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신자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누가복음 6:46).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가? 이 말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다. 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날마다 외치고, 골방에서 기도하며, 나가서 전도하고, 예배당에서 찬송하고, 직장에서 하나님 때문에 고난당하고, 희생하고, 손해를 보면서도 주님을 찬송하며 감사하고 기쁨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말이나 되는가. 그런데 기가 막힐 이 일이 현실인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국민이 대통령을 아는 것과 대통령이 국민 개인을 아는 것은 차이가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만난적이 없어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삶이다. 기막히고 놀라운 것은 그러한 사람들이 자신은 하나님을 잘 믿으며 천국에 갈 뿐만 아니라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데 있다. 왜 그런 문제가 왔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기회만 있으면 주장하면서도 그가 아버지의 말씀은 전혀 순종하지 않고 순종할 의사도 없다면 그가 아버지를 믿고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교파나 그 지도자들을 맹목적으로 좇아가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필자는 전도하면서 기독교에 목숨을 걸고 있는 모범적인 신자들을 수없이 만나보았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말씀을 곱게 순종하여 구원받는 사람들이 혹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 근거하지도 않은 자기주장이나 교파의 주장이나 목사님들의 가르침만 외치면서 분명한 성경말씀을 보여주어도 말씀을 거부했다. 성경말씀을 순종해야지 사람의 생각을 따르면 안 된다는 필자의 말에, 성경이 그럴지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모른다.
서두의 말씀에 주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면서 나의 말하는 것은 행치 않는다"고 탄식하신 말씀은 이 시대에 이루어졌다.
어떤 목사님은 성경에 없는 교파의 전통을 지적하며 말하는 필자에게 우리의 신앙도 시대에 따라서 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도대체 이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의사가 있는가?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출세를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를 따르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자기의 행복한 인생을 위하여, 축복받기 위하여,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나의 건강, 나의 행복, 나의 출세, 나, 나, 나!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어리석은 기독교인들이 어찌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는가? 창조주 하나님이 그대를 꾸미는 액세서리란 말인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열정적인 기독교인들을 만나서 신앙의 동기나 과정을 물어보면 하나 같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자기를 축복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소위 기복신앙이라고 한다. 이 기복신앙은 무속신앙에서 출발하였다. 한국의 기독교는 무속신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무속신앙의 본질은 자기에게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기보다 나은 어떤 신을 숭상하는 것이다. 돌이나 나무나 바다나 산에 많은 신을 만들어 숭상하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도 자기에게 하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른다. 무속신앙을 만들어낸 사단이 기독교도 샤머니즘으로 변질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자세히 보라.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지 아니한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복을 주셔서가 아니고, 기도를 들어 주셔서가 아니고, 병을 고쳐주셔서가 아니다. 이것은 마귀도 흉내 낼 수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는데서부터 믿음생활의 출발이 있다.
신앙이 근본주의에 잡혀 있지 않고 현실주의에 잡혀 있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그런 신앙은 정함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근본을 말씀에 두어야 한다.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오시기 전 말라기 선지자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을 크게 책망한 적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고, 성전이 있고, 성경이 말하는 제사장이 있고, 절기가 있었다. 절기마다 절차를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우며,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율법을 따라서 생활하며 그렇게 훈련된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다. 그들의 제사장들도 지도자들도 따르는 백성들도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은 이 타락한 사람들을 보기가 역겨워 차라리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말라기 1장).
오늘날 기독교인들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놓은 옷을 입혀 목사님들을 제사장처럼 꾸미고, 성가대를 만들고, 예배당을 성전처럼 특별히 만들지만, 그리고 거기에서 온갖 의식이 진행되지만 진정 주님이 거기에 함께 계신가를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마르틴 루터가 만인 제사장 주의를 부르짖고 종교개혁을 하여 기독교가 회복되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다 제사장이며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귀한 신분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목사님을 새로운 제사장으로 성직자로 추대하였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의 뜻이며 성경의 가르침인가? 실로 슬프지 아니할 수 없다.
말라기서의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 흠 없는 깨끗한 양으로 제사 드릴 것을 레위기에서 명하셨거늘 그들은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려 하였다. 그들은 율법을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오늘날 기독교가 성경대로 하는 것이 몇 가지나 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 있다. 말라기 시대의 백성들은 성전에 와서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렸다고 말하고 있다(말라기 2:13) 그들은 성전에서 통곡하고 울므로 회개하는 척, 경건한 척, 진실한 척하였던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어찌 그리 똑같이 닮았는가. 왜 예배당만 가면 울고 기도만 시작하면 통곡하는가? 그들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닮은 삶은 나타내지 아니하면서 통곡과 탄식으로 자기를 포장하고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다.
물론 필자도 경우에 따라서 울며 부르짖는 기도를 하기도 한다. 또 이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배당에서 통곡과 탄식으로 우는 것과는 본질이 다른 것이다. 성경에 "항상 기 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였지 "항상 울어라. 범사에 통곡하라" 하였는가? 습관적이고 종교적이고 기계적인 눈물은 하나님의 눈에 눈물을 드릴뿐이다.
눈물에 관해서 한마디 더 하고자 하는데 성경의 본질은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아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흘리는 감사의 눈물이어야 하며, 또 살아가는 가운데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흘리는 눈물이어야 하며, 또 죄를 지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사라지지 아니함을 인하여 죄를 자백함과 함께 감사의 눈물을 흘려야 함이 옳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 유대인들과 그 지도자들을 향하여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요한복음 5:38).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한복음 5:42).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높이고 사랑하고 충성을 다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셨다. 오늘날 우리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는가?
이제 개인적인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마태복음 7장 24절 이하에는 믿음의 두 기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반석이요 하나는 모래다. 잘 아시는 대로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비가 오고 창수가 나매 무너졌지만 그러나 반석 위에 지은 집은 큰 홍수가 나도 든든히 서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무엇인가?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말씀의 기초 위에 믿음을 건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겠는가!
어떤 집사님에게 필자가 어떻게 구원받았느냐고 질문하였다. 그는 대답하기를 "예수님을 믿으니 천국 가는 것 아니냐"고 하였다. 다시 묻기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 하니 "우리 집이 점쟁이 집이었는데 계속 어려운 일이 있어서 예수님 앞에 나오니 잠잠해졌다"고 하였다. 또 질문하기를 "성경적으로 구원을 이야기해 보라" 하니 버럭 화를 내면서 "왜 그렇게 꼬치꼬치 파느냐? 믿으면 믿는 것이고 천국가면 가는 것이지 그렇게 깊이 파고드는 것은 머리 아프다"고 반박하였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도 이런 경험이 있거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리라고 본다. 생각하여 보라. 자기 영혼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는가? 시장에서 물건 하나를 사도 얼마나 망설이고 사는가. 하물며 한번 잘못되면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데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람이 잘못인가? 대강 믿는 사람이 잘못인가? 구원은 말씀에 기초하여 완성되어지지 아니하면 잘못된 구원이다. 우리의 믿음의 기초는 말씀이요 증거도 말씀이다. 말씀은 하나님이며 말씀은 예수님이며 말씀은 성령님이다. 말씀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모습은 또 있다.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진정 나를 지옥에서 구원해 주신 생명의 은인이라면, 그것을 깨닫고 경험했다면 그분을 얼마나 사랑하며 기뻐하고 함께 걸어갈 것인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 따로, 사회 생활 따로 하지 아니한가? 또 교회 생활 따로, 가정생활 따로 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교회에 가면 경건한 신자인데 집이나 직장에 가면 딴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도대체가 하나님을 닮지 아니한 자식들이 친자식일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하나님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라고 기도하지 말고 의붓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앞에서, 예배당에서 종교적으로 우는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있다. 그들이 우는 이유를 필자는 잘 안다. 필자도 수없이 울어보았고 또 상담을 통해서도 들었다. 큰 문제는 죄다. 죄를 용서받은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목사님은 회개하라고 외치고 가슴속을 들여다보면 죄악들이 가득 차 있고 일주일 동안의 삶을 돌이켜보면 온통 죄, 죄, 죄 뿐이다.
죄를 지은 자신도 밉고, 죄를 짓게 하는 친구도 밉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현실도 밉고, 그렇다고 현실을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그 마음의 고통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하랴, 나오는 것이 눈물이요 짓는 것이 한숨이라. 탄식은 기도의 주체요 슬픔은 기도의 동력이라. 하염없이 울고 나면 마음은 시원한데 시원함도 잠깐이고 또 다른 걱정이 살아나니 내일부터 지을 죄를 걱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자신이 위선자 같아서 몇 번이고 교회를 떠나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징계가 무서워서 그렇지도 못함이라. 이런 현실 속에 잡혀 있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그는 믿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요한복음 19장 30절에 " 다 이루었다" 즉, "모든 죄를 다 갚았다", "다 용서했다"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였는가? 다 용서한 사실을 믿지 않고 죄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요한복음 1장 29절에 "세상 죄를 지고 갔다" 하였는데 그러면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세상 안에 속하지 아니하였는가?
죄 용서해 주심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왜 울고 있는가? 이것은 분명히 믿는 사람이 아니다. 거짓 신자다. 그들의 인격이 거짓 신자가 아니고 신분이 거짓 신자다.
히브리서 9장 12절에 "영원한 속죄"라고 하였는데 영원한 속죄라 함은 과거와 미래로 영원한 속죄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히브리서 13:8).
진정 믿는 자는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며, 모든 죄를 용서받은 아들의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짓는 죄를 자백하고 뉘우치면서, 그러나 죄에 대한 형벌 때문에 고통하거나 지옥에 갈 걱정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참 구원 받은 자의 모습이요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진지하게 자신의 구원 문제를 검토해보길 바란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히브리서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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