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 매킨토시의

                           완전한 구원

                                                           

                                      1장

                        영광스러운 진리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롬 15:4)


   이 구절에는 명백한 한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광범위한 구약성경을 통해 자신의 영적분량과 영적 필요의 성격이나 깊이에 따라 교훈과 위로를 얻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신약성경의 구절은 이것입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 

  

   신약성경을 읽을 때와 같이 구약성경을 읽을 때에도, 성경을 기록하도록 성경기자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신 성령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에 의지하며 게속해서 주의 깊게 자신의 생각을 비우고 읽어야 합니다. 상상을 함부로 할 때, 잘못된 생각이나 제멋대로의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유익을 얻기는커녕, 우리 영혼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말씀의 능력을 약화시켜 영적인 성장을 방해할 뿐입니다.


   우리는 또한 로마서 15장 4절에 우리를 위해 기록된 하나님의 뜻, 즉 "무었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 이라는 말씀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말씀의 능력 안에서, 이제 독자들을 여호수아서의 서론 부분으로 인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제시되어 있는 놀라운 교훈들을 함께 상고해보고, 거기에 계시되어 있는 귀한 영적인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만일 성령님이 도우신다면, 요단강변에서 몇 가지 고상한 영적인 교훈들을 배우게 될 것이며, 영적인 성장을 위한 건강하고도 상쾌한 길갈의 체험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 요단강을 죽음에 대한 모형, 즉 신자의 죽음(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는)으로 보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찬송가를 읽거나 들어본 일이 있을 것입니다.


모세가 서 있던 곳에 서서

그가 보았던 곳을 내려다 볼 수만 있다면

요단강물이나 죽음의 찬 물결이

우리를 두렵게 하지 못할 것이라네.


   하지만 이 소절에 나타나 있는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경험은 참된 기독교의 신앙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 영혼에 비추는 참된 빛 가운데서 잠시만 생각해보아도, 이런 요단강에 대한 대중적인 생각이 얼마나 절대적으로 성경적인 통찰력이 부족한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요단강을 건너는 것을 신자의 죽음으로 볼 때, 그렇다면 신자가 죽어서 천국에 가게되면, 그는 전쟁을 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성하고도 영원한 평안과 안식이 있는 곳입니다. 바다에는 잔물결조차 없고, 그 순결하고 거룩한 곳에는 우리를 놀래킬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쟁이 없기에 갑옷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옷이 편하기 때문에 허리띠도 필요 없습니다. 의의 흉배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신성한 의로움이 항상 머물기 때문입니다. 신발도 필요 없습니다. 그 아름답고 행복한 곳에는 거친 길이나 가시밭길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무서운 화살이 날아다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방패 또한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성하고 영원한 구원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투구도 필요 없습니다. 그 복되고 햇빛 찬란한 천국의 어느 곳에도 원수나 악한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검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단강은 신자들이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전쟁이 시작된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광야에서 아말렉과 싸우기는 했지만 그들의 진짜 전쟁이 시작된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부터입니다.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새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단강이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요? 물론 요단강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그것을 건너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반드시 건너야 합니다. 그들이 건너려고 했을 때 그들은 요단강이 마른 땅이 된 것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님께서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셔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영원한 기업으로 인도하는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비스가 산꼭대기에 서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내려다보기만 했듯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누릴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에서도, 또는 신성한 기독교 신앙 전체를 훑어보더라도 찾을 수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치리 아래 있는 경륜에 의해서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모형적으로 볼 때,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기에 율법은 사람들을 영적 가나안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여호수아이신 그리스도는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뿐 아니라 구속함을 받은 무리들이 하늘의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마른 땅으로 통과하도록 길을 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과연 건너갈 수 있는지를 의심하며 죽음의 강둑에 떨며 서 있으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강물은 믿음이 있는 자에겐 마른 땅에 불과합니다. 그 세력은 사라졌습니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주님은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딤후 1:10)" 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영광스러운 진리입니다! 이것을 인해 주님을 찬양합시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 큰 능력을 인해 주님을 경배합시다. 사망의 쏘는 것을 제하시고 사망의 권세를 가진 자인 마귀를 멸하신 주님을, 생명과 빛과 썩지 않음과 영광으로 충만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우리의 온 마음을 다 합시다. 우리의 실제적인 삶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우리는 이제 이 위대한 주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좀 더 자세히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친히 가르치시는 교사가 되어 주시길 빕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삼 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수 3:1-4)


   이스라엘 역사에는 독자들이 깊이 생각해야만 하는 세가지 매우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애굽 땅에서 집문 좌우 설주와 이방에 바른 피, 둘째로는 홍해, 그리고 세 번째로는 요단강입니다.


   이 세 가지 모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모형입니다. 각각은 매우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죽음에는 다양한 측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지고 있는 심오한 비밀을 연구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일은 없습니다. 또한 여기엔 엄청난 비밀이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끄는 다른 일이 있어서도 안됩니다. 이런 비밀은 영원세계에서만 풀릴 수 있는 깊이와 높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 아래서, 성경의 완전한 빛 안에서, 우리 속사람을 강하게 하고 안위를 받도록 해주고, 또한 우리 영혼이 새롭게 되는 역사를 기대하면서 이러한 것들을 상고해 본다면, 우리의 기쁨은 넘치도록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서 모형화된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우리를 가려주는 효력을 보게 됩니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2-13)


   굳이 말씀드릴 필요도 없지만, 죄에 익숙하고 의식적으로 죄를 짓는 영혼에게 장차 올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하나님이 피난처를 예비하셨음을 아는 가장 의미심장한 순간에 이르렀습니다. 성경적인 복음을 합당하게 잘 배운 사람이라면 단 한 순간이라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이런 측면을 과소평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


   이스라엘 민족이 안전한 상태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피에 그 가치를 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피를 볼 때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심판자가 피를 보았습니다. 심판자는 피의 가치를 알았고, 그 집은 심판을 면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에 의해서 죄가 가려졌고 심판을 면했습니다. 즉 피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판단에 의해서 된 일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사실입니까!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 생각 할 때 하나님의 생각보다는 우리의 생각으로 가득차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우리는 그 보배로운 피에 대해 마땅히 귀하게 여겨야 할 만큼 여기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누가 그 피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산정했습니까?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슬프게도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리는데서, 또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애정을 품는 일에서 실패하는 우리를 보면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안전한지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만일 우리의 안전이 비록 지극히 적은 정도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우리의 평가나 또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달려 있거나, 아니면 율법준수 여부에 달렸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매우 심각한 위험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해지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해야만 하고, 또 우리가 그리스도를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만일 이 모든 것이 의롭게 되는 것의 근거가 된다면, 그리고 우리의 안전이 그 요구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달려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율법을 범한 터 위에 서 있는 것보다 우리는 더욱 큰 위험 가운데 처하게 되며, 더욱 공의로운 정죄 아래로 떨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요구가 모세의 율법의 요구보다 더 높은 만큼, 또 기독교 신앙의 수준이 율법의 수준보다 더 높은 만큼, 우리의 상황은 더 나빠지고, 더 큰 위험에 빠지게 되며, 평안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안전이 이같이 더 높은 요구에 대한 우리의 응답에 달려 있다면 정말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러한 요구에 대해 응답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응답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요구에 직면해있는 한, 그리고 우리가 이에 관련되어 있는 한, 우리의 타락과 범죄는 다만 더욱 현저히 드러나게 되며 우리를 정죄하는 정죄는 더욱 공의로운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치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요구에 대한 우리의 응답에 따라서,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감사여부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모세 율법의 공의로운 요구 아래 있을 때보다 더욱 나쁜 상황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우리는 그런 상황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그리고 신성하고도 영원한 은혜에 의해서 구원받았습니다. 은혜에 대한 우리의 느낌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피에 대한 우리의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피 자체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무섭고 두려운 밤에, 여호와 하나님은 "너희가 피를 볼 때에, 피에 대해 너희가 바른 평가를 할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라.' 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기를 원하셨고 그들이 완전하게,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문제를 전적으로 신성한 기반 위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문제를 그들의 손으로부터 취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안전이 단순하면서도 전적으로 피에 있으며, 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 있음을 확신토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직접 피난처를 준비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피난처를 준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누리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따라서 기념할만한 그 밤에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피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과 이제 예수님을 단순히 믿고 신뢰하는 영혼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나 우리의 평가나, 우리의 그 어떤 것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구원받으며, 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 의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피를 바른 좌우 문설주와 인방 안에서 심판으로부터 가려줌을 받고, 심판하는 자의 칼에서 안전하게 되어 불에 구운 어린양을 먹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신자들도 장차 올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완전하게 보호를 받아 모든 위험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안전하게 되어, 심판으로부터 가려줌을 받고 주님 자신의 모든 귀중함 속에서 안전을 누리며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아직까지 장차 임할 심판으로부터 자신이 안전한지에 대한 확신이나 평안을 얻지 못한 독자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다루어온 이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주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 가운데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물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것이지만) 또한 아시길 바랍니다. 회심 후에도 우리는 참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자기 의(義)라는 누룩이 들러붙어 있는 지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우리의 평안과 은혜에 대한 누림을 방해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우리의 행위에 의해 구원받았다는 생각을 버렸을 때 우리는 자기 의를 끝냈다는 착각을 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모든 것 가운데 우리가 살펴본 대로, 우리가 마땅히 생각해야 할 만큼 피의 가치를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느낌 때문에 우리의 안전을 의심하게 되는 것보다 더 교묘한 것은 없습니다. 이 또한 자기 의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끝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없음을 알지만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들로는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명분 때문에 우리에게 무슨 자격이 좀 있지 않을까 하고 우리도 모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은 포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의 피와 그 피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에만 의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피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그 피에 합당한 가치만을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족하십니다. 이 사실이 우리를 만족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네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볼 때, 또 내가 무교병과 쓴 나물과 허리에 띠를 띠고 신발을 신은 것을 볼때에, 내가 너희를 넘어가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확실히 이 모든 것들은 다 합당한 자기 위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 합당한 위치는 안전에 대한 근거가 아니라, 교통의 비밀에 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절기를 지키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보호받은 백성으로서 절기를 지키라는 것이지, 그런 백성이 되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그들이 절기를 지킬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그들이 심판으로부터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더 이상 심판이 없다는 확신을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통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말씀을 믿는다면, 그들은 평안과 안전 가운데서 절기를 기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히 11:28)


   여기에 모든 문제의 깊고도 귀중한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유월절을 지켰던 것은 믿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런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 두렵고 무서운 밤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리카락 한 개라도 심판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인격과 성품을 부인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고, 하나님 자신이 계획한 자신의 복된 치유책을 부인하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상태나 그들이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는 것에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보시는 피의 가치에 의한 것이었고, 하나님 자신의 말씀의 진실성과 말씀의 권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안전이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평안과 안식인지요! 여기에 우리 확신의 견고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하나님의 말씀! 이 두 가지는 신성한 진리로서 참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고, 또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은혜에 달린 것입니다. 또한 다가오는 심판의 문제를 생각 할 때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것이며 다른 것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심판이 이미 집행되었다는 완전한 증거로서 피가 은혜를 베푸는 보좌인 시은좌(the mercy-seat)에 뿌려져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무에 달려 나를 위해 심판을 받았네.

이제 죄인이 주님과 함께 자유케 되었네."


   그렇습니다. 모든 찬송을 그분의 이름에 돌려드립시다. 이제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또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는 모든 영혼에게 하나님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자신의 모든 죄를 사했음을 믿고 의지하는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심판받을 수 없는 것처럼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피로써 보호를 받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안전하신 것만큼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보호하십니다. 이는 심판받아 마땅한 가련한 죄인조차도 믿음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음을 생각할 때, 참으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참으로 복된 사실은 바로 이 방법이 아니면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신자의 안전에 관하여 어떤 문제가 제기된다면 그리스도의 피가 시은좌에 뿌려져 있지 않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 피가 중요치 않은 것이 될 것입니다. 만일 안전이 우리의 상태, 우리의 가치, 우리의 감정, 우리의 경험, 우리의 행함, 우리의 사랑, 우리의 헌신, 그리고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 등에 달려 있다면,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선언은 이제 더 이상 아무 능력도, 아무 가치도, 또한 아무 진실성도 없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바뀌어야 하며, 어둡고 냉랭한 그림자가 천상세계를 뒤덮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피를 보고 또 거기에 추가하여 (.......)을 볼 때에"와 같이 변해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을 갈망하는 사랑스런 독자 여러분, 결단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시켜드렸으며,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단순하게 믿는 모든 영혼을 온전히 보호해주는 보배로운 피에 더하여 아무 것도 더할 것이 없습니다. 깃털하나의 무게만큼도, 머리카락의 넓이만큼도, 심지어는 눈썹의 움직임만큼도 더할 것이 없습니다. 만일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 자신이 만족했음을 선언하셨다면, 죄를 범한 죄인 또한 확실히 만족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수님의 피로써 만족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도 만족될 때,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고, 심판의 문제에 관한한 평안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그리스도께서 이미 죄인을 대신해서 정죄를 다 받으셨는데 어떻게 정죄함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신자가 심판으로부터 면제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을 무효화하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지금까지 구원의 문제(매우 중차대한 문제인)만 다루어왔음을 주목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로부터 자유를 얻는 축복(그 자체로서도 매우 복된 것인)보다 우리를 위해 훨씬 더 많은 다른 축복들이 이루어졌음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비할 데 없는 그리스도의 희생은 심판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건진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멈추어 서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다음과 같은 엄숙하고도 진지한 질문을 독자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당신은 진정 예수님의 피로써 보호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까?'


   사랑하는 독자여, 당신이 분명하게 조금의 주저도 없이 "네 그렇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결코 마음을 놓지 말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피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든가 아니면 영원한 심판의 두려움에 놓여 있든가 이 둘 중 하나에 속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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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제5과 혀의 죄(야고보서 3:1-12)


   3장 1-12절은 혀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1:19. 26; 2:12; 4:11; 5:12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치 노련한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기 위해 그 혀를 검사하고 있는 것처럼 야고보는 어떤 사람의 영적인 건강은 그 사람의 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말의 죄를 가지고 자기 진단을 시작합니다. 야고보는 아마도 "혀를 보라, 미끄러지기 쉽게 축축한 곳에 있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현대의 재담에 동의할 것입니다.


선생의 책임(3:1)


   이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선생이 되고자 하는 성급한 욕망에 대해 경고하면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혀가 특별히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사상은 자기 혀로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는 말은 "선생이 되려는 지나친 야망을 갖지 말라" 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교사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 자기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단지 이러한 사역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일 뿐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그 가르친 것을 행하는데 실패한다면 더 큰 심판을 받게 됩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큰 책임입니다. 선생은 성경에서 알게되는 것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어야만 합니다. 선생은 결코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의 범위는 그 자신이 얼마큼 나아갔느냐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선생은 자신의 형상대로 다른 사람을 낳는데 즉, 사람들을 자신처럼 만듭니다. 혹 선생이 어떤 성경구절의 분명한 의미와 동떨어진 설명을 한다거나 그 의미를 희석시킨다면 그는 자기 학생들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어떤 형태로든 죄를 묵과한다면 그는 거룩치 못한 삶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어느 책에서도 그러한 가르침을 하는 책은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신자의 삶의 모든 면에서 주님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책에서든 가르쳐야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기본 되는 혀의 제어(3:2)


   야고보는 이제 가르침이라는 특별한 사역으로부터 대화라는 일반적인 부분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삶의 많은 부분에서 넘어지기 쉽지만 만일 어느 사람이 자기의 혀를 제어할 수 있다면 그는 말로 인한  여러 가지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사람은 진실로 균형이 잘 잡힌 사람이고, 훈련이 잘 된 사람일 것입니다. 만일 자기의 말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삶의 다른 부분에서도 자제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이를 완전하게 행하신 분이시지만, 여기에는 우리 각자도 훈련을 통해 완전한 자, 성숙한 자, 온전한 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섯 가지 예(3:3-8)


   여기에서는 다섯 가지 말에 대한 모습 또는 혀에 대한 예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혀를 재갈로 비유하고 있습니다(3절). 재갈은 말의 머리를 둘러싼 것으로 그 입을 조이는 마구입니다. 그 조이는 것은 다스리는 것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 조이는 부분은 아주 작은 쇳조각이지만, 사람이 그 쇳조각을 조종하므로 말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혀는 선악간에 삶을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모습은 키입니다(4절). 배와 비교해 볼 때 키는 작은 것입니다. 키의 무게는 배 무게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할 만큼 적습니다. 예를 들어. 퀸 엘레자베스 호의 무게는 총 중량 83,673톤입니다. 그런데 그 키의 무게는 140톤으로 배 총 중량의 1퍼센트의 5분의 1보다도 더 적습니다. 그러나 이 키를 움직이게 되면 곧 그 배의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한 사람이 그 작은 기구를 가지고 그 거대한 배를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히 키가 움직이는 대로 조종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혀가 작다는 것으로 그 능력을 오판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혀는 우리 몸의 아주 작은 지체이며, 비교적 감추어져 있지만 혀는 선악간에 행하는 엄청난 일로 인해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혀와 닮은 세 번째 것은 불입니다(5 ,6절). 성냥불을 부주의하게 버리면 작은 불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이내 산불로 변하게 되어 커다란 재해를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작은 성냥불이 지니고 있는 파괴와 파멸의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요! 역사상 가장 큰 화재 중 하나는 1871년에 있었던 시카고 대 화재입니다. 그 화재는 오래리(O'Leary)부인의 소가 등잔불을 발로 차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 불은 사흘동안 그 도시의 1.5 평방 마일을 태웠습니다. 사망자가 250명이며 집을 잃은 자가 100,000명이었고 재산 피해는 약 1억 7천 5백만 달러였습니다. 혀는 작은 성냥불이나 등잔불과 같지만 사악한 잠재력은 거의 무한합니다. 야고보는 혀를 우리 지체 중에서 "불의의 세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계라는 말은 광대하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도 때로 이 말을 그러한 의미로 사용하는데 예를 들면, 고난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을 때 고난에 찬 세계라고 표현합니다. 비록 혀는 그 크기가 매우 작지만 지니고 있는 죄악의 가능성은 매우 큽니다.

   악한 말의 불꽃이 어떻게 번져나가는지 뉴욕의 브룩클린(Brooklyn)에 사는 두 여인의 대화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한 여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틸리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했던 그 비밀을 다 말했다더군요." 그러자 "틸리가 그러던가요,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라고 다른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첫번째 여인이 "그래요, 나도 틸리에게는 당신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내가 당신에게 말했다고 틸리에게 말하지 마세요."라고 말했습니다.

   혀가 온 몸을 더럽힐 수 있다는 말씀은 어떤 사람이 그 혀로 비방과 욕과 거짓말, 그리고 참람된 말과 저주를 하는데 사용하므로 자신의 온 인격을 더럽히게 된다는 의미로 보여집니다.

   C.G. 채펄(Chappel)은 그의 시편 강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방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하는 것이다... 진흙 던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 손과 가슴에 진흙을 묻히지 않고는 그가 좋아하는 오락을 즐길 수 없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러한 경험으로 더럽혀져 왔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더러워지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나쁘게 말함으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정결함에 대해 더 높이 평가해 주리라는 헛된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무너뜨림으로 우리 자신이 세워질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자이다. 옆집에 다이너마이트를 묻어놓고는 우리 집은 든든하겠지 라고 상상하는 소경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을 해하려는 우리의 시도가 성공하더라도 늘 우리 자신은 더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

   혀는 생의 바퀴를 불사릅니다(6절). 이 바퀴는 출생하면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인간 활동의 전 영역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악한 혀는 사람의 개인 생활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활동도 악에 물들게 합니다. 악한 혀는 "사람의 전 생애 동안 모든 악"에 영향을 미칩니다. 악한 혀는 지옥 불에서 나는 불입니다. 모든 악한 말은 거기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 특징이 바로 지옥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지옥이라는 말은 게헨나(Gehenna)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여기에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약성경 안에서 예수님만 사용하신 단어입니다.

   혀를 비유하는 네 번째 모습은 야생의 길들일 수 없는 동물입니다(7, 8상반절).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 뱀과 해물들은 길들일 수 있습니다. 코끼리, 사자, 호랑이, 맹금류, 뱀, 돌고래, 물고기까지도 길들이는 것이 낯선 일이 아닙니다. 플리니(Pliny)는 그의 시대에 사람들이 길들여 놓은 짐승들을 나열했습니다. 야수 중에서는 코끼리, 사자, 호랑이이며, 새 중에서는 독수리이며, 살모사와 또 다른 뱀들, 물에 사는 생물 중에서는 악어와 여러 가지 물고기들입니다. 사실상 모든 종류의 짐승들이 길들여지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야고보의 논점을 벗어난 것입니다(권위역 성경은 "온갖 종류의 짐승"으로 표현됨-역자 주). 어떤 종류의 짐승이라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지속한다면 사람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로버트 G. 리(Lee)는 "사람들이 거대한 코끼리를 어떻게 하는가? 사람들은 밀림에 있는 코끼리 집을 습격하여 코끼리들을 포획한 다음 그 대부분을 훈련시켜서 통나무를 나르게 한다든지, 무겁게 실은 짐마차를 밀게 하는 등 온갖 일을 시킨다. 또, 푸른 눈의 벵갈 호랑이는 어떻게 하는가? 사람들이 호랑이들을 잡아 가르쳐 놀이 대상으로 만든다. 사납고 두려우며, 강한 아프리카 사자들은 어떻게 하는가? 사람들은 많은 사자들을 포획하여 불타는 둥근 원을 통과하며, 말등에 올라타고, 높은 그네에 앉으며, 배고플 때에도 발 앞에 놓여진 고깃덩어리를 건드리지 않으며, 엎드리고, 일어서고, 달리고, 포효하며 사람의 명령에 순종하며, 채찍 소리에 순종하게 만든다. 나도 수 년 전에 써커스에 한번 갔을 때, 한 굶주린 사자가 그 큰 입을 넓게 벌리고 있는 동안 조련사가 머리를 그 입에 1분 동안이나 넣고 있었던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보아 구렁이를 어떻게 하는가? 엄청난 비단뱀은 어떻게 하는가? 써커스 곡예단의 꽃처럼 연약한 작은 여인들을 보라. 그 징그러운 괴물들이 여인들의 몸을 감고 있지만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는다. 동물 공연장에 가보라. 어떻게 사람이 피에 굶주린 표범과 흑 표범을 해를 끼치지 않게 하며 그 앞에 잠잠케 만드는가. 공연장에 가서 훈련받은 벼룩과, 굶주린 재칼이 유순한 양과 함께 누워있는 것과, 비둘기와 독수리가 한 둥지에 함께 있는 것 그리고 늑대와 토끼가 함께 뛰어 놀고 있는 것을 보라"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야생 동물을 길들이는 데는 성공을 했지만 그 성공이 자기 혀에까지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의 삶속에 이것이 사실임을 인정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육체의 작은 부분을 다스리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 작은 지체를 다스리는 능력이나 힘을 갖지 못합니다.오직 하나님만이 혀를 통제 아래 두실 수 있습니다.

   다음에 야고보는 혀의 특징을 쉬지 아니하는 악으로 말하고 있습니다(8절). 야고보는 이 표현을 "죽이는 독" 이라는 말과 연결하여 우리의 마음에 있는 쉬지 않는 뱀이 가진 아주 해로운 독을 상기시키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한 두 방울만으로도 치명적입니다. 그와같이 혀는 생각에 해를 끼치며, 인격을 죽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문난 잘못들을 얻어듣기 위해 얼마나 자주 험담에 끼어듭니까. 그리고 얼마나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깔보며, 비난하고, 깎아 내립니까. 우리가 행한 그 일로 인해 흘린 눈물과 부서진 마음과 상처 입은 명예에 대해 누가 그 해악을 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우리 자신과 가족에게 가져온 비극을 잴 수 있겠습니까? 복받쳐 오는 내적 비통, 사과해야 하는 부끄러움, 우리 육체의 건강에 끼친 나쁜 영향등. 부모들이 공개적으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는데 빠지므로 그 자녀들도 똑같이 비판적인 정신과 그리스도인의 교제에서 방황하는 것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혀를 잘 사용하지 않으므로 지불해야 할 비용은 너무도 큽니다.

   해결책은 없습니까?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를 험담과 비판, 야박한 말에서 지켜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누구에 대해서든지 애정 없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벧전 4:8).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거스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즉시 그에게로 가서 사랑안에서 그것을 논의하고 함께 기도하십시오(마 18;15; 눅 17:3). 형제들에게 있는 단점을 확대해 보려고 하기보다는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려고 애쓰십시오. 혹 우리가 부정하거나 합당치 않은 말을 하게 된다면 말하던 중간에서 멈춘 다음, 계속하는 것이 유익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하십시오.


항상 선한 것을 말하라(3:9-12)


   다음에 우리는 혀를 선한 목적에도, 악한 목적에도 사용하는 모순에대해 배웁니다. 만물에도 이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는 전혀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잠깐 동안 그 혀로 하나님을 찬양한 다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을 저주합니다(9절). 동일한 근원에서 이렇게 반대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얼마나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까! 그러한 상황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10절). 하나님을 찬양한 혀는 사람들을 해하기보다는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말은 이것이 참된 말인가? 친절한 말인가? 꼭 필요한 말인가? 라는 세 가지 시험을 한 후에 해야 합니다. 늘 우리는 우리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달라고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시 141:3). 그리고 우리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반석이시요 구속자이신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구해야 합니다(시 19:14). 로마서 12:1에 있는 우리의 몸에는 우리의 혀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을 동시에 내는 샘은 없습니다(11절). 혀도 그래서는 안됩니다. 혀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한결같이 선한 것이어야 합니다. 샘에서 나오는 물과 같이 시원케 하는 말을 하고, 무화과나무의 열매처럼 영양이 풍부한 말을 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지 못하고,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지 못합니다(12절). 사실상 한 나무는 오직 한 종류의 열매밖에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혀는 선하고 악한 두 가지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이 구절을 마태복음 7:16-20의 비슷한 말씀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거기서는 우리에게 못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고자 하는 마음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악한 사람은 그저 악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상반되는 열매를 맺는 혀의 사용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샘은 동시에 짠물과 단물을 낼 수 없습니다(12절). 짠물을 내든지 아니면 단물을 내야 합니다. 만물에서 얻는 이러한 교훈들은 우리의 말이 늘 선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이와 같이 야고보는 우리를 말에 관계된 것까지 시련하는 것입니다. 이 단락을 끝내기 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자신에게 물어보도록 합시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그것에 나 자신을 복종시킵니까? 다른 사람들을 뒤에서 비난합니까? 나는 늘 깨끗하고, 유익하고, 친절한 말을 합니까? 나는 저속한 표현인 하나님 맙소사, 제기랄 등과 같은 말을 합니까(영어권 국가에서는 하나님이나 예수님, 천국을 나타내는 말을 약간 변경하거나 그대로 저주하는 말로 사용함-역자 주)? 경건한 집회에 참석한 후에 경솔하게 행동하거나 축구경기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습니까? 성경 말씀을 가지고 말장난을 하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에게 더 큰 감동을 주기 위해 내용을 바꾸거나 과장을 하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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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     성

                               F. 스마아트 &  J.  영


머리말


이 책을 공부하시는 분들에게


   남녀 불구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본분을 깨달아 살아 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에 성경에서 여성에게 교훈 하시는 바를 살펴보기 위하여 이 강좌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1. 여성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은?

2. 여성으로서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격은?

3. 여성으로서의 바람직한 처신과 인간관계는?

4. 여성으로서의 가정, 교회, 사회 및 선교지에서의 역할은?

5. 여성으로서의 은사를 발견하여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활용하는 방안은?


   한 여성의 신앙과 인격이 가정과 교회와 국가의 장래에 끼치게 될 영향을 생각할 때, 이 강좌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고 뭇 사람에게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1992. 3

                                    한국 엠마오 성경학교 교장



                           제 1 과


                           창세기 1,2장

                  목적적으로 창조된 여성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지혜로우신 창조주께서 구상하시고 설계하신 대로 일하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창 1:31). 하나님께서는 그가 만드신 만물이 계획하셨던 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보시고 안식하셨습니다(창 2:2). 창조된 모든 것들이 각각 창조의 목적대로 기능을 발휘할 때 질서와 평화와 만족이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행복하고 충만하게 살아가는 비결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지 또 어떤 일을 하는 데 알맞게 해 주셨는지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맞추어서 하나님이 설게하신 자신의 위치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에 대해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면, 나에 대해서도 목적을 가지고 계심에 틀림없습니다. 나의 첫째이자 가장 분명한 임무는 그 목적을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여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은 최초로 창세기 1장 27,28절의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두가지 성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으며, 아울러 남녀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신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남녀에 무관하게 항상 그들을 축복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보면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신분입니다. 생활과 활동에 있어서도 동등하며, 천성이나 권위에 있어서도 동등한,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대리인인 것입니다.

   한편 창세기 2장을 계속해서 읽어 가노라면 인간의 창조에 관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여성이 의미상 남성과는 별개의 인격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여성을 창조하신 시기와 방법과 목적에 있어서 남성과 어떻게 다른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여자의 창조


   성경은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창 2:7) 되었습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창 2;15~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에덴 동산에서 홀로 외로움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래 처음으로 "좋지 못하다" 고 말쓸하셨던 것입니다. 아담은 과연 사회적 존재이며 사교적 피조물이었기에 누군가와의 사귐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창조된 모든 동물 중에서는 그로 더불어 사귈 수 있는 대등한 존재가 없었습니다(창 2:20).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옆구리에서 뼈와 살을 취하셔서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이처럼 하와는 흙(원어상 Adamah)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남자(원어상 Adam)에게서 지음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 최초의 여인도 최초의 남자와 동일한 체질이었습니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이었던 것입니다(창 2:23).

   이렇듯 여성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수고와 기술의 결정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성을 창조하시되, 남성을 위하여(for Man), 남성에게서(from Man) 창조하심으로써 그 남성의 배우자이자, 동역자이자, 남성을 완성시키는 내조자로 주셨습니다.


          창조의 순서에서 배우게 되는 교훈


   남자를 먼저 창조하시고, 다음에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어떤 중대한 교훈이 담겨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신약 성경은 이 사실에 중대한 의미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 (딤전 2:12, 13)임을 명기했습니다.

   지도적인 권위(headship)에 관하여 다루고 있는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 (고전11:3,8,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지음을 받아 머리가 된 남자의 처신과, 나중에 지음을 받아 권위를 침해해서는 안되는 여자의 처신은 아주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보실 때, 여자가 인격적으로 부족하다든가 무가치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는 단지 사회적으로는 남녀가 평등하지만, 지도적 권위는 우선적으로 남자에게 있음을 가리킵니다.


                 여자를 창조하신 목적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창조하신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위하여 "돕는 배필"이 되는 것입니다. 원어상 '돕는다'는 낱말에는 연약하다거나 부족하다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실제 이 낱말은 구약 성경에 21회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16회는 상류 계급의 사람들에게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하나님께서 친히 '도우신다' 는 경우에도 사용되었습니다(창 49:25; 출 18:4). 그 여인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도록 도우므로써, 세상을 다스리는 아담의 존귀와 영광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창 1:28).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창 2:22) 오셨을 때, 아담은 " 이 여인이야말로 정말 나에게 가장 합당한 자입니다" 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여자를 자녀 생산의 도구로 지으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이는 하와가 아담 자신의 생명과 품성을 함께 갖고 있었으므로, 아담 자신과 더불어 생각과 말과 인격적 교제를 할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지혜의 경륜을 따라 인생을 남녀로 서로 다르게 창조해 놓으셨습니다(마 19:4). 따라서 하나님께서 서로 다른 특성을 불어넣어 주신 이성 간은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도와 주는 보완적인 관계이지, 경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한편 여자의 특권과 자랑스러운 신분을 깨달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아울러 우리는 여자를 창조한 목적이 남자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다시금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여자는 세상에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만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아담은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으며, 여자는 아담의 "돕는 배필" 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여자는 아담의 버금으로 지음을 받았으며, 아담에게서 지음을 받았고, 아담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녀가 없이는 아담도 불완전했던 동시에 아담 역시 그녀에게 보람있는 삶을 이룩해 주는 존재였습니다. 그 여인이야말로 그의 보필자이었고, 그의 온전함을 위해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남녀를 창조한 순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만 아니라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권위의 순서를 나타내 줍니다. 즉 먼저 지음을 받은 자가 인도하면, 나중에 그에게서 지음을 받은 자는 그를 따르며 도와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여자의 "돕는 배필" 로 창조하지 아니하셨고, 도리어 여자가 남자를 돕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질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남편을 어떻게 돕기를 원하고 계실까요?  이 질문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지혜와 명철을 다해서 당신의 남편을 도와 주십시오. 더욱이 당신의 남편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사람이 되고자 할 때 돕지는 못할 망정 장애가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교회에서는 장로들을 존경하며, 장로들에게 협력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우십시오.


                   결  혼


   하나님이 여자를 창조하신 것과 아담이 그 여인을 그의 확실한 반려자로 흔연히 맞이한 사실에 이어, 계속해서 우리는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을 보게 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24)

   결혼은 사회 복지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가장 오래된 제도입니다. 결혼은 기독교의 제도이거나 교회의 성례가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이것은 인류의 최초에 세워진 제도로서, 신앙적 무관심이나 신앙심의 부족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제정된 것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기록된 결혼 지침에서 "떠나라" 는 말과 "연합하라" 는 말에 주의하십시오. 이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결혼에는 배타적인 요소와 지속적인 요소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몸" 이 될 때에 그 남녀는 사회에서 새롭고 영원한 관계를 수립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 새로운 관계의 수립을 위해서 먼저 이전의 관계를 청산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부일처는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경륜입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와 연합하여 일상 생활 전체에서 상호 보완해 줌으로써 마치 한 사람과 같은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결혼이 갖는 배타적인 특징입니다.

   복음서에는 주 예수님께서 창세기 2장 24절의 원리를 다시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4~6절과 마가복음 10장 6-9절을 읽어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뇨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는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다시말해 주님께서는 지속적인 관계를 결혼의 또다른 특성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혼이란 함부로 약속하거나 파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부부 상호 간에 평생토록 지켜야 할 엄숙한 공약입니다.바울도 에베소서 5장 31절에서 창세기 2장 24절을 다시금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바울이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은 이미 말씀하셨던 그 원리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확증해 줍니다.

   이러한 결혼은 일종의 제약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제약이 우리의 자유를 제한 하거나 우리의 행복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들에게 있어서 무엇이 사회를 안정시키고,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이룩하게 할 것인지를 가장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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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01 서론


   요절: 사도행전 1장 8절, 디모데후서 3장 16,17절

   요점:

   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경의 모든 부분은 중요합니다.

   2.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말해줍니다.

   3.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므로 매일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신약성경에는 여덟명의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씌어진 27권의 책들이 있습니다.그 중 다섯 권은 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와(복음서) 초대교회에(사도행전)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21권은 교회 또는 개인에게 씌어진 편지 또는 서신입니다. 마지막권은 장차 될 일들을 말해주는 계시의 책입니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시작과 성장에 대해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에 관해(막 1:1), 또한 주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도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말씀하신 것들을 보게됩니다(마 28:18-20). 바울과 다른 사람들의 편지는 세계 여러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내진 것입니다(고전 1:1, 2).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복음을 확장하고 교회를 시작함에 있어서 어떻게 주님께 순종했는가를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


  이 책의 가장 오래된 이름은 단순히 "행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책을 사도행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바울만이 두드러지고 다른 사도들은 다만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도들 안에서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서 행하시는 실제적인 인격체는 성령님으로 사도행전에서 70번 정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행전은 이 책의 훌륭한 또 하나의 이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성령님을 보내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고(1:8) 이 약속은 몇 날이 못 되어 성취되었습니다(2:4). 베드로가 대제사장들 앞에 섰을 때 성령이 충만하였고(4:8), 스데반도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했을 때(7:55)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당신은 이 책이 성령의 행전임을 말해주는 더 많은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1). 이 구절들과 수많은 다른 구절들은 우리에게 성경을 기록한 여러 사람들에게 그 기록 내용을 말씀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그 기록자들에 관한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누가는 의사였고(골 4:14), 바울과 함께 몇몇 긴 여행에 동행했습니다. 누가는 이 여행에 관해서 말할때, 자신이 바울과 함께 무엇을 했거나 어느 곳을 갔을 때에는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자연스럽게 "그", "그들"이 이것저것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6:10, 20:6, 27:1) .그는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죽음을 당하기 바로 전인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도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이유


   누가는 데오빌로라 불리우는 한 고관에게 보내는 편지로써 누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을 시작하신 것에 관한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행 1:1). 당신은 복음에 관한 이야기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끝나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님께서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행하시고 가르치신다는 것에 대해  데오빌로에게 말해주기 위해서 이 책을 기록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고 그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은 여전히 제자들과 함께 일하고 계십니다. 마가복음 16장 20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함께 역사하사"


   우리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말할 때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주님께서 오늘날에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이끄시고, 인도하시며,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영광스러운 "미완성의 사역"입니다. 누가는 자신의 두번째 책에서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 그리스도의 이러한 사역에 관해서 말해 주려했습니다(히 7:25).


사도행전의 내용 


   우리는 이 사도행전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이 땅에 계속 남아있는 주님의 사람들을 통한 주님의 사역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 이 구절은 신구약 성경의 핵심 구절 중 하나입니다.

   예루살렘은 유대 땅에 위치한 유대인들의 거룩한 도시였습니다. 그 옆의 지방은 사마리아로, 유대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는 현재 그들이 머물러 있는 곳에서(예루살렘), 그 다음에 그들의 고향지역에서(유대)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는 그들을 좋아하지 않을지라도 주위의 이웃들에게(사마리아) 가야했으며, 그후 그들은 전 세계로 흩어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해야 했습니다.마가복음 16장 15, 16절 그리고 누가복음 24장 46-48절을 보십시오. 진정으로 구원받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어디에 있든 주님을 증거하기 바라며, 만일 주님께서 당신을 부르신다면 선교사로서 먼 지역이라도 기꺼이 헌신하여 가기를 기대하십니다.


사도행전의 등장인물


사도행전의 주요인물은 베드로(1-12장)와 바울(13-28장)이지만, 이 책에는 대략 80여명의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중 몇사람은 신약 성경에서 다섯 권의 책을 기록한 요한(3:1), 바울과 함께 이곳저곳을 여행한 젊은 청년 디모데(16:1-3) 등과 같은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었으며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잘 알려진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습니다(예를 들면 20:4). 이들 모두는 복음을 전파하는 위대한 사역의 일익을 감당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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