물은 당신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가 만인의 구주이심을 믿고 있다 할지라도 바로 당신 자신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당신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구주되심을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어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죄로부터 구원하실 당신 개인의 구주로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영접(receive)하십시오.


   셋째는 신분적 변화(Become)입니다. 한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하나님이시며 구주가 되심을 믿고(요한 20:28), 또한 그를 자신의 개인적인 주님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become)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놀라운 신분과 영생을 얻었으며, 거룩한 성령님께서 개인적으로 그 안에 들어와 함께 거하시고 하나님의 가정 안에 다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거듭남의 결과(The Result)


   거듭남은 자연적인 사람의 인격 속에 하나님으로 인한 새 생명이 넣어진 것입니다. 산림 속의 하찮은 한 그루의 나무일지라도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보다 더 위대합니다. 이 세상에 가장 작은 동물은 그가 지닌 동물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산림 속의 가장 거대한 나무들보다 더 위대합니다. 아주 연약한 어린 아기는 그 고귀한 인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가장 영리하고 가장 힘센 그 어느 동물들 보다 더 위대합니다. 가장 부족하고 연약하며 믿음이 보잘 것 없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은 그가 가진 신령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비록 온갖 지혜와 재능과 큰 권세를 가졌을지라도 거듭나지 못한 그 어떤 사람보다 더 위대합니다.

  이 신령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 각 사람들 속에 심으시는 것으로서 영원하고, 결코 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생명입니다. 이 영적 새 생명은 자연적인 생명과 어떤 면에서 닮았습니다. 한 어린 아기가 태어날 때 그 생명 속에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 할지라도 그 갓난아기에게는 부모의 사랑과 보호와 보살핌과 음식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새로 거듭난 사람은 영적 갓난아기입니다. 그에게는 반드시 영적 양식과 보호와 인도와 그리고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 1:23 ; 2:2).

   이것이 본 성경공부 교재를 만들게  된 이유입니다. 당신은 거듭나셨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본과의 과정은 당신을 위한 것이며, 당신의 영적 생명의 성장을 돕고, 신앙적으로 장성하여, 하나님의 쓰임받는 사람들이 되며, 더욱 장성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 가도록 당신을 도와 줄 것입니다.그러나 만일 당신이 아직 거듭나지 못하였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당신의 죄를 위하여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곧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마음 가운데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시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고전 15:3, 요한 1:12, 롬 10:9-10).

                                                                                                                                                                  -엠마오성경학교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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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제 12 과

                           결론(6:11-18)


거짓 선생들의 목적(6:11-13)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권위역 성경에는 "내가 친필로 너희에게 얼마나 긴 편지를 썼는지 보라" 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이 더 나은 번역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긴 편지를 썼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서신은 아주 짧은 서신입니다. 이 서신은 그가 항상 하던 대로 대필자에게 대필하게 한 것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이 편지를 썼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큰 글자들은 율법주의자들을 대적하려는 그의 깊은 감정과 그가 얼마나 유대인들의 잘못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든지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과 다른 구절들로부터 추측하는대로 그의 시력이 나빴던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후자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유대주의자들은 많은 무리의 추종자들을 형성함으로 육체의 모양을 내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주장함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습관을 바꾸라고 요구받지 않는 한 종종 예식과 의식을 기꺼이 지키고자 합니다. 오늘날에도 낮은 표준으로 많은 교인들을 형성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거짓 선생들의 위선을 보고 그들이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피하려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십자가는 육체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노력을 저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육체의 성품과 그 고결한 노력에 대한 죽음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악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십자가의 은혜의 메시지를 싫어하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6:13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실제로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많은 추종자들을 자랑할 수 있도록 쉬운 방법으로 회심자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파산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사려고 하는 시도이기 때문에 할례자인(즉, 유대인) 그들 조차도 율법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제임스 보이스).


바울의 목적(6:14-17)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의 자랑의 근거는 사람의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은 바울에 대해 죽었고 바울은 세상에 대해 죽었습니다.  한 사람이 구원 받으면 세상은 그에게 작별을 고하며, 그도 세상에 대해 작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의 덧없는 쾌락에 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에 세상이 관계되어 있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며, 그가 완전한 만족이 되시는 분을 발견했기 때문에 세상은 그에 대하여 매력을 잃어버렸습니다. 핀들레이는 " 그는 세상을 결코 믿을 수 없으며, 세상을 자랑하지도 않고, 더 이상 세상에 경배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세상의 영광에 대해 벗어버렸으며, 그를 다스리고 매력을 주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세상과 하나님의 자녀 사이에 있는 커다란 장애물이며, 구분선입니다.

6;15 (할레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비록 처음 볼 때는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이구절은 이 서신 전체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해 가장 중요한 선언 중의 하나입니다.

   할례는 외적인 의식, 예식입니다. 유대인 선생들은 모든 것을 이 의식을 준수하는 것에 의존하게 했습니다. 할례는 유대교의 기초입니다. 바울은 "할례나...아무것도 아니로되" 라고 함으로 그것을 일소해 버렸습니다. 예식이나 유대교나 율법주의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다음 바울은 "무할례가" 라고 덧붙였습니다. 의식이 없는 것으로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모든 교회봉사는 예식에 대해 반대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가 하나님께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화된 생활을 보기 원하십니다.  핀들레이는 "참된 기독교는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로 바뀌는 것이며, 죄의 종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변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두 창조 중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났을 때 그들은 타락한 아담을 머리로 한 옛 창조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 창조에 속한 사람들은 죄악되고, 도울 자가 없으며, 저주를 받았습니다. 자신을 구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나 선한 행위나 선한 성품으로 자신들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도우려고 하는 것은 쓸데없으며, 변화되지 않은 채로 자신을 두는 것입니다. 새 창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며, 주님 안에서 죄에서 구속을 받고 새 생명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이 새 창조는 시작부터 끝까지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에 성품이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는 어떠한 사상도 배제합니다. 거룩한 삶은 단지 의식을 지킴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신자들 안에서 주님께서 사실 수 있도록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새 창조는 옛 창조를 개선하거나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사도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규례는 무엇입니까? 새 창조의 규례입니다. 그는 "이것이 새 창조에 속한 것인가?" 라고 질문함으로 가르침들을 판단하며, 그렇지 않은 모든 것을 거절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강과 긍휼의 두가지 복이 있을 것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교회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유대인으로 태어나 메시야이신 주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서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평강도 긍휼도 없으며, 이 두가지는 새 창조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율법의 종 되었던 바울은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속박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는 기꺼이 종되기 원하여 주님께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종들에게 그 주인의 낙인을 찍는 것과 같이 바울은 그의 몸에 주 예수님이 주인되신 흔적들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유대인 핍박자들에게서 받은 상처입니다. 이제 그는 "누구도 나를 되사려고 하지말라. 나에게 율법에게 매였음을 나타내는 할례의 낙인에 대해 말하지 말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 나의 새로운 주인의 낙인을 가졌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아닌 은혜의 축복 기도


6: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제 바울은 그의 펜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가지 덧붙이는 말로 끝내야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은혜-그의 복음의 특징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은혜는 율법이 아닙니다. 그는 이 주제로 시작하였고(1:3) 이 주제로 마쳤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 지어다"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관계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것이며(출 20:2),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으나(롬 2:14), 그들의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갖고 있습니다(롬 2:14,15). 각자는 이러한 근거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롬 2:12). 하나님께서 인류의 표본으로 사용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인류의 실패를 증명하였습니다(롬 3:19).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고 신령합니다(롬 7:7, 12, 14, 16; 딤전 1:8). 그러나 율법은 행위라고 하는 나쁜 원재료로 되어있습니다(롬 7:7-9). 율법은 육체로 말미암아 연약한 것입니다(롬 8:3).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할 수 없습니다(히 7:19).

   율법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며 그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마 19:16-22; 눅 10:25; 롬 4:15; 5:20; 롬 7:7; 고전 15:56; 갈 3:19; 딤전 1:8,9). 율법을 이러한 목적으로 사용하면 선한 것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서는 죄가 죄되게(범법자로 만들지) 하지 못합니다(롬 5:13).

   율법을 듣는 것에는 아무 미덕도 없으며, 율법은 그것을 순종 할 것을 요구합니다(롬 2:13).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한 형벌은 사형입니다(갈 3:10). 저주 아래 있지 않고는 율법아래 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갈 3:10; 5:3; 약 2:10; 11). 율법의 한가지를 범하면 모두를 범한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행하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지않습니다. 율법은 사람 안에 잠자고 있는 욕망과 욕구를 깨우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롬 7:9, 10).

   율법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이 아닙니다. 그 자손이 올 때까지 더하여진 것입니다(갈 3:19).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몽학선생입니다(갈 3:24).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마 5:17).

   주님은 주님의 생명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셨으며 주님의 죽음으로 율법의 두려운 형벌을 치루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다 이루기까지 없어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8). 그러므로 신자들은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율법을 이룬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하심을 얻을 자가 없습니다(행 13:39; 롬 3:20; 갈 2:16, 21; 3:11). 어떤 사람이 율법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결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이날 이후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것도 요구하시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성령님을 받을 수 없습니다(갈 3:2).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하셨습니다(갈 3:13; 4:4,5).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롬 7:4, 6; 갈 2:19).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갈 3:25).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율법아래 있지 않습니다(갈 5:18). 율법은 신자들에 대해서는 없어진 것입니다(고후 3:7-11).

   성령님을 좇아 행하는 자에게는 율법의 의가 이루어집니다(롬 8:4).

   신자는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지만(롬 6:14, 15) 무법한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법 아래있는 자가 되었습니다(고전 9:21).

   복음은 율법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롬 3:31). 율법이 요구하는 형벌은 주 예수님에 의해 치루어졌습니다. "엄격한 의는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지만 긍휼은 자기의 곳간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율법 자체는 죽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결코 폐해지지 않습니다.

   십계명 중 아홉가지가 신약에서 반복되었지만,형벌이 따르는 율법으로 반복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한 의의 교훈으로 된 것입니다.


       계명                                                                          신약성경의 참조구절

1.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있게 말지니라                                  마 4:10; 고전 6:9, 10; 10:7, 14; 요일 5:20,21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등                              행 17:29; 롬 1:23; 고전 10:7

3.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마 5:33-37; 약 5:12

4.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엡 6:2; 골 3:20

5. 살인하지 말지니라                                                               마 5:21, 22; 요일 3:15

6. 간음하지 말지니라                                                               마 5:27, 28; 살전 4:3-5

7.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고전 6:9, 10; 엡 4:28

8.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마 5:43-48; 엡 4:25

9.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롬 7:7


   한가지 계명이 반복되지 않았는데 그 한가지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안식일을 지키라고 가르침을 받지 않았습니다(가령 우리가 말씀 안에 일주일 중 하루라는 원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지라도).

   신자들의 생활 규범은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이십니다(요일 2:6). 주님은 우리의 표준이시며, 우리의모범이시며, 우리의 본이십니다(요 13:15; 15:12; 엡 5:1, 2, 8, 15, 16; 요일 3:16).

   은혜와 율법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갈 4:30). 믿음과 율법은 반대의 원리입니다(갈 3:12).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지 않습니다(갈 3:21).


안식일에 대한 부록


   1.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십계명 중 하나이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에 대하여 "없어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 것입니다(고후 3:7-11). 어떤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이 구절이 의식적인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쓸데없는 논쟁입니다. 7절에서 그 율법이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단지 도덕적인 율법, 바꾸어 말하면 십계명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다음에 11절에서 우리는 이 죽게하는 직분이 비록 영광이 있는 것이지만 "없어진" 것임을 읽게 됩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안식일을 지킬 의무가 없습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다른 아홉가지 계명들은 신약성경에서 반복되었지만 율법으로서가 아니라 은혜아래 있는 자들을 위한 교훈으로써 된 것입니다.


   2. 어떠한 이방인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유대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출 31:13). 비록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쉬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 안식일을 지키도록 어느 누구에게도 명하시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시내산에서 명하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3. 어떤 주장과 같이, 어떤 교황의 신조에 의해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다는 것을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날을 주님을 섬기고 예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이유에 의해 따로 정했습니다.

   a. 주 예수님이 그 날 부활하심으로 구속 사역이 완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요 20:1).

   b.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 두 주일에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요 20:19, 26).

   c. 성령님이 주의 첫날에 오셨기 때문입니다(오순절날은 부활후 일곱번째 일요일입니다)

   d. 초기 제자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나타내는 떡을 떼기 위해 그날 모였기 때문입니다(행 20:7).

   e. 바울은 주의 첫날에 그리스도인들이 헌금을 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입니다(고전 16:1, 2).


   4.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은 고생스러운 한 주일의 마지막 날을 안식의 날로 정했습니다.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의 날과 함께 한 주일을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사역을 마치셨기 때문입니다.


   5. 안식일은 의무적인 날입니다. 주님의 날은 특권의 날입니다. 세속적인 일로부터 놓인 우리는 특별하게 그날을 주님께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6. 안식일은 처음 창조를 기억하게 합니다. 반면에 주님의 날은 새 창조와 연관되었습니다.


   7. 안식일은 올 것의 그림자로서, 그 취지는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입니다(골 2;16).


   8. 그리스도인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비난받을 수 없습니다(골 2:16).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권위역 성경에 있는 골 2:16의 '안식일들" 이 주일의 안식일을 제외한 모든 안식일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다른 역본들은(한글 개역성경도-역자주) 그 구절에서 단수로서 "안식일" 이라고 했습니다.


   9. 율법은 어떤 한 날을 엄히 지킴으로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루었기 때문입니다(롬 13:8-10; 갈 5:14).


   10.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십계명이 모든 세대에 대한 도덕적 원리들로 간직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관련된 계명이 도덕적이라기 보다는 의식적이라는 것을 알지못한 것입니다. 어떤 날을 지키는 것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옳다거나 그른 것이 아닙니다. 일곱째 날에 일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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