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대제사장 되심

                                                                                                        -짐 베이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7-18).


   유대인들 가운데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른 민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유대인들은 그 주위 사람들에 의해 극심한 핍박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교회에 영접되게 되면 많은 것을 잃어야 했습니다.  더구나 이같은 가르침이 그들에게 도전적으로 주어졌습니다. "예수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모세도 필요하다. 구약의 아담, 다윗, 아론 같은 위대한 인물들을 생각해보라. 그들도 필요하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만 가진다는 것은 손실이 아니다. 오히려 유익하다."

   주님 안에는 모든 위대한 것이 충만하게 있습니다. 주님은 산에 있었던 모세보다 더 위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최초로 만든 아담보다 더 위대하십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놀라운 통치를 했지만, 죄로 인해 이같은 특권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를 범한 적이 없으십니다. 아담은 동산에서 시험을 받았지만, 주님은 광야에서 받았습니다.

   아담은 뱀에게 시험을 받았지만, 주님은 사단에게 직접 받으셨습니다. 아담은 모든 열매를 먹어도 되나 단 한가지만 먹지 않으면 되었으나 주님은 40일 밤낮을 굶주린 후에 사단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죄를 결코 범하지 않았습니다.

   계곡에 있던 다윗은 이스라엘 중 최고의 왕입니다. 그는 모든 적을 물리치고 승리한 왕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최고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주님은 골리앗이 아닌 사단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십니다. 주님은 다윗보다 위대하십니다.

   이스라엘 최초의 제사장은 아론입니다. 주님은 그보다 더 위대하십니다. 이 시간에는 히브리서에 나타난 주님의 제사장 직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히브리서는 주님이 드리신 희생 제사의 위대함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희생 제사를 드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2).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 속죄일에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 사람입니다. 일 년에 한 차례 속죄일에 이스라엘은 짐승을 이스라엘의 진 밖에서 잡았습니다.  그 피를 가지고 대 제사장이 성막으로 가져갔습니다. 바깥뜰과 성소를 지나 마지막으로 지성소로 가져갔습니다.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만 겨우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속죄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속죄" 라는 히브리어("카파")의 첫 번째 뜻은 "덮다" 는 의미입니다. 최초로 이 단어가 쓰인 곳은 창세기 6장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할 때 쓰입니다.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창 6:14) 여기서 "칠하다" 가 카파라는 단어입니다.

   두 번째로 사용된 곳은 창세기 32장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죽이려고 하자 형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갑니다.  이는 매우 먼 거리입니다. 21년이 지난 후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과거의 두려움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그는 라반의 딸과 결혼하고 들에서 양을 쳤습니다. 그는 많은 짐승을 가진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가족과 짐승 때문에 빨리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400명을 데리고 마중을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두려워졌습니다. 에서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는 좋은 가축을 고릅니다. 그리고 종에게 이같이 말합니다.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의 생각에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 함이었더라" (창 32:20). 여기서 사용된 "감정을 푼다" 는 단어가 "속죄"(카파)입니다. 속죄는 "덮다" "마음을 기쁘게 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세번째로 속죄가 사용된 곳이 출애굽기 입니다. 이는 속죄일과 관련됩니다. 피가 하나님의 시은좌에 뿌려져 덮었을 때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1년 동안만 받아주셨습니다. 1년 후에는 다시 피가 덮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피는 1년만 죄를 덮었습니다.  이를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히 10:3-6). 이는 하나님이 완전히 만족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제사는 매년 드려져야 했습니다. 여기 "기뻐하다"는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이는 속죄(atonement)보다 더 강하고 완전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화목" (propitiat-ion)입니다. 이는 긴 단어이나 매우 중요합니다. 속죄 즉 덮고 기쁘게 할 뿐 아니라 "만족시키다" 는 의미가 더 들어간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이는 하나님이 주님을 죄를 위한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 아들을 하나님은 세상에 보내 모든 죄를 없애고자 하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사람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위한 최초의 제사를 누가 드렸습니까? 최초의 죄를 위한 제사는 에덴동산에서 드려졌습니다. 아담은 죄를 범한 후 자신이 벌거벗었음을 알았습니다. 죄를 범하기 전에는 그는 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죄를 범하자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무화과 나무 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담을 위해 하나님이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 가죽 옷은 어디서 난 것일까요? 짐승이 죽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위한 첫 희생 제사는 하나님이 드리셨습니다.

   죄를 위한 마지막 제사도 하나님이 드리십니다. 아들을 죄인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이제 더 이상 죄를 위해 드릴 것이 없다" 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죄를 제하셨다. 이제 죄는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다. 구약의 제사는 1년간 유효하나 하나님이 완전히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주님의 제사를 영원히 만족하게 여기셨다." 이게 히브리서의 설명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을 보고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우리는 주님이 하신 일은 다 합당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온전한 제사를 드리셨고 하나님이 만족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구약에는 매년 제사장이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런데 주님이 제사장으로 오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족히 여기시는 제사를 드리셨다. 주님은 구약의 제사장처럼 이 땅의 지성소에 들어가신 게 아닙니다. 주님은 어디로 들어가셨습니까? "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눅 24:50-51). 주님은 손을 들고 축복하시면서 승천하셨습니다. 이게 주님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손을 들고 축복하는 것은 제사장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히 8:1). 구약의 제사장은 앉을 수 없습니다. 반복적으로 동일한 제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아론은 놀라운 대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기름 부어 제사장을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습니다. 주님은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아론보다 나은 제사장이십니다. 아론은 죽어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주님은 온전한 제사를 드리시고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4-16).


   주님은 승천하신 분입니다. 하늘을 지나 하나님 보좌로 가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체휼(동정)하는 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십니다. 빌라도가 사형을 판결하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시신을 무덤에 두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아들됨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1장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히브리서 1장은 구약을 인용하여 주님이 하나님임을 증거했습니다. 주님은 영원한 하나님 아들이시고 지금은 하나님 보좌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는 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히브리서를 받는 유대인 신자들의 믿음을 흔들고자 하나 "이 믿음의 도리를 굳게 붙잡자" 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구약 유대교의 제사를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역이 완성되었음은 부활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더 나은 것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약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이스라엘 제사장에게 가르쳐주신 희생 제사는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때까지만 주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죽으심으로 구약 제사는 끝났습니다. 주님의 제사로 속죄와 화목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을 체휼하십니다. 우리와 똑같이 사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믿음 때문에 가난에 처하거나 굶주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 가난하게 사시고 40일을 금식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주님은 가난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수고하는 분이 많이 계십니다. 주님도 여행에 지쳐 우물가에 앉으신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피곤을 이해하십니다.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이 지금도 있고 핍박을 받아 여러 사람에게 고난을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백 년 전에 스코틀랜드에 이단으로 몰려 핍박을 받은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부인 앞에 세우고 모독하고 고문하여 죽였습니다. 이 모습을 그 부인에게 다 보여 주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 부인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가 죽기 전에 주님을 생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이제 그를 더욱 생각 하게 됩니다." 하늘 보좌에 계신 주님은 사람들에게 뺨을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등에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알아주십니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지금도 연약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 전도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작은 섬에서 15년간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계속 울고 있습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주님도 이같은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 13:34-35). 영혼들이 구원받지 않을 때 고통하는 전도자의 마음을 주는 아십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측면이 있지만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을 체휼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와 달리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 9:28).

   여기서 "죄 없이" 라는 단어가 히브리서에서 두 번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두 번째로 오실 것입니다. 첫 번째는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두 번째로 오실 때는 죄와 상관없이 오실 것입니다. 주님이 경험하지 않은 유일한 것은 죄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되셨지만, 나사렛 거리를 다니셨지만, 사람의 몸을 갖고 계셨지만 죄를 범치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된 것은 죄를 범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죄를 짓게 되면 주님의 제사장 직분이 아닌 중보사역이 필요합니다. 이는 요한 일서 2장에 나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입니다. 우리 죄만 위함이 아니라 온 세상 죄를 위한 화목제물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를 쓴 것은 우리로 죄를 범치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해서 죄를 범하면 하나님 앞에 우리를 중보해주는 분이 계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가족이 범한 죄에 대한 진리를 말해줍니다. 우리가 죄를 범할 때 주님의 십자가 사역을 상기시키고 이에 하나님은 만족하게 여기십니다. 주님은 희생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일 뿐 아니라, 우리를 체휼하는 제사장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감정을 아십니다. 우리를 동정하시고 필요하면 우리를 돕는 분입니다. 히브리서 8장, 로마서 8장을 보면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시는 주님의 사역이 나옵니다. 이는 과거, 미래 시제가 아닌 현재시제로 쓰였습니다. 지금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할지라도 주님이 항상 기도해주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아버지 하나님의 집으로 데려가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히 5:1-6).


   아론 제사장은 사람 가운데서 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속한 일을 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돕는 일을 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한 제사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론 제사장보다 뛰어나신 분입니다. 자신을 위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지상의 성소가 아닌 하나님 보좌 우편에 가셨습니다. 이 영광은 주님이 스스로 취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임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론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주님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유다 지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다른 반차를 좇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에게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히" 는 주님이 죽을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아론 제사장은 죽으면 그 아들이 직분을 이어갔습니다.  주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랐습니다.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멜기세덱은 왕이자 제사장입니다. 그도 사람이기에 부모가 있었을 것이고 그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의 어린 시절에 대한 설명도 없습니다. 그는 갑자기 아브라함이 가는 길에 등장합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즉 그는 주님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주님은 희생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십니다. 또한 우리를 체휼하는 제사장이십니다. 세 번째로 택함을 받은 제사장이십니다. 주는 하늘에 계시며 뛰어나신 유일하신 분입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히 7:26). 이 놀라운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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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자유주의로 하나님을 떠난 기독교인들이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1)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여러 측면에서 조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중에  예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자유, 즉 참된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다. 예수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자유의 본질이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언급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참 자유는 진리를 통하여 나는 것이며, 진리 안에서 나는 것이다. 진리를 벗어난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의 본질과 방종의 모습을 고찰하여 우리의 신앙의 지표로 삼고자 한다.

   진리는 무엇인가? 우선 쉽게 말하여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 조상 아담은 에덴에서 범죄하기 이전에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았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자유를 주셨던 것이다. 그들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할 자유를 하나님께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고 따먹은 후의 결과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0).

   그들은 말씀 안에서 자유를 받았다. 그들은 말씀을 통하여 자유를 받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국민들은 자유가 있다. 그들은 자유를 보장받고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나라 법의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이다. 법을 벗어나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는 것은 방종이지 자유가 아니다. 아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님이 주신 말씀(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를 부여받은 것이다.

   어떤 종파에서는 선악과 자체에 무슨 독이 있는 것처럼, 혹은 그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을 들었는데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심지어 어리석은 종파의 지도자는 복숭아가 선악과라고 하며 먹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들었는데 바보스럽고 우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선악과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부모가 아이에게 학교에 내야할 납부금을 1,000원 주었는데 그 아이가 그 돈을 학교에 내지않고 마음대로 과자를 사먹었다 하자. 그 아이가 부모에게 혼나고 매를 맞을 때 돈 때문에 맞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 부모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 욕심과 고집대로 한 것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안에서만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서두에서 요한복음 8장 32절의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소개한 바 있는데, 성경에는 수많은 진리가 있어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요한 복음 8장에서 몇 가지 언급하신 진리와 그에 따르는 자유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로, 요한복음 8장 1~11절에 나오는 진리는 "예수님은 죄인을 정죄하러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죄에서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을 증거한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은 율법적으로 볼 때 정죄받아 마땅한 죄인이다. 그는 재판 절차 없이 당장에 죽여도 할 말이 없는 죄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의 정죄를 물리칠 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다. 앞서 예수님은  요한 복음 3장 17절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혹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3장의 이 약속을 8장에서 이루셨다. 예수님이 인생을 정죄하러 오시지 않았음이 분명한 진리이거늘 필자가 만나본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죄에 대한 정죄"에 사로잡혀 고통하고 있는 모습은 무슨 일인가?

   필자도 17년전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교파에 속하여 날마다 "정죄감" 에 사로잡혀 예배당에만 가면 울고 통곡하는 것이 일이었고, 새벽기도에 가서 탄식 기도로 울면서 소리지르므로 이웃집 이방인들을 괴롭혔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금일의 수많은 눈뜬 소경 목자들은 예배당에서 많이 울고 통곡하는 사람들이 믿음 있는 사람이라고 선전하며 인정하며 가르치고 있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깨닫고 통곡과 탄식하는 심령으로 죄에서 돌이키고,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를 깨달아 구원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필수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역사는 개개인의 일생에 한번 있는 것이다.

   날마다 예배당에 가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고 통곡하는 것은 "정죄하러 오시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 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불쌍한 거짓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의 지도자는 소경이요 거짓 목자임이 분명하다.

   찬송가에도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하고 찬송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이 말씀처럼 주님이 우리를 정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왜 아직도 정죄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는가?

   오! 불쌍한 소경 목자들이여, 소경 양들이여, 정신을 차리라! 정신을 차리라! 말씀을 읽고 말씀으로 돌아가라. 성경에 "영원한 속죄" "완전한속죄"가 분명하게 있거늘 왜 가르치지 못하는가? 왜 믿지 못하는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브리서 10;14).

   그대들은 말씀으로 말미암는 자유를 가르치지 아니하고 그대들의 생각대로 가르치므로 양들을 지옥으로 끌어가고 있지 아니한가!


   둘째 8장 21절에 나오는 진리를 주목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죄인이 주님을 찾다가 죄 가운데서 죽고 그 후에는 주님 곁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요한복음 8:21).

   금일의 수많은 소경기독교인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열심히 따르며 주님 때문에 죽을 준비는 갖추고 있으나 정작 자신의 죄 문제는 분명히 해결하지 못하고 조 가운데서 고민하고 정죄하고 눈물 흘리고 있는 모습은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짝사랑하는 달콤한 가운데 있다가 결국은 멸망의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받아주지도, 받아줄 수도 없는데 꿈 많은 소녀처럼 천국의 소망에 부풀어 있다가 지옥에 던져지는 불쌍한 기독교인들이 우리 시대에 얼마든지 있다. 이글을 읽는 그대도 믿음을 점검해 보기 바란다(고린도후서 13:5).

   이들의 문제는 23절에 있는 대로 세상에서 죄 가운데 난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죄 가운데 있다. 또한 34절에 있는 대로 행동으로 죄를 범하므로 죄의 종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나 행동으로나 죄인이며 죄 속에서 죽어 지옥에 던져지는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죄의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부르고 있는데(마태복음 11:28) 왜 죄의 짐을 예수님께 내려놓지 않고 있는가?

   천국에는 죄가 있는가? 죄 있는 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왜 그대는 세상 죄(당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포함)를 다 지고 가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죄 용서함 받지 아니하는가?

   당신의 죄가 "호리라도 남김없이"(마태복음 5:26) 다 갚아지기 전에는 결단코 지옥을 피할 수 없다. 죄 가운데서 죽은 기독교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지옥에 모일 것이다.

   오! 그대여, 속히 이 지옥에서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라. 건지라. 주님께서 이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나니 주님의 십자가 속죄를 속히 받아들이고 영생의 소망을 가지라.

   예수님은 죄의 종이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이땅에 오셨다. 금일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죄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면서도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천국 갈 것으로 착각하는 모습을 볼 때 필자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35절에 보면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 이며 36절에는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말씀하시고 있다.

   죄의 종에서 자유를 얻으라!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 기록된 불멸의 진리다. 이 불멸의 진리가 인생들을 멸망의 지옥에서 건지는 열쇠요 그대 자신이 이 죄의 종에서 해방되는 것은 44절의 "마귀의 자식" 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식이 아비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그대가 죄에서 해방받지 못하였다면 마귀의 자식이니 마귀를 따라 멸망의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셋째, 8장 58절에 나타난 진리를 살펴보자. 우리를 죄와 멸망의 지옥에서 해방시키는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었던 분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실제 이 말씀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예수님보다 2,000여 년 전에 이 세상에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0년 후에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은 육신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계시다가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며, 그분은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창조된 것이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운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분은 만유를 붙잡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분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창조주께서 그대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분이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서 구원받은 우리의 구원도 영원하다. 구원은 종종 소멸되었다가 다시 받는 것이 아니고 한 번 받으면 영원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보장하신 주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

   이것은 구원을 잃을까 걱정하는 자들을 해방시키는 놀라운 진리이다. 금일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열심히 믿어서 구원을 얻고 그 구원을 잘 보존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이 구원을 잃을까 불안해하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구원은 십자가 속죄로 말미암아 단번에 얻는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보전하기 위하여 고생할 필요가 없다. 영원부터 계신 주님께서 그대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다 용서하심으로 그대를 구원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살아 계셔서 영원히 그대의 구원을 보장하셨다. 그대는 이제 모든 정죄와 지옥에서 완전한 구원을 얻었다.

   오! 그대여, 이 놀라운 진리를 통해서 그대가 자유를 얻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한복음 8:34~36).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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