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제11과

                     기도와 병고침 (야고보서 5:13-15)


   야고보서 5장을 마무리하는 구절들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명사나 동사의 형태로 일곱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언제나 할 수 있는 기도(5:13)


   삶의 모든 환경 속에서 우리는 기도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고난 중에 있다면, 우리는 간절히 구함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기쁨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찬송으로 주님께 우리 마음을 높여야 합니다. 주님은 모든 우리 생활의 환경에 변화를 일으키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위대한 근원-창조주-으로서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러더포드(Rutherford)가 말한 "이차 원인으로 이루어진 바퀴들의 혼란한 회전" (우연한 결과로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좌절하여 자신이 환경에 의한 희생자라고 인정한다든지 환경이 변화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방법 외에는 아무 방법도 보지 말아야 합니다.


병든 자와 기도(5:14-15)


   이 구절들은 야고보서 가운데, 아마도 신약성경 가운데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일 것입니다. 그러한 논란은 오늘날 신자들의 삶 속에서 병 고침의 현장에서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성경에서 병든 자와 병 고침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짚고 넘어가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든 병이 세상에 있는 죄의 결과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만일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병도 없었을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2. 어떤 병은 사람이 생활 가운데 범한 죄의 직접적인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30에서 어떤 고린도사람은 자기 생활 가운데 있는 죄를 판단하지 않은 채, 즉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지 않은 채 주님의 만찬에 참여했기 때문에 병이 들었습니다.


   3. 모든 병이 사람이 생활 가운데 범한 죄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닙니다. 욥은 그가 가장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병이 들었습니다(욥 1:8).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것은 그가 범한 죄로 인한 고통이 아니었습니다(요 9:2,3). 에바브로디도는 주님의 일에 대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활동으로 인해 병이 들었습니다(빌 2:30). 가이오는 육체적으로 건강치 못했으나 영적으로는 강건했습니다(요삼 2절).


   4. 어떤 병은 사단적인 활동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욥의 온 몸을 뒤덮은 부스럼은 사단이 일으킨 것입니다(욥 2:7). 누가복음 13:10-17의 여인을 꼬부라지게 한 것은 사단이기 때문에 그 여인은 스스로 펼 수 없도록 두 번 꼬부라진 것입니다. 16절의 "십 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 이라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바울은 사단에 의해 생긴 육체의 연약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내게 주셨으니..." (고후 12:7)라고 불렀습니다.


   5. 하나님은 치료하실 수 있으시고 또 치료하십니다. 아주 실제적인 의미로, 모든 치료는 하나님께로 온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중 한 가지는 여호와 로페카로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출 15:26)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든 치료의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치료하는데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해줍니다. 때로 하나님은 몸의 자연 치유 과정을 통해 치료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몸에 놀랄만한 회복의 능력을 두셨습니다. 어떤 때 하나님은 약으로 치료하십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의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조언하였습니다(딤전 5:23). 또 어떤 때 하나님은 의사들을 통하여 고치십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마 9:12). 바울은 누가를 "사랑 받는 의원" (골 4:14)이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치료의 사역에 의사를 사용하십니다. 유명한 프랑스 외과의사인 듀보이스(Dubois)는 "외과의사는 상처를 손질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치료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6. 또한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치료하시기도 합니다. 복음서에는 이에 대한 많은 예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늘 기적으로 치료하신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결코 기적으로 치료하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성경에는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7.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치료하는 것이 늘 하나님의 뜻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드로비모가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고 떠났습니다(딤후 4:20). 주님께서는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치료하시지 않으셨습니다(고후 12:7-10). 만일 항상 치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누구도 늙거나 죽지 않을 것입니다.


   8. 하나님께서는 모든 경우마다 치료하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치료해 달라고 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27에서는 치료를 우리가 정당히 요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긍휼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9. 일반적인 의미로 치료가 "속죄" 에 들어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주님의 속죄에 속한 모든 복이 아직 우리에게 다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몸의 구속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들어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도들을 데리러 오실 때까지 우리는 또한 모든 질병에 대해 완전하고 궁극적인 치료를 받게 될 것입니다.


   10. 치료가 되지 않는 것이 믿음의 부족을 나타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무한히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되는데 그러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울도 드로비모와 가이오도 치료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믿음은 강하고 적극적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야고보서 5장의 본문으로 돌아가서 그것이 치료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만일 치료에 대한 성경 구절이 이 구절들 뿐이라면, 여기에 기록된 조건을 만족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속에 찾아오는 모든 병이 치료된다는 확신을 가져도 될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언제나 치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다른 성경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고보가 모든 병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환경의 결과로 오게된 어떤 형태의 병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 구절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 있는 치료는 죄사함과 연관된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한 사람이 아마도 지역교회의 간증과 연관된 어떤 죄를 범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후 얼마 안되어 그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 병이 자기가 범한 죄의 직접적인 결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자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교회의 공적인 간증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장로들을 초청하여 그들에게도 완전히 자백해야 되었습니다. 장로들은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릅니다. 그 믿음의 기도는 그 병든 자를 구원하며,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이것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 오게된 병에만 한정적으로 하신 주님의 약속이며, 여기에 기록된 방법으로 죄를 자백하면 용서되며, 주님께서 그를 치료하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죄를 범했는지 어떻게 알며 그가 회개하고 자백하였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그 대답은 15절 끝 부분에서 그 사람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죄가 오직 자백함으로써만 용서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일 1:9).

   어떤 이는 " 여기에서 그가 죄를 범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라고 말하고 있다" 라고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전체 문맥은 죄의 고백과 타락한 자의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에 유의하십시오. "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16절). 17절과 18절에 언급된 기근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이 기근은 그들이 여호와를 참된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께로 돌이켰을 때 거두어졌습니다(왕상 18:39).  이제 우리가 보게될 19절과 20절은 타락한 자의 회복을 다루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야고보서 5:13-20의 전체 문맥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치료가 죄의 결과로 병든 자로서 장로들에게 그 죄를 고백한 자를 위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 장로들의 의무는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과 기름을 바르는 것입니다. 혹자는 야고보가 이 서신을 기록할 당시에는 기름이 약의 형태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여기에서의 기름이 의약적인 수단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눅 10:34). 다른 견해는 기름이 의미하는 바는 의식적인 사용이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주의 이름으로" 라는 말씀에 의해 지지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름을 바르는 것은 주님의 권위에 의해 또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기름은 종종 기적적인 치료약으로 사도들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막 6:13). 그 기름에 치료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기름은 성령님과 그분의 치료의 사역을 나타내는 것입니다(고전 12:9).

   어떤 사람은 기름을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은혜의 시대와 또한 은혜의 시대가 의식과 예식을 강조하지 않는 것과 모순된다고 하며 반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떡과 잔을 주님의 몸과 피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여자들이 머리를 가리는 것은 그들이 남자에게 속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의식적으로 기름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합니까?

   "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라고 야고보는 말했습니다. 그러한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 병든 자를 치료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에 기초한 기도이기 때문에 믿음의 기도입니다. 이것은 그 장로들이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또는 그 병든 자가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앞에서 말한 조건들을 온전히 만족하면 그 사람을 일으키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완전한 확신 가운데 기도 할 수 있습니다. "...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는 그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못박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죄사함은 자백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자기 죄를 자백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잠 28:13).

   이제 요약하면, 14절과 15절은 어떤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병든 사람의 경우에 적용된다고 믿습니다. 그가 이것을 깨닫고 회개하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그들에게 완전히 자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장로들은 그를 위해 기도하며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릅니다.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치료하신다고 여기에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그의 회복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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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한 믿지 않는 선장이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선장이 타고 있던 배는 바다 한 복판을 항해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이 선장은 선장실 방안에서 곧 자신에게 들이닥칠 죽음을 응시하면서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생명을 취해가기 위하여, 몹시 무겁게 내리누르며 괴롭혀 온 이 영원한 두려움의 존재인, 공포의 왕이 마침내 목전에까지 출현하여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 오는 것을 보자, 그는 움찔 놀라면서 뒷걸음 쳤습니다. 그는 즉시 사람을 보내 그의 조수인 일등항해사를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윌리암즈, 자네 나를 위해 기도 좀 해주게. 그렇지 않으면 성경 말씀 몇 구절만이라도 좀 읽어주게. 자네도 잘 알다시피 나는 평생 몹시 사악한 죄 가운데서 인생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이제 나는 곧 죽게 될터이니 제발 나를 위해 그렇게 해주게나."

 

"선장님 당신도 알다시피, 저는 평생 기도라고는 해 본 적도 없고 또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성경은 읽어드릴 수 있기는 해도, 읽어 드릴 성경책이 여기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네 네 조수 중에 이등항해사 토마스를 좀 불러주게. 아마 그 사람이라면 몇 마디라도 기도는 해줄 수 있을 걸세." 그러자 두 번째 조수인 이등항해사 토마스가 금방 다 죽어가는 선장 앞에 불려오게 되었습니다. 선장은 그의 조수인 토마스에게 다시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보게, 토마스 나는 이제 곧 영원을 향한 긴 여행을 시작할 것일세. 나는 지금 정말 두렵다네. 여기 앉아서 나를 위해 기도를 좀 해 줄 수 없겠나? 하나님께 나같이 불쌍한 영혼에게 자비를 좀 베풀어 주시라고 말일세."

 

"선장님 제가 할 수만 있다면 선장님 마지막 소원을 들어드리는 일인데 기꺼이 해드려야지요. 그렇지만 선장님, 제가 청년 때 언젠가 한번 기도해 본 것 말고는 이제껏 기도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기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불러오기 위해 배안을 샅샅이 찾아보았습니다. 성경을 읽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았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선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선장에게 말하기를 배의 전속 요리사의 심부름꾼으로 일하고 있는 월리 플랫이라고 하는 매우 작고 어린 친구가 있는데, 그가 성경책처럼 보이는 책을 들고 있는 것을 언젠가 본 적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즉시 그아이를 찾아 선장실로 데려 왔고 선장은 그 아이에게도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거기에 좀 앉게나. 그리고 성경에서 나를 도와 줄 수 있는 좋은 말씀이 있는지 좀 찾아 줄 수 있겠나, 나는 곧 죽게 될 터인데, 지금 나는 몹시 두렵다네. 나 같은 죄인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는 말씀이 있으면 제발 그와 같은 말씀을 찾아서 내게 좀 읽어 줄 수 있겠나?"

 

윌리는 어디를 찾아서 읽어야 할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윌리는 그가 집을 떠나기 직전에 그의 어머니가 이사야 53장을 찾아서 읽어주신 것이 기억났습니다.

 

윌리는 존 카웃츠 선장과 같이 불쌍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에 관하여 완전무결하게 이야기해놓은 하나님의 복된 말씀인 이사야 53장을 펼쳤습니다. 그리고서 이 복된 하나님의 말씀을 선장에게 조용히 읽어 주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을 처음부터 읽어 내려가 마침내 53장 5절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자신의 마지막 생명을 위하여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 열심히 듣고 있던 선장은 순간 아직도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확실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잠깐만, 젊은이! 그 말이 내가 아직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해주는 말씀같아! 그 말씀을 한 번만 더 읽어 줄 수 있겠나" 소년은 이 복된 이사야서 53장 5절 말씀을 한 번 더 읽어 주었습니다.

 

"그래 맞어, 나의 젊은 친구, 그 말씀이 너무 좋아 그게 내가 찾던 바로 그 말씀이야 이 말은 진심이야."

 

이 말을 듣는 순간 소년 윌리는 크게 고무되었고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윌리는 용기를 내어 선장에게 말했습니다. "선장님 제가 집에서 이사야 53장 5절을 읽을 때, 제 어머니께서는 제게 그 절속에 우리라는 말 대신에 저의 이름을 넣어서 읽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어머니께서 제게 시키신 대로 이 말씀구절 속에 제 이름을 넣어서 읽어드릴까요?"

 

"물론이란다 아들아, 너의 어머니가 네게 말씀하신대로 그 속에다 네 이름을 넣어서 다시 한 번 읽어다오."

 

이 소년은 경건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넣어 천천히 이사야 53장 5절 말씀을 읽어주었습니다. "그(예수님)가 찔림은 월리 플렛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윌리 플렛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윌리가 말씀 구절을 다 읽어주자 선장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상반신을 침대 밖으로 내밀면서 소년을 향하여 손을 뻗으며 부탁하기를, "내 사랑하는 아이야, 그 구절 속에다 내 이름을 넣어서 한 번 더 읽어다오, 그래 줄 수는 없겠니---내이름 죤 카우츠이니까, 죤 카우츠를 그 구절 속에 넣어서 말이야."

 

소년은 선장의 이름을 넣어 천천히 이사야 53장 5절 말씀을 읽어주었습니다. "그(예수님)가 찔림은 죤 카우츠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죤 카우츠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죤 카우츠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죤 카우츠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소년이 성경말씀 구절을 읽어주는 일을 다 마쳤을 때에, 이 선장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 그래. 그 정도로도 이제 충분하다. 내 사랑하는 소년아, 이제는 네 자리로 돌아가도 좋다."

 

그리고서 선장은 그의 베개를 등에 대고 누워서 이사야 53장 5절에 있는 이 보배로운 말씀을 계속 반복해서 말하되 매번 자기 자신의 이름을 그 속에 넣어서 그 말씀을 반복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이 말씀을 그렇게 반복할 때에 천상에 속한 사람들만이 누리는 기쁨이 그의 영혼을 충만하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인가요? 물론입니다. 이 사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사람은 정녕 구원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또 한 사람의 불쌍한 죄인이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요1:12)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

 

죤 카우츠 선장이 예수님 품 안에서 잠들기 전에 그는 자기 배에 타고 있던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사람에게 인자로 오셔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찔림은 죤 카우츠 선장 자신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죤 카우츠 선장 자신의 죄악 때문이라는 사실을 웅변으로 증거해주었습니다. 선장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하는 징계를, 기꺼이 자신의 복된 대속물이 되어주신 그리스도께서 징계를 받으므로 죤 카우츠 선장 자신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이 채찍은 십자가 위에 계실 때에 예수님에게 가해진 채찍을 말합니다.--- 맞으므로 죤 카우츠 선장 자신은 나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배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증거입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이 글을 읽고 계신 사랑하는 독자여러분, 이와 같은 구원에 대하여 알고 계셨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존전에서 한 사람의 불쌍한 "경건치 않은 죄인" 또는 "믿지않는 죄인"의 모습으로 여러분의 위치를 그대로 고수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를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믿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13:38.39) EMMAUS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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