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에는

                                                              H. A. 아이언사이드


                                                  3장


                              영과 혼과 몸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신성한 한 분 하나님이자, 또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으로, 곧 그 위엄과 능력과 모든 속성이 동등하신 영광스러운 세 위격으로 존재해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가리켜 "삼위일체 하나님" 이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 자체는 성경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이 사실은 성경 전체에 걸쳐서 반복되어 있으며, 특별히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침례식에서 신조와 같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Father, and dof the Son, and of the Holy Ghost) 세례(침례)를 주노라"는 문구에서 확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비록 세 분의 위격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복수형인 이름들(names)이 아닌, 단수형의 이름(the Name)이 사용 된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세 분이 합하여 한 분이신 것입니다(요일 5:8 참조).

   사람도 우리가 삼위일체라고 부르는 세 부분으로 된 한 인격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은 곧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된 존재입니다. 몸만으론 사람이 아닙니다. 혼만으로도 사람이 아닙니다. 영만으로도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영과 혼과 몸이 함께 사람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쓴 목적은 이 각각의 의미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바가 무엇이냐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몸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몸은 인간의 물질적인 부분이며, 물질적인 창조세계와 가장 가까운 부분입니다. 몸은 속사람이 거주하는 집입니다. 몸의 현재적인 상태는 노화와 죽음에 의해 좌우되고 있지만, 장차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을 것이며, 그때에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몸이 모두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부활의 몸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고, 그 몸으로 행한 바에 따라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 자는 천년이 지난 후에 부활하게 되며,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서게 되고, 그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첫 페이지로 돌아가 보면, 태초에 우리가 어떻게 삼위일체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장인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세 번이나 하나님이 "창조하셨다"(created)고 말씀하신 사실을 보게 됩니다. 1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물질(matter)의 시작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물질의 두 번째 창조에 대해서 발견하지 못합니다. 우주의 모든 물질은 바로 여기 1절의 창조시에 형성되어 나온 것입니다.


   21절에서 우리는 두 번째 창조 행위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여기 "움직이는 모든 생물"은 "살아있는 혼(living soul)을 가진 모든 존재"로 번역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명의 시작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그 자체로 죽은 물질로부터 저절로 생성된 생명 따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죽어있는 것과 살아있는 존재 사이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제아무리 진화과정을 겪는다 해도 죽은 것을 살아있는 것이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존적인 생명이 우주 속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 새롭게 창조하시는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게 될 혼은 하등 동물과 인간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부분입니다. 혼은 욕구, 감정, 그리고 본능의 능력을 가진 자연 생명입니다. 동물의 혼은 몸이 죽을 때 같이 죽게 됩니다. 반면에 인간의 혼은 영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수년 전에 저는 캘리포니아의 로스 가토스라는 마을에서 열리는 집회가 있어서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몰몬교도들도 거대한 천막을 치고 수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그 수양회 장소를 지나다가, 한 쪽에 세워둔 매우 인상적인 간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매우 큰 글자로 다음과 같이 써있었습니다.


   "10,000불 상금을 드립니다."

   "성경에서 불멸하는 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절을 찾아내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미국 금화로 10,000불을 드립니다."


   저는 강사를 만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의자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밖에 있는 간판을 보고 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꽤나 흥미 있어 하면서 "그래요? 10,000불을 벌고자 왔단 말이죠?" 라며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이 사용한 용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성경 어디에도 불멸하는 존재인 혼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고 인정하는 셈이네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이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묻기를 '성경은 불멸적인 혼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인간의 혼이 멸한다고 믿으시나요?"라고 물었습니다.

   "물론입니다. 성경이 불멸하는 혼에 대해 말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혼은 멸해서 없어지는 것이지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로 하여금 성경이 불멸적인 혼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소멸하는 혼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직면하도록 했습니다. 성경이 소멸하는 혼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혼이 멸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합리적임을 그에게 지적하며, 그의 견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하기를, "제가 만일 몸이 죽을 때 혼은 결코 죽지 않음을 언급하고 있는 성경구절을 보여드린다면 제게 10,000불을 주시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당신이 먼저 제기했던 불멸하는 혼에 대한 문제는 결국 몸은 죽어도 혼은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함으로써 해결 될 것 같은데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즉시 당황해하며 "그것은 해석상의 문제입니다"라고 말했고, 나는 10,000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감을 예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본문을 제시했습니다. 당신도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이에 대해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 주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몸이 죽을 때 혼은 죽을 수 없다는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논의해온 "불멸하는 혼"에 대한 충분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몰몬교도는 잠시 주춤하더니, 침묵으로 10,000불 주기를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멸하게 될", "죽을" 혹은 "불멸하는"과 같은 단어들은 오직 몸과 관련해서만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주께서 하늘로서 재림하실 때까지 살아있다면 이 죽을 몸은 죽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다시 창세기 1장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세 번째 창조행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27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는 구절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만일 인간보다 하등 동물로부터 진화한 것이 사실이라면, 왜 이와 같은 독특한 창조행위가 필요했겠습니까? 사실 하나님과의 교통이 필요 없었다면 몸과 혼만을 소유한 피조물은 생각하고 사유하는 기능을 가진 영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으뜸이 되게 하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당신이 스가랴 12장 1절을 읽어보면,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고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spirit)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라는 말씀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하늘을 펴시고 땅의 터가 놓여진 위대한 창조 역사 뿐 아니라 인간의 영이 지어진 일이 나타나 있음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그 일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사람 속에 있는 영이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이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구절은 고린도전서 2장 1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사람의 영은 지성의 자리(seat of intelligence)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아는 것은 영의 기능에 의해서입니다. 이성적으로 분별하는 것도 영의 기능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도 영이 하는 일입니다. 몇 성경 구절들을 통해 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로마서 8장 16절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그리고 로마서 1장 9절의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또 욥기 32장 8절의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등등.

   여기 보면 우리의 이해나 깨닫는 일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영에 의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잠언 18장 14절의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는 말씀과 잠언 20장 27절의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영을 통해 사람의 내적 깊은 부분을 밝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에 당신의 진리의 말씀으로 교통하심으로써 우리 존재를 밝히십니다.

   그밖에 더 많은 말씀을 인용할 수도 있지만, 이상의 말씀들로도 충분히 요점을 강조했다고 봅니다.

   생각하는 일도 영의 기능입니다. 여러 가지 일들을 놓고 비교. 분석하는 일도 영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영은 바로 영이신 하나님이 자기 마음을 전달해주는 부분입니다.

   임종시에 영은 몸을 떠나게 됩니다. 사실상 이것이 바로 죽음(몸과 영의 분리)입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서 우리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는 구절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짐승은 죽을 때, 그 몸과 연결되어 있던 혼도 따라서 죽게 됩니다. 즉 존재의 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에는 죽을 때,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건 모두 다 그 영이 몸을 떠나게 됩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the spirit)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지상의 집(몸)은 빈 채로 남겨지고 영은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며, 그 지으신 하나님과 만나게 됩니다. 이일은 구원받은 사람이나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에게 임하는 일입니다. 두 부류 모두 다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해야 합니다.


   물질주의자들은 영이란 단순한 생명력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호흡", "바람", 그리고 "영"이 모두 같은 단어라는 점을 들어서, 그 단어가 사용된 곳마다 무조건적으로 "호흡"이라는 말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이라는 단어가 영어에서 만도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러한 다양한 의미들을 무시한채 기계적으로 적용해서 한 단어만으로 사용한다면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a man of spirit"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과감하고 열정적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a spirit"이라고 할 때는 유령이나 혹은 귀신을 가리킵니다. 문맥이나 전후관계가 그 단어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the spirit of man)이라고 할 때, 그것이 단순히 사람의 호흡(the breath of man)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결정하는 최상의 방법은 우리 자신으로 바꾸어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예로 든 것처럼 다양한 본문 속에서 "호흡"이라고 하는 단어로 바꾸어보고, 그 의미가 잘 통하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즉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호흡과 혼과 몸이...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고 할 때 그 의미가 잘 통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우리의 호흡이 흠 없게 보전되기를 사모하고 있으며, 여기서 사도 바울도 그러한 의미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요?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호흡 외에는 누가 알리요?" 우리 가운데 이성을 가지고 사리를 분별하는 호흡에 대해 들어본 분이 계신가요? 또한 "사람의 '호흡'은 여호와의 등불이라"는 말은 어떻습니까? "성령이 친히 우리 호흡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와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호흡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

   이렇게 하는 저의 의도는 이러한 것을 즐기거나 그저 웃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허무한 이론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그들 스스로 밝히 보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람 속에 있는 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혼을 영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음의 구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영과 혼 사이에 접속사 "...과"(and)가 사용됨으로써 이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을 구분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둘이 분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둘은 사는 동안, 혹은 죽음에 처해서도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영은 인간 존재의 최고한 부분입니다. 즉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영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혼은 인간 존재의 좀더 낮은 부분으로 몸과 영 사이를 연결하는 부분입니다. 단순한 자연생명에 속한 부분이 아니라, 물론 그런 면도 있지만, 그 이상의 부분입니다. 혼은 사람의 감정적인 본성이 자리하고 있는 부분(seat of emotional nature)입니다.

   또다시 몇 가지 성경말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다음의 말씀은 하나님도 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my soul)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0:38).

   또 다음 구절은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우리 영혼을 구원함(saving of the soul)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9)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혼은 우리 혼의 구원을 바라고 계십니다. 즉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적인 본성이 그분 자신의 속성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 일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우리 몸의 정욕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서 우리는,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the soul)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권면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룬 우리 혼은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게 되고, 이 일을 통해 우리 혼은 그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누가복음 1장 46절에서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my soul)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my spirit)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이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혼은 고통을 느낍니다. 누가복음 2장 35절은 " 또 칼이 네 마음(soul)을 찌르듯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07편 26절은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soul)이 녹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 마음(soul)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창 42:21)습니다. 에수님도 "내 마음(soul)이 민망하니" 하고 말씀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는 심한 고통을겪으시면서 "그 영혼(soul)을 속건제물 드리"셨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poured out his soul) 사망에 이르렀고,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으셨습니다(사 53:12 참조).

   혼은 사랑합니다. 아가서에서 신부는 "내 마음(soul)에 사랑 하는 자를 너희 보았느냐"(아3:3)고 묻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무엘상 18장 1절에서 "요나단의 마음(soul)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혼은 미워합니다. 사무엘하 5장 8절은 "다윗의 마음(soul)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혼은 슬퍼합니다. 욥기 14장 22절은 "자기의 마음이 슬플 뿐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혼은 무언가 하고자 갈망합니다. 욥기 23장 13절은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이라고 말씀합니다.

   혼은 사모합니다. 시편 119편 20절은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라고 했으며, 시편 42편 1절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했고, 그리고 시편 63편 1절은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시간이 허락된다면 더 많이 인용할 수 있는 말씀들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모든 말씀들은 영이 지적인 본질의 자리인 것처럼 혼이 감정적인 본질의 자리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몸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크게는 감정적인 존재이며, 혹은 인간의 구조상 거의 전체를 차지하도록 조직되었습니다.

   인간은 독특하게 혼이라고 불리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생령"(living soul; 살아있는 혼- KJV 참조)이 된지라"(창 2:7). 누가복음 12장 20절에서 주님은 어리석은 부자에게 "오늘밤에 네 영혼(soul)을 도로 찾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반면에 요한게시록 6장에서 요한은 "죽임을 당한 영혼(souls)들이 제단 아래 있"는 것을 환상 가운데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가리켜, "구원받은 혼"과 잃어버린 바 된 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적으로 합당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이 3층으로 지은 집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1층 또는 지하실은 몸에 해당합니다. 2층 또는 일할 수 있는 공간은 혼에 해당합니다. 교제와 연구의 공간 또는 다락방인 3층은 영에 해당합니다. 무죄한 상태에서 인간은 영을 통해 하나님과 대화하며, 완전무결하신 성령님과 교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타락 후에 도덕적 지진을 경험한 인간은 마치 큰 충격을 받은 집과 같이 3층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혼적인 사람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자연적 혹은 육적"(natural and sensual)이라는 단어는 실제로는 "혼적"(soulish)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혼이라고 하는 단어에서 취한 형용사입니다.


   인간이 비록 타락했을지라도, 영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며, 다만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엡 4:18) 것입니다. 그 영이 합당한 위치로 회복되기 전까지는 어떠한 활동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모든 기능이 타락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영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고, 죄로 인해 더럽혀진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이에 대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혼도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부패되었습니다. 인간은 이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몸도 세상에 죄가 들어온 직접적인 결과인 질병과 질환에 의해 약화되었습니다. 인간은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으며,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은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리 떠난 절망적인 멸망 상태에 처한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이 타락하고 패역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을 타락하기 이전 아담의 상태로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타락된 인간이 결코 알 수 없었던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이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의 인격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셨을 뿐 아니라, 참으로 인간의 영과 혼도 취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참으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신성한 로고스, 영원한 말씀이 그리스도의 몸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영과 혼이 우리 몸과 맺는 관계와 같은 동일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신성이 거하시기 위한 장막으로서 한 몸을 취하셨을 뿐 아니라, 신성과 하나로 연합된 완전한 인성도 취하셨는데, 곧 인성과 신성 이 두 가지 본성이 완전히 연합된 한 분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인간 혼을 취하셨다는 것은 이미 인용한 성경본문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 주 예수님은 "내 마음(soul)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다른 곳에서는 "심령(spirit)에 민망하여"(요 13:21), 또는 "예수께서 성령으로(in spirit) 기뻐하사"(눅 10:21)로 기록되었고, 예수께서는 그 영혼이 돌아가실 때 큰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spirit)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말씀하신 후 운명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자신의 전체, 곧 몸과 혼과 영을 우리의 타락한 인성을 대신하여 제물로 드리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속을 위한 속전을 지불하기 위해 필요했던 속죄하는 피는 죄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은 인간의 피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렸던 그 몸은 거룩하고, 정결한 인간의 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혼이 겪었던 고통은 우리도 느낄 수 있는 인간 혼의 고통이었지만, 그분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 속에서 고뇌하며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다정다감했던 감정과 정서들조차도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실 때, 극도로 상하고 찢겨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압도하는 어두움도 물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두려움으로 가득하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며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희미하게나마 느낄 뿐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영도 우리를 대신하여 완전히 희생이 되신 것입니다.


   한 영혼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의지할 때, 전에는 멸망과 영적 파산 가운데 있었던 그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게 되며, 모든 부분에서 이 생명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각성된 영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며, 그 사람은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졌습니다. 집이 새로 개축되었을 뿐 아니라, 그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영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은 이제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과 영적인 것들을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말씀에 의한 분별도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혼도 구원받았습니다. 그 감정과 정서도 깨끗케 되었고, 그 마음의 갈망과 원함도 이제는 악하고 세속적인 것에서 돌이켜, 거룩하고 천국에 속한 것들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몸만이 변화되지 않은 채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새로운 생명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 된 이 육신의 장막을 타락으로 이끌었던 육체적인 욕망을 억제시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주께서 우리의 이 낮고 천한 몸을 변화시켜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변케 해주실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완전한 구원, 곧 영과 혼과 몸이 다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 육(natural)의 몸을 벗고, 신령한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4절을 읽어보면, 제가 생각하기에 물질적인 몸과 비물질적인 몸이 대조되어 설명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 바울의 생각이나, 성령님의 의도는 아닙니다. 육의 몸은 우리 혼에 합당한 몸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육"(natural)이라는 단어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혼"(soul)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형용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혼적인 몸으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에 우리가 입게 될 몸은 영의 몸(bady of spirit)이 아니라, 신령한 몸(spirituak body)을 입게 될 것이며, 그 신령한 몸은 영에게 합당한 실제적인 몸인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영은 간절히 원하고 바라지만 육신이 약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 몸과 영은 완전한 조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아질 때, 이것이 우리의 완전한 구원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연약함과 죄로 인한 싸움이 있지만

   그때는 육신과 지각을 속이는 일이 없다네.

   우리가 생명의 주를 뵙게 되는 그때,

   그 은혜의 모든 경륜이 밝히 드러나리라."


   우리는 온전히 그리스도와 같아질 것이며, 영원히 그분과 같은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되고, 그분의 합당한 배필이 될 것입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또한 성경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우리 전체 곧 영과 혼과 몸이 그리스도의 이루신 사역의 완전함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 속에 서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 없이 나타나게 될 때, 바로 그때에 우리의 구원은 완전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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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자유주의로 하나님을 떠난 기독교인들이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1)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여러 측면에서 조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중에  예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자유, 즉 참된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다. 예수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자유의 본질이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언급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참 자유는 진리를 통하여 나는 것이며, 진리 안에서 나는 것이다. 진리를 벗어난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의 본질과 방종의 모습을 고찰하여 우리의 신앙의 지표로 삼고자 한다.

   진리는 무엇인가? 우선 쉽게 말하여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 조상 아담은 에덴에서 범죄하기 이전에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았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자유를 주셨던 것이다. 그들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할 자유를 하나님께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고 따먹은 후의 결과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0).

   그들은 말씀 안에서 자유를 받았다. 그들은 말씀을 통하여 자유를 받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국민들은 자유가 있다. 그들은 자유를 보장받고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나라 법의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이다. 법을 벗어나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는 것은 방종이지 자유가 아니다. 아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님이 주신 말씀(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를 부여받은 것이다.

   어떤 종파에서는 선악과 자체에 무슨 독이 있는 것처럼, 혹은 그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을 들었는데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심지어 어리석은 종파의 지도자는 복숭아가 선악과라고 하며 먹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들었는데 바보스럽고 우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선악과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부모가 아이에게 학교에 내야할 납부금을 1,000원 주었는데 그 아이가 그 돈을 학교에 내지않고 마음대로 과자를 사먹었다 하자. 그 아이가 부모에게 혼나고 매를 맞을 때 돈 때문에 맞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 부모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 욕심과 고집대로 한 것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안에서만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서두에서 요한복음 8장 32절의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소개한 바 있는데, 성경에는 수많은 진리가 있어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요한 복음 8장에서 몇 가지 언급하신 진리와 그에 따르는 자유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로, 요한복음 8장 1~11절에 나오는 진리는 "예수님은 죄인을 정죄하러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죄에서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을 증거한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은 율법적으로 볼 때 정죄받아 마땅한 죄인이다. 그는 재판 절차 없이 당장에 죽여도 할 말이 없는 죄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의 정죄를 물리칠 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다. 앞서 예수님은  요한 복음 3장 17절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혹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3장의 이 약속을 8장에서 이루셨다. 예수님이 인생을 정죄하러 오시지 않았음이 분명한 진리이거늘 필자가 만나본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죄에 대한 정죄"에 사로잡혀 고통하고 있는 모습은 무슨 일인가?

   필자도 17년전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교파에 속하여 날마다 "정죄감" 에 사로잡혀 예배당에만 가면 울고 통곡하는 것이 일이었고, 새벽기도에 가서 탄식 기도로 울면서 소리지르므로 이웃집 이방인들을 괴롭혔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금일의 수많은 눈뜬 소경 목자들은 예배당에서 많이 울고 통곡하는 사람들이 믿음 있는 사람이라고 선전하며 인정하며 가르치고 있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깨닫고 통곡과 탄식하는 심령으로 죄에서 돌이키고,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를 깨달아 구원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필수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역사는 개개인의 일생에 한번 있는 것이다.

   날마다 예배당에 가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고 통곡하는 것은 "정죄하러 오시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 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불쌍한 거짓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의 지도자는 소경이요 거짓 목자임이 분명하다.

   찬송가에도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하고 찬송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이 말씀처럼 주님이 우리를 정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왜 아직도 정죄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는가?

   오! 불쌍한 소경 목자들이여, 소경 양들이여, 정신을 차리라! 정신을 차리라! 말씀을 읽고 말씀으로 돌아가라. 성경에 "영원한 속죄" "완전한속죄"가 분명하게 있거늘 왜 가르치지 못하는가? 왜 믿지 못하는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브리서 10;14).

   그대들은 말씀으로 말미암는 자유를 가르치지 아니하고 그대들의 생각대로 가르치므로 양들을 지옥으로 끌어가고 있지 아니한가!


   둘째 8장 21절에 나오는 진리를 주목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죄인이 주님을 찾다가 죄 가운데서 죽고 그 후에는 주님 곁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요한복음 8:21).

   금일의 수많은 소경기독교인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열심히 따르며 주님 때문에 죽을 준비는 갖추고 있으나 정작 자신의 죄 문제는 분명히 해결하지 못하고 조 가운데서 고민하고 정죄하고 눈물 흘리고 있는 모습은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짝사랑하는 달콤한 가운데 있다가 결국은 멸망의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받아주지도, 받아줄 수도 없는데 꿈 많은 소녀처럼 천국의 소망에 부풀어 있다가 지옥에 던져지는 불쌍한 기독교인들이 우리 시대에 얼마든지 있다. 이글을 읽는 그대도 믿음을 점검해 보기 바란다(고린도후서 13:5).

   이들의 문제는 23절에 있는 대로 세상에서 죄 가운데 난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죄 가운데 있다. 또한 34절에 있는 대로 행동으로 죄를 범하므로 죄의 종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나 행동으로나 죄인이며 죄 속에서 죽어 지옥에 던져지는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죄의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부르고 있는데(마태복음 11:28) 왜 죄의 짐을 예수님께 내려놓지 않고 있는가?

   천국에는 죄가 있는가? 죄 있는 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왜 그대는 세상 죄(당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포함)를 다 지고 가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죄 용서함 받지 아니하는가?

   당신의 죄가 "호리라도 남김없이"(마태복음 5:26) 다 갚아지기 전에는 결단코 지옥을 피할 수 없다. 죄 가운데서 죽은 기독교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지옥에 모일 것이다.

   오! 그대여, 속히 이 지옥에서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라. 건지라. 주님께서 이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나니 주님의 십자가 속죄를 속히 받아들이고 영생의 소망을 가지라.

   예수님은 죄의 종이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이땅에 오셨다. 금일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죄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면서도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천국 갈 것으로 착각하는 모습을 볼 때 필자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35절에 보면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 이며 36절에는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말씀하시고 있다.

   죄의 종에서 자유를 얻으라!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 기록된 불멸의 진리다. 이 불멸의 진리가 인생들을 멸망의 지옥에서 건지는 열쇠요 그대 자신이 이 죄의 종에서 해방되는 것은 44절의 "마귀의 자식" 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식이 아비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그대가 죄에서 해방받지 못하였다면 마귀의 자식이니 마귀를 따라 멸망의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셋째, 8장 58절에 나타난 진리를 살펴보자. 우리를 죄와 멸망의 지옥에서 해방시키는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었던 분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실제 이 말씀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예수님보다 2,000여 년 전에 이 세상에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0년 후에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은 육신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계시다가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며, 그분은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창조된 것이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운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분은 만유를 붙잡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분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창조주께서 그대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분이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서 구원받은 우리의 구원도 영원하다. 구원은 종종 소멸되었다가 다시 받는 것이 아니고 한 번 받으면 영원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보장하신 주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

   이것은 구원을 잃을까 걱정하는 자들을 해방시키는 놀라운 진리이다. 금일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열심히 믿어서 구원을 얻고 그 구원을 잘 보존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이 구원을 잃을까 불안해하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구원은 십자가 속죄로 말미암아 단번에 얻는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보전하기 위하여 고생할 필요가 없다. 영원부터 계신 주님께서 그대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다 용서하심으로 그대를 구원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살아 계셔서 영원히 그대의 구원을 보장하셨다. 그대는 이제 모든 정죄와 지옥에서 완전한 구원을 얻었다.

   오! 그대여, 이 놀라운 진리를 통해서 그대가 자유를 얻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한복음 8: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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