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제 8 과

                           종이냐 자유자냐(4:17-5:1)


동기의 대조(4:17-20)


4:17 거짓 선생들의 동기는 바울과 달랐습니다. (4:17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그들은 추종자들을 원했지만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의 영적인 부요함에 관심이 있었습니다(4:17-20). 거짓 선생들은 갈라디아인들의 열정을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했기에 그들의 동기가 진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너희를 쫓아내기 원한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너희를 이간붙여" 라고 되어있음-역자주)는 구절에 다비역에는 "우리에게서" 가 더해져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인들을 사도바울에게서 떼어놓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추종자들을 원했고 그 추종자들을 얻기 위해 분파를 형성하려 했던 것입니다.

4:18 결론적으로 바울은 "나는 내가 없을 때에라도 순수한 동기와 선한 목적으로 행하는 한 다른 사람들이 너희 가운데에서 사역하는 것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4:19 갈라디아인들을 자기의 자녀들이라고 부름으로 바울은 자신이 그들에게 그가 그리스도를 나타내준 사람인 것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그들을 위한 해산의 고통을 다시 겪는 것은 그들의 구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목적입니다(엡 4:13; 골 1:28).

4:20 이 구절은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의 참된 상태에 대해 알기 원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그들이 진리에서 떠났다는 것에 바울은 의심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 대하여 분명함과 확신함을 가진 음성과 말로 바뀔 수 있게 되길 바랐던지 아니면 그의 편지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반을할지 몰랐던 것같습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말하는 것이 더낫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면 그의 음성의 높낮이를 바꿈으로 자신을 더낫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의 책망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부드럽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거만하고 완고하게 된다면 그는 엄하게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그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며, 그의 메시지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어떻할지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종으로 매는 율법주의(4:21-31)


   거짓 선지자들이 아브라함을 그렇게 중요시 하여 신자들이 그의 할례받은 본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바울은 아브라함의 가정 역사를 통해 율법주의는 종된 것이며 은혜와는 섞일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와 그의 아내 사라가 매우 늙었지만 한 아들을 낳을 것을 약속하심으로 자연히 자녀들을 갖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의롭게 되었습니다(창 15:1-6). 얼마 후에 사라는 아브라함이 약속된 아들을 기다리는 것을 방해하게 되어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계집종 하갈을 통해 자녀를 갖도록 제안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녀의 충고를 따랐고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사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초조함과 세속성과 신뢰의 부족에 의해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창 16장).

   그 후,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었을 때,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이 탄생은 분명히 기적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창 21:1-5). 이삭의 젖떼는 통상적인 의식을 치루었을 때, 사라는 이스마엘이 자기 아들을 희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고 말함으로 이스마엘과 그의 어미를 집에서 내쫓으라고 했습니다(창 21:8-11). 이것이 사도바울이 지금 갈라디아서에서 시작하려는 논증의 배경입니다.

4: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이 구절에 나오는 "율법"은 두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로는 거룩에 이르려는 수단으로서의 율법을 제시하였고, 그 다음은 율법서인 구약성경(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을 말하는 것으로 특히 창세기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내게 말하라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는 자들아 율법책의 메시지를 듣지 못하였느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4:22 (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두 아들은 이스마엘과 이삭입니다. 계집종은 하갈이며 자유하는 여자는 사라입니다.

4: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계획적인 간섭한 결과로 태어났습니다. 이에 반하여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비유적인 이야기는 처음 보기보다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참된 의의는 명백하게 진술된 것이 아니라 암시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과 이스마엘에 대한 참된 이야기는 바울이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깊은 영적 진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두 여자는 두 언약입니다. 하갈은 율법의 언약이고 사라는 은혜의 언약입니다. 율법은 시내산에서 주어졌습니다. 너무도 묘하게 "하갈" 이라는 말은 아랍어로 "바위" 를 의미하며 아랍인들은 시내산을 "바위산" 이라고 부릅니다. 시내산에서 주어진 언약은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계집종인 하갈은 율법에 대한 알맞은 모형입니다.

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율법의 모형인 하갈은 유대나라의 도성이며 여전히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구원받지 못한 이스라엘인의 중심인 예루살렘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그들의 추종자들을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믿지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라보다는 하갈에게, 이삭보다는 이스마엘에게 연결시킴으로 그 특성을 신랄하게 묘사하였습니다.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의 어머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의 도성은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든 신자들의 본향입니다.

4: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이사야 54:1에서 인용한 이 구절은 하늘 도성의 자녀들이 지상 예루살렘의 자녀들보다 더 많아질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사라는 오랫동안 구로치 못하고 홀로 사는 여자였습니다. 하갈은 "남편있는" 여자였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라 또는 하늘 예루살렘의 최후의 승리를 알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율법아래 거하는 하갈의 자녀들보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포함된 약속의 자녀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참된 신자는 사람의 뜻으로나 육체의 뜻을 따라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난 자들입니다. 이것은 셀 수 있는 자연적인 후손들이 아니라 주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기적적으로 태어난 것을 말합니다.

4: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린 것같이 언제나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을 핍박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 의해 받은 우리 주님의 고난과 사도바울의 고난을 생각하십시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린 것이 우리에게는 하찮은 잘못으로 보일 수 있지만 성경은 그것을 기록하였고, 바울은 그것에서 늘 존재하고 있는 육체와 성령 사이의 불화를 보았습니다.

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라디아인들에게 성경을 언급함으로 그들은 율법과 은혜는 섞일 수 없으며, 사람의 공로나 육체의 노력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복을 유업으로 이을 수 없다는 판결을 듣게된 것입니다.

4: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는 수단으로서의 율법과 어떠한 관계도 없습니다. 그들은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들이며, 그들은 그 어머니의 사회적인 조건들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자(5:1)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4장의 마지막 구절은 자유자라는 신자들의 신분을 묘사하였습니다. 이 5장의 첫구절은 자유한 자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그의 처신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 우리에게 율법과 은혜의 차이에 대한 아주 훌륭한 예가 있습니다. 율법은 "네가 자유를 얻으려면 네가 자유자가 되어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너는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매우 큰 대가를 치르고 자유하게 되었으니 이제 주님께 감사하며 너를 자유자로 만들어 주신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 안에 굳게 서라" 고 말합니다. 율법은 명령하지만 행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제공함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신분에 맞는 삶을 살 수 있게 합니다.

   C. H. 매킨토시는 "율법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 능력을 요구하여 만일 그가 그것을 나타내지 못할 경우 그를 저주한다. 복음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어 그것을 나타내는 사람에게 복을 준다' 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은 명했네, '달려라 그러면 살리라' 고

   그러나 내게는 다리도 팔도 주지않았네.

   훨씬 뛰어난 복음의 소식이 오자

   내게 날으라고 명했네, 날개를 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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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제 7 과

                       어린 자녀들과 아들들(4:1-16)


   4장의 첫부분에서 바울은 계속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과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린 자녀와 장성한 아들이라는 두 부류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4:1, 2 이것은 자기의 재산권을 그 아들이 어떤 성숙한 나이가 되면 넘겨주려고 하는 부유한 아버지의 어린 자녀에 대한 묘사입니다. (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4: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그러나 어린 자녀인 때에는 아직 미성년자로서 마치 종과 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에게는 그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와 그의 인격을 책임지고 있는 후견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 유산이 분명히 그의 것이지만, 그가 자랄 때까지는 그것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4:3 이것은 율법 아래있는 유대인의 상태입니다.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그들은 어린 자녀들이며, 마치 종들처럼 율법에 의해 혹사 당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매여있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유대 종교의 초보적인 원리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예식과 의식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아버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하여 계획된 것입니다. 조각들을 사용하여 산술계산의 기초를 배우거나, 그림들을 사용하여 사물을 알아 맞추거나, 알파벳을 배우는 어린 아이에게서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율법은 완전한 그림자요, 묘사이며, 육체적이고, 외적인 것을 사용하여 영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할례가 한 예입니다. 유대교는 육체적이요, 외적이며, 일시적인 것이고, 기독교는 영적이요, 내적이며, 영구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외적인 것들은 "자녀들" 에 대한 "속박" 의 한 형태입니다.

4:4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는 2절의 예화에 있는 "아버지의 정한 때" 에 해당하는 시대를 말합니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요컨대, 여기에서 우리는 구주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주님은 여자에게서 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단지 사람이셨다면, 주님께서 여자에게서 나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사람으로 나실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의 경우에는 그 표현 자체가 주님의 독특한 인성과 주님의 탄생의 독특한 방법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주님은 율법 아래에서 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으로서 주 예수님은 결코 율법 아래 계신 분이 아니시며, 율법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시는 은혜로 주님의 생명 안에서 율법을 존중하며, 주님의 죽음 안에서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만드신 율법 아래 자신을 놓으셨습니다.

4:5 율법은 그것을 어긴 사람에게 그 삯을 요구하는데 그 삯은 사망입니다.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삯을 치루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그 놀라운 아들의 신분으로 이끌어 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인류의 한사람으로서, 유대 민족의 한사람으로서 세상에 오셔서 율법이 요구하는 삯을 치루셨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죽으심은 무한한 가치가 있으므로 아무리 많은 수의 죄인일지라도 충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대속자로 죽으실 수 있었습니다. 고벳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인자(사람의 아들)가 되심으로 사람의 아들들인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교체인가!" 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종이 된 동안은 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아들로 받으시기 위하여 그들을 율법의 구속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의 차이점에 주목하십시오(롬 8:14과 16을 비교하십시오). 신자는 어린 자녀로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납니다(요 1:12을 보십시오). 여기에서의 강조점은 아들로서의 특권과 책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탄생에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아들로서 가족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즉시 아들이며 후사(상속자)로서 유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있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가르침들은 성도들 사이에서 아무도 어린자녀가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모두는 성숙한 아들들로 다루어집니다.

   영적인 의미에서의 양자됨은 현대 생활에서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우리가 양자됨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다른사람의 자녀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자녀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양자됨의 의미는 신자들에게 성숙한 아들들이라는 신분과 함께 그 신분에 어울리는 모든 특권을 주는 것입니다.

4:6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 신분의 위엄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성령님은 아들됨에 대한 자각을 하게 하시고 성도들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문안하게 하십니다. "아바, 아버지" 는 다정한 문안의 형태이며, 아버지에 대한 아람어와 헬라어를 결합시킨 것입니다. 어떠한 종도 한 가정의 가장에게 이러한 방법으로 문안하지 않으며, 그것은 오직 가족 구성원들만의 것으로 사랑과 신뢰에 대한 표현입니다.

4:7 신자는 더 이상 종이 아니며, 율법아래 있지 않습니다.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제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든 재산에 대한 후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후사입니다. 하나님이 소유하신 모든 것은 믿음으로써 그의 것입니다.

   해리슨은 "주님의 사랑하시는 자녀여, 만유는 당신의 것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상상을 능가하는 재산의 실제에 대해 당신을 깨우기 위해 주님께서 고린도전서 3:22, 23에서 이것을 당신에게 말씀하셨다. 우주를 생각해 보라. 그것이 누구의 것인가, 주님의 것이기에 당신의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왕답게 살아가라" 고 말했습니다.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어리석음(4:8-11)


   갈라디아인들은 우상과 신화적인 신들에 대한 속박 아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들은 다른 형태의 속박에 속하였는데 그것은 율법의 속박입니다(4:8-11).

4:8 그들은 회심하기 전에 나무와 돌로 만든 거짓 신들인 우상을 섬기던 이교도들이었습니다.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4:9 그러나 지금 갈라디아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그들은 하나님을 알았고, 혹 그들이 깊은 체험적인  방법으로는 주님을 몰랐을 지라도 최소한 그들은 주님께서 알게 하신 자들 즉, 구원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능력과 부 (그들이 상속받을)로부터 약하고 천한 일들로  돌아섰으며, 그일은 율법에 관련된 것으로, 할례나 성일, 식사에 대한 규칙들입니다. 그들은 다시 그들 자신을 구원하지도 부유하게 하지도 못하는 일에 속박시켰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그 모든 예식들을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 으로 분류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주셨으며, 다른 곳에서 이 율법을 거룩하고 선한 것이라고 주장한(롬 7:12) 그 율법을 강한 어조로 묘사한 것입니다. 이 설명은 율법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보여진 것처럼 어떤 목적과 어떤 시대를 위해 의도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서 율법을 사용하려는 것은 구원과 거룩의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를 대치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을 그리스도와 견주어 본다면 그 율법은 약하며, 무익하고, 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정하신 율법은 그들의 시대와 장소에서는 아름다운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주 예수님으로 대치하려할 때 분명한 장애물입니다.

4:10 이것은 그리스도로부터 율법으로 돌아서는 우상숭배입니다.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그러나 갈라디아인들은 유대인의 안식일과 명절과 절기를 지켰습니다.

4:11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고백한 사람들이 아직까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려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했습니다.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도 날과 달과 해를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쁜 얼굴을 구하기 위해 그들의 힘으로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 강한 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어떤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 범위에서는 그들에게 구주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이러한 태도로 기록하였다면 오늘날 율법을 지킴으로 거룩에 도달하려고 하는 고백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떻게 기록했겠습니까? 바울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들어온 유전-사람이 임명하는 제사장, 제사장의 구별된 의복, 안식일 준수, 거룩한 장소, 초, 거룩한 물 등등-을 비난하지 않았습니까?


개인적인 호소(4:12-16)


4:12 분명히 갈라디아인들은 그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하여준 바울에 대한 감사를 잊었던 것입니다.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실패와 그들에 대한 근심 대신에 그들에게 "형제들" 이라고 문안했습니다.

   바울도 율법아래 있던 유대인이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에서 구출되었고 더 이상 율법아래에서 살지 않는 "나와 같이 되" 라고 말했습니다. 이방인인 갈라디아인들은 율법아래 있던 자들이 아니며, 지금도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유대인이었던 내가 너희와 같이 되어 이제는 이방인들이 늘 누리고 있었던 율법에서의 자유를 즐기고 있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무엇을 염두에 둔 것인지 아주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그는 갈라디아인들이 자신을 대우한 것에 어떠한 개인적인 침해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로부터 거짓 선생들에게로 돌아선 것은 바울에게 개인적인 타격을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타격을 준 것으로 그들 자신에게 해를 입힌 것입니다.

4:13 이 구절은 "육체의 약한 것으로" (다비역)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복음은 처음에 육체의 약한 것으로 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약한 것, 멸시받는 것, 가난한 것을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주님의 일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십니다.

4:14 여기에서의 시험(temptation)은 시련(trial) 또는 검사(test)를 의미합니다.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바울의 병은 그 자신과 아마도 그에게서 듣는 사람들에게 시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인들은 바울의 육체적인 모습이나 언변 때문에 그를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즉, 하나님의 보내신 전도자로서, 그리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전하는 말씀을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전도자들을 대우하는 것에 관한 교훈이 됩니다. 우리가 그들을 진심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주님을 그렇게 영접하는 것입니다(눅 10:16).

4:15 그들이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 그것이 그들의 영혼에 얼마나 부요한 복인지 깨달았습니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들의 감사가 너무도 커서 할수만 있었다면 그들의 눈이라도 바울에게 주었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육체의 가시" 가 안질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감사의 정신이 어디에 있습니까? 불행하게도 아침 이슬과 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4:16 바울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변한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그는 지금도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정직하게 복음의 진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그들의 대적이 되었다면, 그들의 위치는 사실상 위험스러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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