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올바른 분별


                                         제 5 과

                       율법과 은혜


   진리의 말씀 가운데는 크게 두 흐름이 있는데, 이는 율법과 은혜입니다. 사실상 상호 대조를 이루고 있는 이 원리들은 각각 가장 중요한 두 시대, 곧 유대교 시대와 기독교 시대의 특징을 이루고 있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물론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은혜와 진리가 없었다거나 모세 이전에는 율법이 없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금한 것은 율법이었습니다(창 2;17).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범죄한 그 죄인들을 찾아 가죽옷을 입히신 그 아름다운 일은 확실히 은혜였습니다(창 3:21).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로움이 되신 것을 잘 상징합니다(고전 1:30). 이렇듯 하나님의 뜻이란 의미에서의 율법과 하나님의 선이란 의미에서의 은혜는 언제나 있었으며 이는 성경이 곳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도처에 언급되어 있는 세세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고, 이는 시내 산 때부터 갈보리 때까지의 온 시대를 지배하며, 또한 그 시대의 특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은혜가 갈보리에서 시작되어 그 이후 시대를 지배하며 그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은혜의 시대는 교회의 휴거와 더불어 끝나는 것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시대에서도 결코 이 두 원리를 애매하게 섞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율법은 언제나 은혜와 구분되며 성격에 있어서 이질적이며 또한 역사하는 형태도 이질적입니다. 즉 율법은 하나님께서 금하시고 요구하시는 것이고, 은혜는 하나님께서 권하시고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정죄하는 일을 하고, 은혜는 용서하는 일을 합니다. 율법은 저주하며, 은혜는 저주에서 속량합니다. 율법은 죽이나, 은혜는 살립니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입을 닫게 하고, 은혜는 모든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미하게 합니다. 율법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큰 거리를 만들어 놓지만, 은혜는 범죄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오게 합니다. 율법은 말하기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고 하고, 은혜는 말하기를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라고 합니다. 율법은 말하기를 "너희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지만 은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율법은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믿어라 그러면 산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션교사를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전파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가장 선한 사람도 정죄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가장 악한 사람이라도 값없이 의롭다고 합니다(눅 23:43 ; 롬 5"8 ; 딤전 1:15 ; 고전 6:9-11). 율법은 시험의 제도 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은총의 제도입니다. 율법은 간음한 여자에게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은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합니다. 율법 밑에서는 양이 목자의 손에 죽습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에서는 목자가 양을 위하여 죽습니다.


* 어느 곳에서나 성경은 율법은혜를 예리한 대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율법은혜가 혼합되면 그 양자가 다 손상됩니다. 율법은 그 엄위성을, 그리고 은혜는 그 무료성(無料性)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언급된 율법이란 대체로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그 율법을 뜻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롬 7;23만 유일한 예외입니다). - 저자는 이 문제를 충분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실은 율법이 모세의 율법을 언급하고 있지 않은 예들이 많이 있다. 롬 3;27과 갈 6;2도 그 좋은 예들이다-편집자 註.  때로는 모세 율법이 이른바 도덕 율법(롬 6:14 ; 갈 2;16 ; 3:2), 혹은 십계명(롬 3;19 ; 7:7-12). 그리고 의식의 율법 (골 2;14-17)을 총망라한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의식의 율법 가운데는 성막(출 25장-30장)과, 레위기 중의 제사법(레 1장-7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대제사장과 희생 제물이 되신 주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아름답게 예시하는, 그 신기한 예표가 간직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예표들은 언제나 신령한 사람들의 경탄과 기쁨이 되어 왔습니다.


   시편의 표현들에서도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儀文)의 직(고후 3:7)으로만 국한하여 생각한다면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그리스도나 구속함을 받은 자들에 대해 언급된 것으로 볼 때는 그뜻이 선명해집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2)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


1. 율법과 은혜에 관한 세 가지 오류


   1) 무법주의

   곧 성도들은 이제 어떤 법의 구속도 받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즉, 성도는 자신의 선행없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헤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후로도 더 이상 거룩한 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4)


   2) 의식주의

   이 주장의 원래 형태는 레위기 중에 나타난 모든 규례를 성도가 다 준행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 ."(행 15:1) 오늘날에 와서 이 오류는 교회의 예식이 구원을 얻는 데 필요 불가결하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3) 갈라디아주의

   이는 율법과 은혜의 혼합주의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얼마간의 은혜와 얼마간의 율법으로 말미암는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또 다르게는 은혜로 인해 완전히 무력한 죄인이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오류들에 대해서 갈라디아서는 엄숙히 경고하고, 대응할 수 없는 강력한 논리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2, 3)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6-8)


2. 율법과 은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1) 율법이란?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 7:14)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롬 2:22)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딤전 1:8)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 ."(갈3;12)


   2) 율법을 법 있게 사용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 13절도 보십시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0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 ."(갈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율법은 오직 "무슨 일이 있어도"라고 말합니다. 이는 곧 정죄를 뜻합니다. 또한 율법은 "어찌되었든지"라는 한 단어로 표현합니다. 이는 오로지 순종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고후 3:7) "정죄의 직분"(고후 3: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0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결국 하나님께서 율법 없이 2500년 동안 살아 온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먼저 유죄한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하고, 또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요구에 비추어 자신이 완전히 무력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요 1;17 ; 갈 3:17). 즉 율법은 순전히 그리고 오로지 정죄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3)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갈 3;11)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히 7;19)


   4) 성도는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로마서 6장은 침례가 상징 하는 바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선언한 후(롬 6;1-10) 계속해서 11절부터 성도의 생활규범, 곧 행동강령들을 말씀하고 잇습니다. 그것이 나머지 열두 절의 주제입니다. 특히 14절은 성도가 죄의 지배 곧 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을 받는 대 원칙을 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책은 그리스도의 피로 해결된 것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롬 6;14)


   그런데 이 말씀을 근거로 혹 경건한 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괴악한 무법주의에 빠질까 염려하여 성령님께서는 즉각 이런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진정 거듭난 사람들은 이 말씀에 다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한편 로마서 7장은 율법에서 해방을 받는 또 하나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4-6) 이 말씀에 나타난 율법은 의식의 율법이 아닙니다. 이는 7절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집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갈 2;19) "믿음이 오기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3-25)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밥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줄 우리는 아노라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아니요. . "(딤전 1: 8, 9)


   5) 성도의 생활규범은 무엇인가?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12,13절도 찾아보십시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엡 4:1, 2)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 ."(엡 5:1,2)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엡 5;15,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에 거하리라"(요 15;10)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 14:21)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 3:22, 23)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히 10:16)


   이 원리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법률은 부모에게 자녀를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규정하고, 자녀를 임의로 방임할 경우 처벌할 것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법률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자녀들을 따뜻하게 잘 보호하는 어머니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왜냐하면 법이 이미 어머니들의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율법 판을 증거궤 안에 두도록 명하신 것은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됩니다. 그 증거궤 안에는 율법 판과 더불어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었습니다.<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께서 광야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산 떡이 되심을 상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양자 모두 은혜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율법 판은 속죄의 피가 뿌려지던 금으로 된 속죄소에 의해 가리워져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긴 그 율법을 하나님께서는 직접 보시지 않으시고 피를 통해서 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피만이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하게 변호하며 그의 진노를 가라앉히기 때문입니다(히 9:4, 5).


   현대 율법주의자들은 속죄소와 속죄 피 아래 있던 이 거룩하고 공정하면서도 잔인한 율법 판을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으로 교회안에 세워 놓았습니다.


   6) 은혜란 무엇인가?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딛 3:4,5)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헤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 2:7)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7) 은혜를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 9)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1~13)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7)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 ."(롬 5: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서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6, 7)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은혜는 얼마나 완전하고, 얼마나 포용적입니까! 은혜는 구원합니다. 의롭게 합니다. 세워 줍니다. 열납되게 합니다. 구속(救贖)합니다. 용서합니다. 기업을 줍니다. 하나님 앞에 설 신분을 줍니다. 우리로 담대히 나아가 자비와 도움을 얻도록 은혜의 보좌를 예비하십니다. 은혜는 삶의 태도를 가르쳐 주며, 복스러운 소망을 줍니다. 마지막으로 명심할 것은 이상의 여러 가지 원리들이 혼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 5)


   * 갈 3:16~18 ; 4:21-31도 겸하여 읽어보십시오.


   8) 마지막으로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갈 4:31)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아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18-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말씀하신 것이 도덕의 율법이냐 의식의 율법이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됩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아른 곳은 시내 산이 절대 아니기 때문입니다.


* 죤-번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도는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와 같이 완전하고 복된 의로 가리워 졌다. 그래서 뇌성을 발하는 이 시내 산의 율법도 그에게서는 아주 미미한 허물도 발견하지 못한다. 이것을 가리켜 율법을 넘어선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혹 불신자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그가 이미 범한 그 거룩하고 공정한 법이 선고하는 그 참된 선고에 마음을 기울이기 바랍니다.


   ". .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2, 23)


   그러나 그러한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약속하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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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기복신앙으로 소경된 기독교인들이여!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 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8).


   "나는 집에 너무 우환이 많고 살림이 어려워 예수를 믿었으나 별로 나아진 것이 없어 그만 두었습니다."

   "나는 예수 믿고 건강 축복, 물질 축복, 가정 축복 받았습니다. 예수님 참 감사하지요."

   이와 같은 이야기는 필자 뿐 아니라 독자들도 주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금일의 기독교를 병들게 하는 기복신앙, 즉 육신적 축복에 매달려 있는 기독교인들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기복신앙". 보이지 아니하는 영생의 소망과 구원의 확신을 추구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 소망에 빠져서 여기에만 매달려 하나님의 근본 뜻을 저버린 길 잃은 양떼들이 여기서 헤매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잃어버린 수많은 방황하는 양떼들이 겉으로는 열렬하게 하나님을 부르지만 실제는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이 지옥으로 향하여 가고 있는 기복신앙에 잡혀 있는 불쌍한 거짓 기독교인들인 것이다.

   이 기복신앙의 실제문제를 성경에서는 수없이 많이 다루고 있다. 그중 요한복음 6장에 보면 기복신앙에 잡혀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슬프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울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15절).

   에수님을 임금 삼으려는 자들의 중심 뜻은 무엇인가?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인 놀라운 기적을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이 기적을 본 사람들은 이 놀라운 능력 있는 분을 왕으로 모시면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키는 문제 뿐 아니라 백성들의 민생문제를 능히 해결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육신적으로 아무 걱정 없이 배불리 먹고 평안히 살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왕 삼으려 한 것이다.

   이들의 마음을 읽은 예수님은 이들의 청을 당연히 거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4절에 보면 그들이 끈질기게 예수님을 찾아 따라온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주셨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한복음 6:26).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통하여 표적을 베푸신 경우가 신구약에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위엄을 드러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소망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 분명하다. 표적이 표적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거나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만 있을 때 이것이 기복신앙이 아닌가?

   예수님이 26절의 이 말씀을 하신 것은 표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그분을 믿고 그분을 통하여 영생의 소망을 갖기를 원하셨으나 그들이 떡을 먹는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육신적인 떡보다 생명의 떡이 되신 자기 자신을 깨닫게 하고자 노력하셨으나 그들이 기복신앙에만 머물러 있어서 알아듣지 못함을 볼 수 있다. 결국 예수님은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고 선포하시기에 이른 것이다. 육신적인 축복에만 매달려 있는 무리들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충격이 되었으면 대부분 물러갈 수밖에 없었겠는가(요한복음 6:66).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하고 질문하심에 대해서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하고 놀라운 답변을 하므로 오늘까지 성도들의 갈 길을 예시하신 훌륭한 가르침이 되었다.

   여기까지의 상황은 영생을 가르치고자 원하시는 주님과, 보이는 육신적 축복에만 매달려 있는 우매한 유대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잘 묘사해 준다.

   독자여, 이와 같은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있는 큰 문제점 중의 하나가 드러났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오늘날 주님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이 육신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과 받을 복을 위하여 열심을 내고 있지 않는가?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몇 년씩 하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 믿음(정성)이 가상하여 하나님이 복을 내리시니 부디 새벽기도 열심히 하여 하나님 앞에 복 받기를 소망하라는 가르침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참여하고 있는가?

   참고할 것은 필자가 새벽기도를 부정하거나 무조건 질타하는 뜻이 아님을 알기 바란다. 새벽에 일어나 성경보고 기도하고 혹은 예배당에서 새벽집회를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정성을 들여 기도하면 하루가 기쁘고 그렇지 아니하면 심령이 평안을 잃는 샤머니즘적 신앙은 지적 받아 마땅하다.

   우리네 부모님들은 옛날부터 새벽마다 물 한 그릇 떠놓고 각종 신에게 빌었다. 그런데 이것이 새벽기도로 변하여 기독교에 침투하여 기독교를 병들게 하고 있다. 필자가 선교사들을 통해서 혹은 여행 경험을 통해서 아는 바로는 새벽마다 예배당에 모여 건물이 떠나갈 듯 통곡을 하면서 울어대는 교회는 대한민국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기독교 문화는 확실히 잘못 발전되었다.

   헌금을 드리는 문제도 그렇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경우 복받기 위해 헌금을 드리는가? 헌금을 드리는 것도 하나님께서 영육간에 베푸신 은혜를 깨닫고 감사와 찬양의 표시로 드려야 마땅하거늘 하나님께서 크게 보상해 주심을 생각하고 헌금을 드린다면 이것이 기복신앙이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악한 죄인이었으나 양심의 악을 깨닫고 구원을 받아 주님께 찬양이 넘치므로 진정한 헌신이 있게 되는 것이다.

   기복신앙의 예를 더 들어보자.

   어떤 신앙잡지에서 "나는 이렇게 구원받았다"는 간증을 읽어본 적이 있어 여기 줄거리를 소개한다.

   "다리 관절염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여 양약과 한약으로 수없이 치료하였으나 소용이 없고 다리는 계속 더 악화되기만 하였다.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을 만큼 병세가 악화되고 있었다. 고민으로 나날을 보내며 슬퍼하고 있는데 어느 날 친구의 안내로 기도원에 갔다. 평생 처음으로 교회에 가보는 것이라서 처음에는 어색하였으나 며칠 있으면서 찬송을 배우고 말씀도 배우니 조금씩 적응하는 것 같았다. 이제 제법 울면서 기도하기도 하였다. 다리를 고쳐달라고 울부짖어 보기도 하였다. 며칠을 보낸 후 철야기도를 하는데 새벽 2시쯤 되었을 때 귀에 들리는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으면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나 갑자기 불덩어리가 머리로부터 온몸을 통과하는 것 같았는데 그후 다리가 씻은 듯이 깨끗이 나아버렸다. 얼마나 주님께 감사드렸는지 모른다. '나를 구원하시고 은혜를 주신 주님께 눈물로 감사찬송 드립니다. 아멘'."


   이것이 간증의 전부이다. 여기에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믿어졌고 이렇게 구원받았다는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십자가가 빠진 구원, 보혈이 빠진 속죄, 이것은 양식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단번에 분별이 가는 잘못된 간증이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어려움이나 물질의 어려움, 직장의 어려움을 기도하는 자체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신앙의 순서가 근본적으로 틀렸다는 것이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지적하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한복음 6:63)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십자가에 죽으심도, 부활하심도, 다시 오심도 모두 영적인 문제, 즉 영혼의 문제를 위한 것이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한 멸망의 심판을 면하게 하고 영생의 기쁨에 참여하게 하심이 주님의 뜻이다.

   진실이 이러함에도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영생의 문제, 영혼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교회에 나가는 이유를 질문하면 대부분 많은 사람이 육신의 복을 위하여 나간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영혼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하여도 그것은 이차적인 문제요 거기에는 아주 적은 관심을 갖고 있을 뿐이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람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슬퍼하며 탄식하신 말씀이 있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요한복음 5:40).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 앞에 오는 사람은 영생을 얻을 뿐만 아니라 영생의 기쁨을 이 땅에서부터 누리게 된다. 요한삼서 2절에도 이 문제를 분명하게 다루고 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구하며 하나님을 따를 것인가에 대한 순서를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우리의 신앙의 최고 목적은 "영혼의 잘됨" 에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 영혼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누가복음 12:6~21).

   "범죄하는 영혼은 죽으리라"(에스겔 18:4) 하신 말씀처럼 죄를 범한 영혼은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 던져질 수밖에 없다. 천국과 지옥의 길을 알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으로 던져질 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로마서 5:1)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다.

   인간으로서 죄를 짓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 거룩한 자도 하나도 없다(시편 14:3).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말씀하셨다(마가복음 10:18). 그런데 더럽고 형편없는 죄인이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를 용서받아 의인이라는 신분을 얻었다(로마서 3:24)는 것은 천지를 진동시킬 놀라운 사건이다. 이제는 (신분상)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된 것이다. 베드로는 이것을 "신의 성품에 참여"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베드로후서 1:4). 바울은 이 구원을 가리켜 "큰 구원" 이라고 놀랍게 표현하고 있다(히브리서 2:3). 영혼구원의 문제는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천하를 주고도 그 값을 계산할 수가 없다(마태복음 16:26).

   생각해 보라. 한번 가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하고 무서운 멸망의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 영원히 눈물과 고통과 이별이 없는 영생의 복된 소망 가운데 거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일인가?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요한복음 3:16). 예수님의 오심으로 구원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분의 죽으심으로 모든 죄가 용서되어 의인이 되었으며, 부활하심으로 이 사실이 확증되었고,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구원의 약속을 확실히 받은 자로서 우리를 데리러 오실 때까지 이 세상에서 육신과 함께 잠시 기다리고 있는 나그네 인생이다(베드로전서 1:7)

   잠시 기다리는 동안 육신에 필요한 것이 있기에 영생을 얻은 자녀에게 육신적 필요를 따라 하나님이 육신적인  복을 공급하신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먼저는 영적인 복이고 나중은 부수적으로 육신의 복이 필요하다. 그래서 요한 삼서에서도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하고 순서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 독자여! 부디 권고하노니 그대의 영혼의 문제는 확실히 해결을 보았는가를 생각해 보라! 필자가 만나본 독자들 중에는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하나 실제 말씀 앞에서 볼 때 주님과 전혀 관계없는 거듭나지 못한 쭉정이가 너무나 많았다. 이글을 읽는 그대는 부디 쭉정이가 아니길 바란다.

   그대는 하나님을 믿되 기복신앙으로 하나님을 믿은 것은 아닌가? 분명히 거듭난 경험도 없이 기도응답 몇 번 받았거나, 병 고침을 경험했거나, 기적을 체험하였다고 "그것으로 천국에 가겠거니" 하고 착각하지 말라. 그대의 영혼이 십자가 속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명히 "연결된 사실" 이 없다면 그대의 신앙은 기초 없는 집이요, 물 없는 구름이며, 열매없는 가을나무이다.

   주님은 분명히 열매로 판단하신다고 말씀하셨으니 그대의 영혼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새 생명으로 변화된 성령의 열매가 있기를 바란다. 그대의 육체적 욕구를 위하여 교회에 나간다면 그대는 기복신앙에 잡혀 있음이 분명하거니와 성령과 진리의 인도하심으로 거듭난 성도라면 그대에게는 영생의 소망이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6:53).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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