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기복신앙으로 소경된 기독교인들이여!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 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8).


   "나는 집에 너무 우환이 많고 살림이 어려워 예수를 믿었으나 별로 나아진 것이 없어 그만 두었습니다."

   "나는 예수 믿고 건강 축복, 물질 축복, 가정 축복 받았습니다. 예수님 참 감사하지요."

   이와 같은 이야기는 필자 뿐 아니라 독자들도 주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금일의 기독교를 병들게 하는 기복신앙, 즉 육신적 축복에 매달려 있는 기독교인들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기복신앙". 보이지 아니하는 영생의 소망과 구원의 확신을 추구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 소망에 빠져서 여기에만 매달려 하나님의 근본 뜻을 저버린 길 잃은 양떼들이 여기서 헤매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잃어버린 수많은 방황하는 양떼들이 겉으로는 열렬하게 하나님을 부르지만 실제는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이 지옥으로 향하여 가고 있는 기복신앙에 잡혀 있는 불쌍한 거짓 기독교인들인 것이다.

   이 기복신앙의 실제문제를 성경에서는 수없이 많이 다루고 있다. 그중 요한복음 6장에 보면 기복신앙에 잡혀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슬프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울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15절).

   에수님을 임금 삼으려는 자들의 중심 뜻은 무엇인가?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인 놀라운 기적을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이 기적을 본 사람들은 이 놀라운 능력 있는 분을 왕으로 모시면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키는 문제 뿐 아니라 백성들의 민생문제를 능히 해결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육신적으로 아무 걱정 없이 배불리 먹고 평안히 살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왕 삼으려 한 것이다.

   이들의 마음을 읽은 예수님은 이들의 청을 당연히 거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4절에 보면 그들이 끈질기게 예수님을 찾아 따라온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주셨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한복음 6:26).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통하여 표적을 베푸신 경우가 신구약에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위엄을 드러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소망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 분명하다. 표적이 표적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거나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만 있을 때 이것이 기복신앙이 아닌가?

   예수님이 26절의 이 말씀을 하신 것은 표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그분을 믿고 그분을 통하여 영생의 소망을 갖기를 원하셨으나 그들이 떡을 먹는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육신적인 떡보다 생명의 떡이 되신 자기 자신을 깨닫게 하고자 노력하셨으나 그들이 기복신앙에만 머물러 있어서 알아듣지 못함을 볼 수 있다. 결국 예수님은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고 선포하시기에 이른 것이다. 육신적인 축복에만 매달려 있는 무리들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충격이 되었으면 대부분 물러갈 수밖에 없었겠는가(요한복음 6:66).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하고 질문하심에 대해서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하고 놀라운 답변을 하므로 오늘까지 성도들의 갈 길을 예시하신 훌륭한 가르침이 되었다.

   여기까지의 상황은 영생을 가르치고자 원하시는 주님과, 보이는 육신적 축복에만 매달려 있는 우매한 유대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잘 묘사해 준다.

   독자여, 이와 같은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있는 큰 문제점 중의 하나가 드러났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오늘날 주님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이 육신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과 받을 복을 위하여 열심을 내고 있지 않는가?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몇 년씩 하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 믿음(정성)이 가상하여 하나님이 복을 내리시니 부디 새벽기도 열심히 하여 하나님 앞에 복 받기를 소망하라는 가르침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참여하고 있는가?

   참고할 것은 필자가 새벽기도를 부정하거나 무조건 질타하는 뜻이 아님을 알기 바란다. 새벽에 일어나 성경보고 기도하고 혹은 예배당에서 새벽집회를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정성을 들여 기도하면 하루가 기쁘고 그렇지 아니하면 심령이 평안을 잃는 샤머니즘적 신앙은 지적 받아 마땅하다.

   우리네 부모님들은 옛날부터 새벽마다 물 한 그릇 떠놓고 각종 신에게 빌었다. 그런데 이것이 새벽기도로 변하여 기독교에 침투하여 기독교를 병들게 하고 있다. 필자가 선교사들을 통해서 혹은 여행 경험을 통해서 아는 바로는 새벽마다 예배당에 모여 건물이 떠나갈 듯 통곡을 하면서 울어대는 교회는 대한민국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기독교 문화는 확실히 잘못 발전되었다.

   헌금을 드리는 문제도 그렇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경우 복받기 위해 헌금을 드리는가? 헌금을 드리는 것도 하나님께서 영육간에 베푸신 은혜를 깨닫고 감사와 찬양의 표시로 드려야 마땅하거늘 하나님께서 크게 보상해 주심을 생각하고 헌금을 드린다면 이것이 기복신앙이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악한 죄인이었으나 양심의 악을 깨닫고 구원을 받아 주님께 찬양이 넘치므로 진정한 헌신이 있게 되는 것이다.

   기복신앙의 예를 더 들어보자.

   어떤 신앙잡지에서 "나는 이렇게 구원받았다"는 간증을 읽어본 적이 있어 여기 줄거리를 소개한다.

   "다리 관절염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여 양약과 한약으로 수없이 치료하였으나 소용이 없고 다리는 계속 더 악화되기만 하였다.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을 만큼 병세가 악화되고 있었다. 고민으로 나날을 보내며 슬퍼하고 있는데 어느 날 친구의 안내로 기도원에 갔다. 평생 처음으로 교회에 가보는 것이라서 처음에는 어색하였으나 며칠 있으면서 찬송을 배우고 말씀도 배우니 조금씩 적응하는 것 같았다. 이제 제법 울면서 기도하기도 하였다. 다리를 고쳐달라고 울부짖어 보기도 하였다. 며칠을 보낸 후 철야기도를 하는데 새벽 2시쯤 되었을 때 귀에 들리는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으면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나 갑자기 불덩어리가 머리로부터 온몸을 통과하는 것 같았는데 그후 다리가 씻은 듯이 깨끗이 나아버렸다. 얼마나 주님께 감사드렸는지 모른다. '나를 구원하시고 은혜를 주신 주님께 눈물로 감사찬송 드립니다. 아멘'."


   이것이 간증의 전부이다. 여기에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믿어졌고 이렇게 구원받았다는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십자가가 빠진 구원, 보혈이 빠진 속죄, 이것은 양식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단번에 분별이 가는 잘못된 간증이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어려움이나 물질의 어려움, 직장의 어려움을 기도하는 자체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신앙의 순서가 근본적으로 틀렸다는 것이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지적하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한복음 6:63)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십자가에 죽으심도, 부활하심도, 다시 오심도 모두 영적인 문제, 즉 영혼의 문제를 위한 것이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한 멸망의 심판을 면하게 하고 영생의 기쁨에 참여하게 하심이 주님의 뜻이다.

   진실이 이러함에도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영생의 문제, 영혼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교회에 나가는 이유를 질문하면 대부분 많은 사람이 육신의 복을 위하여 나간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영혼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하여도 그것은 이차적인 문제요 거기에는 아주 적은 관심을 갖고 있을 뿐이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람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슬퍼하며 탄식하신 말씀이 있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요한복음 5:40).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 앞에 오는 사람은 영생을 얻을 뿐만 아니라 영생의 기쁨을 이 땅에서부터 누리게 된다. 요한삼서 2절에도 이 문제를 분명하게 다루고 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구하며 하나님을 따를 것인가에 대한 순서를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우리의 신앙의 최고 목적은 "영혼의 잘됨" 에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 영혼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누가복음 12:6~21).

   "범죄하는 영혼은 죽으리라"(에스겔 18:4) 하신 말씀처럼 죄를 범한 영혼은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 던져질 수밖에 없다. 천국과 지옥의 길을 알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으로 던져질 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로마서 5:1)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다.

   인간으로서 죄를 짓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 거룩한 자도 하나도 없다(시편 14:3).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말씀하셨다(마가복음 10:18). 그런데 더럽고 형편없는 죄인이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를 용서받아 의인이라는 신분을 얻었다(로마서 3:24)는 것은 천지를 진동시킬 놀라운 사건이다. 이제는 (신분상)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된 것이다. 베드로는 이것을 "신의 성품에 참여"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베드로후서 1:4). 바울은 이 구원을 가리켜 "큰 구원" 이라고 놀랍게 표현하고 있다(히브리서 2:3). 영혼구원의 문제는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천하를 주고도 그 값을 계산할 수가 없다(마태복음 16:26).

   생각해 보라. 한번 가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하고 무서운 멸망의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 영원히 눈물과 고통과 이별이 없는 영생의 복된 소망 가운데 거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일인가?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요한복음 3:16). 예수님의 오심으로 구원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분의 죽으심으로 모든 죄가 용서되어 의인이 되었으며, 부활하심으로 이 사실이 확증되었고,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구원의 약속을 확실히 받은 자로서 우리를 데리러 오실 때까지 이 세상에서 육신과 함께 잠시 기다리고 있는 나그네 인생이다(베드로전서 1:7)

   잠시 기다리는 동안 육신에 필요한 것이 있기에 영생을 얻은 자녀에게 육신적 필요를 따라 하나님이 육신적인  복을 공급하신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먼저는 영적인 복이고 나중은 부수적으로 육신의 복이 필요하다. 그래서 요한 삼서에서도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하고 순서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 독자여! 부디 권고하노니 그대의 영혼의 문제는 확실히 해결을 보았는가를 생각해 보라! 필자가 만나본 독자들 중에는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하나 실제 말씀 앞에서 볼 때 주님과 전혀 관계없는 거듭나지 못한 쭉정이가 너무나 많았다. 이글을 읽는 그대는 부디 쭉정이가 아니길 바란다.

   그대는 하나님을 믿되 기복신앙으로 하나님을 믿은 것은 아닌가? 분명히 거듭난 경험도 없이 기도응답 몇 번 받았거나, 병 고침을 경험했거나, 기적을 체험하였다고 "그것으로 천국에 가겠거니" 하고 착각하지 말라. 그대의 영혼이 십자가 속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명히 "연결된 사실" 이 없다면 그대의 신앙은 기초 없는 집이요, 물 없는 구름이며, 열매없는 가을나무이다.

   주님은 분명히 열매로 판단하신다고 말씀하셨으니 그대의 영혼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새 생명으로 변화된 성령의 열매가 있기를 바란다. 그대의 육체적 욕구를 위하여 교회에 나간다면 그대는 기복신앙에 잡혀 있음이 분명하거니와 성령과 진리의 인도하심으로 거듭난 성도라면 그대에게는 영생의 소망이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6:53).

Posted by 행복자
,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자유주의로 하나님을 떠난 기독교인들이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1)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여러 측면에서 조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중에  예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자유, 즉 참된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다. 예수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자유의 본질이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언급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참 자유는 진리를 통하여 나는 것이며, 진리 안에서 나는 것이다. 진리를 벗어난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의 본질과 방종의 모습을 고찰하여 우리의 신앙의 지표로 삼고자 한다.

   진리는 무엇인가? 우선 쉽게 말하여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 조상 아담은 에덴에서 범죄하기 이전에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았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자유를 주셨던 것이다. 그들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할 자유를 하나님께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고 따먹은 후의 결과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0).

   그들은 말씀 안에서 자유를 받았다. 그들은 말씀을 통하여 자유를 받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국민들은 자유가 있다. 그들은 자유를 보장받고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나라 법의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이다. 법을 벗어나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는 것은 방종이지 자유가 아니다. 아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님이 주신 말씀(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를 부여받은 것이다.

   어떤 종파에서는 선악과 자체에 무슨 독이 있는 것처럼, 혹은 그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을 들었는데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심지어 어리석은 종파의 지도자는 복숭아가 선악과라고 하며 먹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들었는데 바보스럽고 우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선악과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부모가 아이에게 학교에 내야할 납부금을 1,000원 주었는데 그 아이가 그 돈을 학교에 내지않고 마음대로 과자를 사먹었다 하자. 그 아이가 부모에게 혼나고 매를 맞을 때 돈 때문에 맞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 부모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 욕심과 고집대로 한 것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안에서만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서두에서 요한복음 8장 32절의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소개한 바 있는데, 성경에는 수많은 진리가 있어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요한 복음 8장에서 몇 가지 언급하신 진리와 그에 따르는 자유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로, 요한복음 8장 1~11절에 나오는 진리는 "예수님은 죄인을 정죄하러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죄에서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을 증거한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은 율법적으로 볼 때 정죄받아 마땅한 죄인이다. 그는 재판 절차 없이 당장에 죽여도 할 말이 없는 죄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의 정죄를 물리칠 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다. 앞서 예수님은  요한 복음 3장 17절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혹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3장의 이 약속을 8장에서 이루셨다. 예수님이 인생을 정죄하러 오시지 않았음이 분명한 진리이거늘 필자가 만나본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죄에 대한 정죄"에 사로잡혀 고통하고 있는 모습은 무슨 일인가?

   필자도 17년전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교파에 속하여 날마다 "정죄감" 에 사로잡혀 예배당에만 가면 울고 통곡하는 것이 일이었고, 새벽기도에 가서 탄식 기도로 울면서 소리지르므로 이웃집 이방인들을 괴롭혔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금일의 수많은 눈뜬 소경 목자들은 예배당에서 많이 울고 통곡하는 사람들이 믿음 있는 사람이라고 선전하며 인정하며 가르치고 있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깨닫고 통곡과 탄식하는 심령으로 죄에서 돌이키고,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를 깨달아 구원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필수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역사는 개개인의 일생에 한번 있는 것이다.

   날마다 예배당에 가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고 통곡하는 것은 "정죄하러 오시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 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불쌍한 거짓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의 지도자는 소경이요 거짓 목자임이 분명하다.

   찬송가에도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하고 찬송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이 말씀처럼 주님이 우리를 정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왜 아직도 정죄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는가?

   오! 불쌍한 소경 목자들이여, 소경 양들이여, 정신을 차리라! 정신을 차리라! 말씀을 읽고 말씀으로 돌아가라. 성경에 "영원한 속죄" "완전한속죄"가 분명하게 있거늘 왜 가르치지 못하는가? 왜 믿지 못하는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브리서 10;14).

   그대들은 말씀으로 말미암는 자유를 가르치지 아니하고 그대들의 생각대로 가르치므로 양들을 지옥으로 끌어가고 있지 아니한가!


   둘째 8장 21절에 나오는 진리를 주목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죄인이 주님을 찾다가 죄 가운데서 죽고 그 후에는 주님 곁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요한복음 8:21).

   금일의 수많은 소경기독교인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열심히 따르며 주님 때문에 죽을 준비는 갖추고 있으나 정작 자신의 죄 문제는 분명히 해결하지 못하고 조 가운데서 고민하고 정죄하고 눈물 흘리고 있는 모습은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짝사랑하는 달콤한 가운데 있다가 결국은 멸망의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받아주지도, 받아줄 수도 없는데 꿈 많은 소녀처럼 천국의 소망에 부풀어 있다가 지옥에 던져지는 불쌍한 기독교인들이 우리 시대에 얼마든지 있다. 이글을 읽는 그대도 믿음을 점검해 보기 바란다(고린도후서 13:5).

   이들의 문제는 23절에 있는 대로 세상에서 죄 가운데 난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죄 가운데 있다. 또한 34절에 있는 대로 행동으로 죄를 범하므로 죄의 종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나 행동으로나 죄인이며 죄 속에서 죽어 지옥에 던져지는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죄의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부르고 있는데(마태복음 11:28) 왜 죄의 짐을 예수님께 내려놓지 않고 있는가?

   천국에는 죄가 있는가? 죄 있는 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왜 그대는 세상 죄(당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포함)를 다 지고 가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죄 용서함 받지 아니하는가?

   당신의 죄가 "호리라도 남김없이"(마태복음 5:26) 다 갚아지기 전에는 결단코 지옥을 피할 수 없다. 죄 가운데서 죽은 기독교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지옥에 모일 것이다.

   오! 그대여, 속히 이 지옥에서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라. 건지라. 주님께서 이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나니 주님의 십자가 속죄를 속히 받아들이고 영생의 소망을 가지라.

   예수님은 죄의 종이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이땅에 오셨다. 금일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죄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면서도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천국 갈 것으로 착각하는 모습을 볼 때 필자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35절에 보면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 이며 36절에는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말씀하시고 있다.

   죄의 종에서 자유를 얻으라!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 기록된 불멸의 진리다. 이 불멸의 진리가 인생들을 멸망의 지옥에서 건지는 열쇠요 그대 자신이 이 죄의 종에서 해방되는 것은 44절의 "마귀의 자식" 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식이 아비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그대가 죄에서 해방받지 못하였다면 마귀의 자식이니 마귀를 따라 멸망의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셋째, 8장 58절에 나타난 진리를 살펴보자. 우리를 죄와 멸망의 지옥에서 해방시키는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었던 분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실제 이 말씀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예수님보다 2,000여 년 전에 이 세상에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0년 후에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은 육신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계시다가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며, 그분은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창조된 것이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운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분은 만유를 붙잡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분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창조주께서 그대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분이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서 구원받은 우리의 구원도 영원하다. 구원은 종종 소멸되었다가 다시 받는 것이 아니고 한 번 받으면 영원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보장하신 주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

   이것은 구원을 잃을까 걱정하는 자들을 해방시키는 놀라운 진리이다. 금일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열심히 믿어서 구원을 얻고 그 구원을 잘 보존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이 구원을 잃을까 불안해하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구원은 십자가 속죄로 말미암아 단번에 얻는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보전하기 위하여 고생할 필요가 없다. 영원부터 계신 주님께서 그대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다 용서하심으로 그대를 구원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살아 계셔서 영원히 그대의 구원을 보장하셨다. 그대는 이제 모든 정죄와 지옥에서 완전한 구원을 얻었다.

   오! 그대여, 이 놀라운 진리를 통해서 그대가 자유를 얻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한복음 8:34~36).

Posted by 행복자
,

                믿어도 죄인인가?


                         율법에서 해방되던 날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라디아서 3:26).


   저는 본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주일학교에 다니며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또 기독교 선교부 계통의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존재를 막연하게나마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주일이오면 습관적으로 부모님을 따라 예배당에 가고는 했지만, 실제로 주님을 저의 개인의 구주로 믿고 거듭난 경험 곧 구원받은 믿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1학년 말에 우연히 어느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아무것도 모르면서 광적인 흥분 상태 속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것을 가리켜 성령 받은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시로는 마음이 뜨거워졌고 알 수 없는 방언을 마구 터뜨렸고 계속 기도하고 찬송하면서 무려 2년간이나 돌아다녔습니다. 특히 매일 다락방에 올라가 3~4시간 이상씩 기도를 드리고 지옥가지 않도록 이 죄인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통회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습니다.

   부흥회란 부흥회는 거의 모두 참석할 정도였고, 소득의 십일조를 바쳤고, 추운 겨울에 감기로 쓰러질 정도가 되어도 쉬지 않고 새벽기도를 열심히 나갔습니다. 매일 열심히 성경책을 읽었고 심지어는 미친 사람처럼 길거리에 우뚝 서서 열렬히 전도도 했습니다. 율법적인 교파에 충성을 다해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후배가 학비가 없어 학교 공부를 그만 두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 피를 뽑아 판 돈으로 그의 학비를 내주기까지 하였습니다. 선한 일이라면 모두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 저는 계속 제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한 정욕 때문에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마가복음 7장 21절 이하의 말씀처럼,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와 같은 모든 악한 것" 이 다 제 속에 있고 이것이 속에서 나와서 저를 괴롭히고 더럽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는 죄인으로 지옥에 갈까봐 두려웠습니다.

   매일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원죄와 모든 자범죄를 용서해 달라고 회개의 기도를 계속 반복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저의 심령에는 참 평안이 없었고 항상 죄의식으로 인한 정죄함 때문에 괴로움만 계속 받고 있었습니다. 계속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교회에 충성하고 도덕적으로 선히 살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더욱 더 시험을 당했고 범죄와 가증한 형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착잡하고 번민하는 상태에 있던 저에게 하나님께서 어느 날 전도인 한 사람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임을 그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요한계시록 21장 8절을 펴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향해, "당신은 당신의 모든 죄로 인하여 죽은 후 지옥에 갈까봐 항상 두려워하는 자에 속해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확신하고 있지 않으니 이것이 가장 큰 죄, 곧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불신의 죄" 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가 다시 저에게, "당신의 선행과 노력이 훌륭하고 종교생활에 충성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지옥 가는 것을 면할 수는 없다" 고 직고했을 때, 저의 자존심은 몹시 상했고, 저를 전혀 인정해주지 않는 그가 굉장히 미웠습니다.

   저는 몇 시간 동안 미칠 것 같은 괴로움을 당했습니다.그러나 솔직히 양심적으로 생각해 볼 때, 저는 모든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으며, 죽으면 지옥가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는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 나름대로의 일방적인 열심에 불과했습니다. 제가 지켜오던 모든 종교적인 형식과 규칙, 조직과 전통, 유전과 사람의 가르침을 붙잡고 있었을 뿐이지 정말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생명이 저의 마음속에 계시지 않음을 순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릎을 꿇고 제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전혀 믿음이 없고 생명이 없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알고는 있었지만 참으로 마음으로 믿고는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모든 죄, 꿈틀거리는 무서운 정욕, 교만심, 가증스런 형식주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행동한 것, 성령님 없이 육신의 방법대로 주님을 섬긴 것, 율법이나 십계명을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했던 어리석음, 영적인 변화가 없이 예배당 잘 다니고 헌금 잘 드리고 새벽기도 열심히 하고 이웃에 선을 베풀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것으로 크게 오해하고 있던 것이 바로 이 무지몽매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하루에 여러 시간씩 기도를  드린 것도 주님과의 성령님에 의한 생명의 관계가 아니고 날마다 짓는 죄에 대한 괴로움을 호소함으로써 스스로 위로를 받으려는 자위책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유익도 없는 방언을 계속 토하는 것을 은혜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은근히 남에게 보이며 인정을 받으려 하고 자신의 죄악을 선행으로 덮어 보려고 하는 것이 가증한 행실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주님 앞에서 두 손을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무서운 죄인이고, 교만한 죄인이며, 육신적인 의를 나타내려고 했던 가증한 죄인임을 주님께 고했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의 은혜와 그 속죄를 구했을 때 주님께서는 제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 저를 사랑하사 저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저의 주님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저의 모든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온전히 사해 주신 주님을 확실히 제 마음에 받아들여 믿었을 때 이때까지 의심하고 괴롭던 모든 죄의 문제, 심판과 지옥의 문제가 아침 햇살에 안개가 걷히듯 깨끗이 사라지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후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전부 받은 사실과(에베소서 1:7).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것과(요한복음 5: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과(로마서 8:1, 31~39),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빌립보서 4:3, 요한계시록 20:12,15). 또 로마서 8장 14절을 읽었을 때 제가 곧 하나님의 아들(자녀)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저로서는 너무나 감사한 일이고 너무나 황송한 말씀이었습니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 구원의 기쁨을 가눌 길이 없어 저는 계속 합동 찬송가 425장을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특히 "그 율법과 그 계명은 날 가르친 율법일세. 주 함께한 새 언약은 그 흘린 피 내 증걸세" 라는 내용은 내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어린 학생들 앞에서 춤을 추고 간증을 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제 구원받고 30여년이 지났지만 주님 안에 있는 저의 영혼은 참 평온함을 맛보고 있으며 이 영원한 생명을 저에게 주신 주님께 감사 찬양을 드립니다.

Posted by 행복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