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통신교재     말씀의 올바른 분별


                                                                          C.I. 스코필드 저



                         머리말


   "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15)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하는 것은 일군으로 인정받기 위한 첫째 조건입니다. 간혹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진리의 말씀을 그릇되게 분별함으로 말미암아 힘써 하나님의 뜻에 복종치 아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진리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분별이 없다면, 성경 공부가 도리어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으며, 봉사나 헌신마저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본 강좌는 신앙 생활의 기초가 되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수 있도록 돕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올바른 분별을 위해 근거로 제시한 여러 성경구절들은 일일이 찾아 보시고, 단 하나의 교리라 할지라도 이 강좌의 가르침이나 인간적 권위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베뢰아 사람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상고해 보시고 깨달아지는 대로 삶에 적용하시며 깨우치시기 바랍니다.


                                                                                                                   한국엠마오성경학교


                         제1과


             유대인, 이방인 및 하나님의 교회        


   "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고전 10:32)


   성경을 주의해서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성경 내용의 반 이상이 하나의 민족 곧,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이야기임을 알게 됩니다 또한 이 민족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위치에 있음도 동시에 알게 됩니다. 이들은 실제로 다른 민족과 구별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들에게 다른 어떤 민족에게도 준 적이 없는 특별한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오직 이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만이 구약의 역사와 예언에 전하여 지고 있고, 다른 민족들은 유대인과 관련이 있을 때에만 언급되고 있을 뿐입니다. 또한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모든 말씀은 지상과 관계가 있음도 알게 됩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신실함과 순종을 조건으로 지상의 명예와 부와 권력을 약속 받았었습니다. 또 반면에 신실치 못하고 불순종할 경우에는 이스라엘 민족은 온 땅에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어지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신 28:64). 심지어는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메시아의 약속도 " 지상에 있는 모든 족속" 에게 축복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을 계속 상고하노라면, 성경에는 교회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는 또 하나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집단으로서의 무리가 거듭 언급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무리도 역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상호 유사성은 그것뿐이고, 이 둘은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과는 대조적으로, 교회는 아브라함이 보인 바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으로서 택함을 받은 하나의 민족에 제한되어 있지 않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 없이 한 몸을 이룹니다.

   또한 교회는단순한 언약이 아닌 출생의 관계 맺고 있습니다. 순종에 대한 상급도 이스라엘처럼 지상의 위대함과 부의 축복을 받는 대신에, 교회는 지상에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하게 여기고 천상에 속한 자로서 천상에 소망을 두고 핍박과 미움을 각오하라는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현세와 지상의 것에 특별하게 관계가 있는 반면, 교회는 내세에 대한 강한 소망과 영적이고 천상적인 것과 관계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경은 이스라엘이나 교회가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각각이 시작 된 때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의 시작은 아브라함의 부름 받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이제껏 아담과 이스라엘 족장들이 교회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해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지상생애 동안이나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 16:18)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결국 당시에는 아직 교회가 없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세웠다" 거나 "세우고 있다" 가 아니라 "세우리니" 인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3:5-10의 말씀과 같이 교회는 구약 예언서에 단 한 번도 언급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그 때에는 "하나님 속에 감추어 있던 비밀" (엡3:9)이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교회의 출생은 사도행전 2장에, 그리고 그 종결은 데살로니가 전서 4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자주 언급되어 있지는 않으나 모든 면에서 이스라엘이나 교회와 구별된 또 하나의 집단인 이방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과 하나님의 교회의 위치는 대략적으로 다음의 성경 구절들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교회                                         이방인

    롬 9:4~5                                   엡 1:22~23                                엡 2:11~12

    요 4:22                                     엡 5:29~33                                엡 4:17~18

    롬 3:1~2                                   벧전 2:9                                    막 7:28~29


   이스라엘과 교회에 관해서 성경에 언급된 말씀을 비교해 보면 기원, 소명, 약속, 생활원칙, 그리고 미래의 모습에 있어서 모두가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소명에 대해


이스라엘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신 8:7-9)

"그가 가로되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시되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창 24:34-35)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 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신 28:7)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신 28:13)


교회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히3: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빌 3: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마 8:20)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벧전 1:4)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 4:11)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럽도다 하시니" (막 10:23)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약 2:5)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요 16:2)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4)



"이는 물론 아무리 경건해도 그 사람이 유대인이라면 누구이든지 천국에 가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단지 유대인의 경우에 경건의 동기가 천상적인 축복이 아니라 지상적인 축복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은혜 시대에 있어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다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은혜 시대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믿음으로 거듭나서 (요 3:3, 16) 교회 인(엡 1:22, 23) 한 몸에 연합됩니다 (고전 12:13). 따라서 교회안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고전 12:13 ; 갈:28 ; 엡 2:14). 사도 바울도 에베소 사람들에게 편지하는 가운데 그들을 가리켜 "너희는 그 때에 이방인이" (엡 2:11)라고 말했고 고린도 사람들에게도 역시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고전 12:2)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교회의 차이는 그들 각자에게 주어진 품행규범 한층 더 잘 나타나 있습니다.


2. 품행규범에 대해


이스라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 . . 일곱 족속을 쫓아 내실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신 7:1, 2)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 지니라" (출 21:24,25)


교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 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  .  ." (고전 4:12, 13)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 5:39)


               

* 신명기 21:18~21과 누가복음 15:20-23도 읽어 보십시오.


   보시다시피 예배에 대한 규정에 있어서도 이스라엘과 교회는 여전히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한 곳에서만 예배드릴 수 있었고, 그것도 하나님 존전에는 가까이 갈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오직 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두세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이 있고, 또 구성원들 모두가 제사장들입니다.


   - 레위기 17:8,9을 마태복음 18:20과 비교해 보십시오.

   - 누가복음 1:10을 히브리서 10:19, 20과 비교해 보십시오.

   - 민수기 3:10을 베드로 전서 2:5과 비교해 보십시오.


   이스라엘과 교회의 미래에 관한 예언에 있어서는 그 대조가 한층 더 경이적입니다. 교회는 지상에서 완전히 휴거되는데 반해, 회복된 이스라엘은 앞으로 지상에서 최대의 영화와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바를 살펴봅시다.


3. 미래에 대해


   1) 교회에게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2, 3)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5~17)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빌 3:20, 21)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요일 3:2)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계 19:7~9)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행 15:14~16)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롬 11:1, 11, 24~26)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  . 돌아 오게 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이산한 자를 모으시리니" (사 11:11, 12)

   "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자기 고토에 두시리니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에게 가입되어 그들과 연합할 것이며" (사 14ㅣ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렘 16:14,1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렘 23:5, 6)


2) 이스라엘에게


"보라 내가 노와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 내어 이곳으로 다시 인도하여 안전히 거하게 할 것이라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렘 32:37, 38)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습3:14, 15)


   이상으로 보건대 교회를 유대교화 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교회의 사명을 곡해하며, 그 영성을 소멸하는데 있어서 다른 모든 요인을 합한 것보다도 더 위험하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성별되어 위로부터 부르심에 합당한 그 소명대로 주님 좇기를 포기했음을 의미합니다. 즉 교회가 유대교 성경을 사용함으로서 스스로 그 목적을 낮추는 일에 정당화함을 의미합니다. 즉 교회의 목적을 세상을 문명화 하는 일에 두고, 재물을 모으는 일에 두고, 거창한 의식을 거행하는 일에 두고, 거대한 교회당을 건립하는 일에 두며, 국가간의 전쟁에 하나님의 축복을 비는 일에 두며 평등해야 할 형제들을 성직자평신도로 구분하는 일에 두는 등의 자신의 모든 오류들을 스스로 정당화함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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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제5과 혀의 죄(야고보서 3:1-12)


   3장 1-12절은 혀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1:19. 26; 2:12; 4:11; 5:12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치 노련한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기 위해 그 혀를 검사하고 있는 것처럼 야고보는 어떤 사람의 영적인 건강은 그 사람의 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말의 죄를 가지고 자기 진단을 시작합니다. 야고보는 아마도 "혀를 보라, 미끄러지기 쉽게 축축한 곳에 있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현대의 재담에 동의할 것입니다.


선생의 책임(3:1)


   이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선생이 되고자 하는 성급한 욕망에 대해 경고하면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혀가 특별히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사상은 자기 혀로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는 말은 "선생이 되려는 지나친 야망을 갖지 말라" 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교사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 자기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단지 이러한 사역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일 뿐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그 가르친 것을 행하는데 실패한다면 더 큰 심판을 받게 됩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큰 책임입니다. 선생은 성경에서 알게되는 것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어야만 합니다. 선생은 결코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의 범위는 그 자신이 얼마큼 나아갔느냐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선생은 자신의 형상대로 다른 사람을 낳는데 즉, 사람들을 자신처럼 만듭니다. 혹 선생이 어떤 성경구절의 분명한 의미와 동떨어진 설명을 한다거나 그 의미를 희석시킨다면 그는 자기 학생들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어떤 형태로든 죄를 묵과한다면 그는 거룩치 못한 삶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어느 책에서도 그러한 가르침을 하는 책은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신자의 삶의 모든 면에서 주님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책에서든 가르쳐야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기본 되는 혀의 제어(3:2)


   야고보는 이제 가르침이라는 특별한 사역으로부터 대화라는 일반적인 부분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삶의 많은 부분에서 넘어지기 쉽지만 만일 어느 사람이 자기의 혀를 제어할 수 있다면 그는 말로 인한  여러 가지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사람은 진실로 균형이 잘 잡힌 사람이고, 훈련이 잘 된 사람일 것입니다. 만일 자기의 말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삶의 다른 부분에서도 자제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이를 완전하게 행하신 분이시지만, 여기에는 우리 각자도 훈련을 통해 완전한 자, 성숙한 자, 온전한 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섯 가지 예(3:3-8)


   여기에서는 다섯 가지 말에 대한 모습 또는 혀에 대한 예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혀를 재갈로 비유하고 있습니다(3절). 재갈은 말의 머리를 둘러싼 것으로 그 입을 조이는 마구입니다. 그 조이는 것은 다스리는 것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 조이는 부분은 아주 작은 쇳조각이지만, 사람이 그 쇳조각을 조종하므로 말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혀는 선악간에 삶을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모습은 키입니다(4절). 배와 비교해 볼 때 키는 작은 것입니다. 키의 무게는 배 무게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할 만큼 적습니다. 예를 들어. 퀸 엘레자베스 호의 무게는 총 중량 83,673톤입니다. 그런데 그 키의 무게는 140톤으로 배 총 중량의 1퍼센트의 5분의 1보다도 더 적습니다. 그러나 이 키를 움직이게 되면 곧 그 배의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한 사람이 그 작은 기구를 가지고 그 거대한 배를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히 키가 움직이는 대로 조종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혀가 작다는 것으로 그 능력을 오판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혀는 우리 몸의 아주 작은 지체이며, 비교적 감추어져 있지만 혀는 선악간에 행하는 엄청난 일로 인해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혀와 닮은 세 번째 것은 불입니다(5 ,6절). 성냥불을 부주의하게 버리면 작은 불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이내 산불로 변하게 되어 커다란 재해를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작은 성냥불이 지니고 있는 파괴와 파멸의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요! 역사상 가장 큰 화재 중 하나는 1871년에 있었던 시카고 대 화재입니다. 그 화재는 오래리(O'Leary)부인의 소가 등잔불을 발로 차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 불은 사흘동안 그 도시의 1.5 평방 마일을 태웠습니다. 사망자가 250명이며 집을 잃은 자가 100,000명이었고 재산 피해는 약 1억 7천 5백만 달러였습니다. 혀는 작은 성냥불이나 등잔불과 같지만 사악한 잠재력은 거의 무한합니다. 야고보는 혀를 우리 지체 중에서 "불의의 세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계라는 말은 광대하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도 때로 이 말을 그러한 의미로 사용하는데 예를 들면, 고난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을 때 고난에 찬 세계라고 표현합니다. 비록 혀는 그 크기가 매우 작지만 지니고 있는 죄악의 가능성은 매우 큽니다.

   악한 말의 불꽃이 어떻게 번져나가는지 뉴욕의 브룩클린(Brooklyn)에 사는 두 여인의 대화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한 여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틸리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했던 그 비밀을 다 말했다더군요." 그러자 "틸리가 그러던가요,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라고 다른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첫번째 여인이 "그래요, 나도 틸리에게는 당신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내가 당신에게 말했다고 틸리에게 말하지 마세요."라고 말했습니다.

   혀가 온 몸을 더럽힐 수 있다는 말씀은 어떤 사람이 그 혀로 비방과 욕과 거짓말, 그리고 참람된 말과 저주를 하는데 사용하므로 자신의 온 인격을 더럽히게 된다는 의미로 보여집니다.

   C.G. 채펄(Chappel)은 그의 시편 강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방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하는 것이다... 진흙 던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 손과 가슴에 진흙을 묻히지 않고는 그가 좋아하는 오락을 즐길 수 없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러한 경험으로 더럽혀져 왔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더러워지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나쁘게 말함으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정결함에 대해 더 높이 평가해 주리라는 헛된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무너뜨림으로 우리 자신이 세워질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자이다. 옆집에 다이너마이트를 묻어놓고는 우리 집은 든든하겠지 라고 상상하는 소경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을 해하려는 우리의 시도가 성공하더라도 늘 우리 자신은 더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

   혀는 생의 바퀴를 불사릅니다(6절). 이 바퀴는 출생하면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인간 활동의 전 영역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악한 혀는 사람의 개인 생활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활동도 악에 물들게 합니다. 악한 혀는 "사람의 전 생애 동안 모든 악"에 영향을 미칩니다. 악한 혀는 지옥 불에서 나는 불입니다. 모든 악한 말은 거기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 특징이 바로 지옥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지옥이라는 말은 게헨나(Gehenna)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여기에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약성경 안에서 예수님만 사용하신 단어입니다.

   혀를 비유하는 네 번째 모습은 야생의 길들일 수 없는 동물입니다(7, 8상반절).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 뱀과 해물들은 길들일 수 있습니다. 코끼리, 사자, 호랑이, 맹금류, 뱀, 돌고래, 물고기까지도 길들이는 것이 낯선 일이 아닙니다. 플리니(Pliny)는 그의 시대에 사람들이 길들여 놓은 짐승들을 나열했습니다. 야수 중에서는 코끼리, 사자, 호랑이이며, 새 중에서는 독수리이며, 살모사와 또 다른 뱀들, 물에 사는 생물 중에서는 악어와 여러 가지 물고기들입니다. 사실상 모든 종류의 짐승들이 길들여지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야고보의 논점을 벗어난 것입니다(권위역 성경은 "온갖 종류의 짐승"으로 표현됨-역자 주). 어떤 종류의 짐승이라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지속한다면 사람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로버트 G. 리(Lee)는 "사람들이 거대한 코끼리를 어떻게 하는가? 사람들은 밀림에 있는 코끼리 집을 습격하여 코끼리들을 포획한 다음 그 대부분을 훈련시켜서 통나무를 나르게 한다든지, 무겁게 실은 짐마차를 밀게 하는 등 온갖 일을 시킨다. 또, 푸른 눈의 벵갈 호랑이는 어떻게 하는가? 사람들이 호랑이들을 잡아 가르쳐 놀이 대상으로 만든다. 사납고 두려우며, 강한 아프리카 사자들은 어떻게 하는가? 사람들은 많은 사자들을 포획하여 불타는 둥근 원을 통과하며, 말등에 올라타고, 높은 그네에 앉으며, 배고플 때에도 발 앞에 놓여진 고깃덩어리를 건드리지 않으며, 엎드리고, 일어서고, 달리고, 포효하며 사람의 명령에 순종하며, 채찍 소리에 순종하게 만든다. 나도 수 년 전에 써커스에 한번 갔을 때, 한 굶주린 사자가 그 큰 입을 넓게 벌리고 있는 동안 조련사가 머리를 그 입에 1분 동안이나 넣고 있었던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보아 구렁이를 어떻게 하는가? 엄청난 비단뱀은 어떻게 하는가? 써커스 곡예단의 꽃처럼 연약한 작은 여인들을 보라. 그 징그러운 괴물들이 여인들의 몸을 감고 있지만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는다. 동물 공연장에 가보라. 어떻게 사람이 피에 굶주린 표범과 흑 표범을 해를 끼치지 않게 하며 그 앞에 잠잠케 만드는가. 공연장에 가서 훈련받은 벼룩과, 굶주린 재칼이 유순한 양과 함께 누워있는 것과, 비둘기와 독수리가 한 둥지에 함께 있는 것 그리고 늑대와 토끼가 함께 뛰어 놀고 있는 것을 보라"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야생 동물을 길들이는 데는 성공을 했지만 그 성공이 자기 혀에까지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의 삶속에 이것이 사실임을 인정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육체의 작은 부분을 다스리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 작은 지체를 다스리는 능력이나 힘을 갖지 못합니다.오직 하나님만이 혀를 통제 아래 두실 수 있습니다.

   다음에 야고보는 혀의 특징을 쉬지 아니하는 악으로 말하고 있습니다(8절). 야고보는 이 표현을 "죽이는 독" 이라는 말과 연결하여 우리의 마음에 있는 쉬지 않는 뱀이 가진 아주 해로운 독을 상기시키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한 두 방울만으로도 치명적입니다. 그와같이 혀는 생각에 해를 끼치며, 인격을 죽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문난 잘못들을 얻어듣기 위해 얼마나 자주 험담에 끼어듭니까. 그리고 얼마나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깔보며, 비난하고, 깎아 내립니까. 우리가 행한 그 일로 인해 흘린 눈물과 부서진 마음과 상처 입은 명예에 대해 누가 그 해악을 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우리 자신과 가족에게 가져온 비극을 잴 수 있겠습니까? 복받쳐 오는 내적 비통, 사과해야 하는 부끄러움, 우리 육체의 건강에 끼친 나쁜 영향등. 부모들이 공개적으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는데 빠지므로 그 자녀들도 똑같이 비판적인 정신과 그리스도인의 교제에서 방황하는 것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혀를 잘 사용하지 않으므로 지불해야 할 비용은 너무도 큽니다.

   해결책은 없습니까?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를 험담과 비판, 야박한 말에서 지켜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누구에 대해서든지 애정 없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벧전 4:8).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거스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즉시 그에게로 가서 사랑안에서 그것을 논의하고 함께 기도하십시오(마 18;15; 눅 17:3). 형제들에게 있는 단점을 확대해 보려고 하기보다는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려고 애쓰십시오. 혹 우리가 부정하거나 합당치 않은 말을 하게 된다면 말하던 중간에서 멈춘 다음, 계속하는 것이 유익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하십시오.


항상 선한 것을 말하라(3:9-12)


   다음에 우리는 혀를 선한 목적에도, 악한 목적에도 사용하는 모순에대해 배웁니다. 만물에도 이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는 전혀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잠깐 동안 그 혀로 하나님을 찬양한 다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을 저주합니다(9절). 동일한 근원에서 이렇게 반대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얼마나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까! 그러한 상황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10절). 하나님을 찬양한 혀는 사람들을 해하기보다는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말은 이것이 참된 말인가? 친절한 말인가? 꼭 필요한 말인가? 라는 세 가지 시험을 한 후에 해야 합니다. 늘 우리는 우리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달라고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시 141:3). 그리고 우리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반석이시요 구속자이신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구해야 합니다(시 19:14). 로마서 12:1에 있는 우리의 몸에는 우리의 혀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을 동시에 내는 샘은 없습니다(11절). 혀도 그래서는 안됩니다. 혀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한결같이 선한 것이어야 합니다. 샘에서 나오는 물과 같이 시원케 하는 말을 하고, 무화과나무의 열매처럼 영양이 풍부한 말을 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지 못하고,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지 못합니다(12절). 사실상 한 나무는 오직 한 종류의 열매밖에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혀는 선하고 악한 두 가지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이 구절을 마태복음 7:16-20의 비슷한 말씀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거기서는 우리에게 못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고자 하는 마음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악한 사람은 그저 악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상반되는 열매를 맺는 혀의 사용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샘은 동시에 짠물과 단물을 낼 수 없습니다(12절). 짠물을 내든지 아니면 단물을 내야 합니다. 만물에서 얻는 이러한 교훈들은 우리의 말이 늘 선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이와 같이 야고보는 우리를 말에 관계된 것까지 시련하는 것입니다. 이 단락을 끝내기 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자신에게 물어보도록 합시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그것에 나 자신을 복종시킵니까? 다른 사람들을 뒤에서 비난합니까? 나는 늘 깨끗하고, 유익하고, 친절한 말을 합니까? 나는 저속한 표현인 하나님 맙소사, 제기랄 등과 같은 말을 합니까(영어권 국가에서는 하나님이나 예수님, 천국을 나타내는 말을 약간 변경하거나 그대로 저주하는 말로 사용함-역자 주)? 경건한 집회에 참석한 후에 경솔하게 행동하거나 축구경기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습니까? 성경 말씀을 가지고 말장난을 하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에게 더 큰 감동을 주기 위해 내용을 바꾸거나 과장을 하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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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서


                           제2과

                                        살아있는 말씀(야고보서 1:18-27)


   야고보는 하나님을 빛들의 아버지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창조물 가운데서 사람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셨습니다. 그 임무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19-27절).


성경과 영적 생활(1:18)


   이 구절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사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새로운 출생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한마디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뜻을 좇아-이 말씀은 무엇이 우리를 구원하도록 하나님을 자극하였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가치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역사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은 분에 넘치는 것이며,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고, 우리가 구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 사랑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원하셔서 베푸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새로운 출생의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이 영적 출생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출생은 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이러한 관계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성경은 새로운 출생을 위한 도구입니다. 모든 진정한 회심은 말에 의해서든 활자에 의해서든 성경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구원의 길을 알 수가 없으며, 사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조차도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첫 열매라는 말과 연관된 세 가지 중요한 사상이 있습니다. 첫째로, 추수의 첫 열매는 처음 거둔 곡식단입니다. 야고보가 쓴 편지는 기독교 세대 중 처음 신자들에게 보내는 것이었기에 그들이 첫 열매들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조물 중 첫 열매들이지만, 우선적으로는 야고보가 서신을 보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첫 열매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호의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롬 12:1,2). 셋째로, 첫 열매는 완전한 추수가 시작될 것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을 그리스도 추수의 첫 곡식 단으로 비유했습니다. 그 후 수세기 동안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뒤를 따르게 되겠지만 그들은 새로운 피조물의 열매를 나타내는 성도들의 모형으로서 설명되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들처럼 온 세상에 거하실 것입니다(롬 8:19-23). 완전한 추수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그들은 천년왕국 때에 온 세상이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과 동일한 복종을 그리스도께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 구절이 우선적으로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우리의 책임(1:19-27)


   1장의 남은 구절들은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조물 중 첫 열매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실제적인 교훈을 하고 있는데,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난 자들의 특징이 되어야 하는 실제적인 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말씀으로 말미암아 출생한 것을 알았다면 이제 또한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듣기는 속히 하라(19절)는 말씀은 거의 익살에 가까운 평범하지 않은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서둘러서 들으라" 는 말과 같습니다. 물론 그 의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모든 경건한 충고와 훈계를 들을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께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하기는 더디하라. 야고보는 놀랍게도 우리의 언어생활에 대해 매우 많이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우리의 말하는 것을 조심하도록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체도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의 입은 하나이지만 귀는 둘이다.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것의 두 배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 -에픽테투스. 솔로몬도 야고보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고 말하였습니다. 무리하게 말하는 자는 결국 죄를 짓게 됩니다.

   성내기를 더디해야 합니다. 쉽게 분내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자녀들에게서 기대하시는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20절). 불끈 화를 내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게 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는 말씀은 여전히 사실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조물 중 첫 열매로서 나타내는 또 다른 방법은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은 단번에 벗어버리는 더러운 옷으로 비유되었습니다. 더러움은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모든 정결치 못한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넘치는 악" 이란 우리의 회심치 않은 때로부터 이어져온 악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 죄악은 아마도 우리의 삶에서 넘쳐서 다른 사람의 삶에 악한 영향을 미치는 죄를 말하는 것이든지 또는 아주 많은 악을 말할 수도 있는데 야고보서의 경우에는 악이 넘치는것을 설명한다기 보다는 악이 가지고 있는, 격렬하게 악을 행하는 특성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깨끗해야만 합니다.

   거룩한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한 또 다른 요구사항은 온유입니다. 성경말씀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않고도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말씀에 감동을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학문적으로 성경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교만과 완고함과 죄는 우리를 무디고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오직 복종하는 겸손한 사람만이 성경으로부터 가장 많은 유익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시 25:9).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사 66:2).

   야고보는 성경말씀을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 라고 말하였습니다. 권위역 성경은 이 구절을 "너희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접붙여진 말씀" 이라고 하였는데 이 번역에 의하면 야고보는 회심때에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접붙힘으로 그 신자가 연합되고 견고케 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많은 번역성경들은 "심기워진 말씀" 으로 묘사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이 거듭날 때 그의 삶 속에서 거룩한 보증이 된다는 견해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새로운 출생 시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영혼을 죄의 형벌에서 뿐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구원해 주실뿐 아니라 이생에서의 역경에서도 구원해 주십니다. 이 현재형은 야고보가 21절에서 말한 구원의 계속적인 면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마음에 심긴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해야만 합니다(22절). 성경을 가지고 있다거나 그 글을 읽는 것에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듣기를 간절히 원하며 그 하신 말씀을 의심 없이 기쁨으로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육신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더 나은 삶으로 바꾸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성경을 읽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성경 학도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는 말씀의 지식을 점점 많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의 자기 기만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성경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채 성경에 대한 지적인 지식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복이 아니라 덫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늘 배우지만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침체되고, 낙심되고, 무감각하게 됩니다. "표현 없는 감동은 낙심을 가져온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더 책임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그것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이상적인 결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행동에 변화가 없는 사람은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서 그 본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습니다(23, 24절). 그가 거울을 본 아무런 효과도 얻어내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모습 중에는 전혀 바꿀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보이는 것만이라도 복종해야 합니다. 거울을 보고 "씻어야지" 또는 "면도해야지" 또는 "머리를 빗어야지" 또는 "이를 닦아야지" 라고 깨닫게 되면 우리는 최소한 그 본 것은 행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거울 본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심코 성경을 보거나 그 읽는 것에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은 채 의무감으로 성경을 읽기가 쉽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을 보았지만 속히 잊어버리고 자신이 이미 온전한 자인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만족은 영적인 발전을 방해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고서 그 실천적인 부분에 습관적으로 복종합니다(25절). 그의 깊은 묵상은 그의 삶에서 실천적인 결과를 낳게 합니다. 그에게는 성경이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이기에 그 교훈들이 무거운 짐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성경이 하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히  그의 새 성품이 좋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가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할 때, 인간의 전통과 세상적인 논리로부터의 참된 자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진리가 그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성경에서 유익을 얻은 사람이며, 읽은 것을 잊어버리는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날마다 실천하는  중에 성경을 나타내는 삶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가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이 순종하므로 그의 영혼에 셀 수 없는 복을 받습니다.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절과 27절에는 헛된 경건과 순전한 경건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의 경건은 경건한 믿음과 영관된 외적인 행동의 모습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내적인 영성보다는 외적인 모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한 교리들에 대한 믿음보다는 예배와 봉사에 있어서 믿음에 대한 외적인 표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그 혀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그의 경건은 헛되고,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가 모든 종교적인 절기들을 지킴으로 매우 독실한 사람처럼 보이더라도 그는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식으로 만족하시는 것이 아니라 경건을 실천하는 삶에 관심을 두십니다.

   재갈먹이지 않은 혀만 헛된 경건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한 예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모순된 모든 행동은 무가치한 것입니다. 다음은 속이는데 능한 독실한 잡화상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기 가게의 위층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점원에게 이렇게 외쳐댑니다.


   "제임스!"

   "예!"

   "우유에 물을 섞었나?"

   "물론입니다"

   "버터에 색을 입혔나?"

   "그렇습니다"

  " 커피에 치커리를 섞었나?"

   "다 했습니다".

   "아주 잘했어, 아침 기도 드리러 올라오게나".


   야고보는 이러한 경건은 헛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경건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자신의 삶을 정결하게 유지하는 실제적인 경건입니다.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의 본으로서 야고보는 과부와 고아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사람에 대해 칭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거듭남을 실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은혜로운 행위와 분리된 행동들" 이라는 것입니다. 가이 킹(Guy King)은 이러한 덕을 실제적인 사랑과 실제적인 거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단원을 마치면서 다음의 질문들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책망하시고, 가르치시고, 변화시켜 주시도록 겸손한 마음을 가집니까? 나는 내 혀를 재갈 먹이기 원합니까? 나는 분내는 것을 정당화합니까? 아니면 분을 이기기를 원합니까? 어떤 사람이 음탕한 농담을 시작하면 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나에게 보답하지 못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풂으로 나의 믿음을 나타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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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엠마오 성경학교 교재는 전 세계에서 번역 사역이 진행 중이고,   교도소에 수감되어있는 재소자들의 삶에도 큰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엠마오 교도소 사역은 미국에 있는 교도소의 재소자들은 물론이고 다른 많은 나라의 재소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으로 오랜 역사가 있습니다. 1950년 후반에 두 명의 목사가 일리노이주, 시카고 쿡 카운티(Cook County) 교도소에서 엠마오 교재를 사용하여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1967년, 필 웨그너(Phil Wegner)를 포함한 몇몇 엠마오 성경학교 학생들은 쿡 카운티 교도소에 봉사활동을 가게 됐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74년 필 웨그너는 초창기 엠마오 교도소 사역의 책임자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1977년, 엠마오 교도소 사역은 특별히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쓰인 첫 번째 교재인 <본 투 윈(Born to win)-구원, 새로운 출생>의 출판과 함께 급성장하였습니다. 재소자들에게 생명의 구원의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책은 북미 전 지역의 재소자들에게 2백만부가 넘게 공급되었습니다.

 

   이 사역의 빠른 성장과 확산은 20년간 계속되어, 1990년대 초반까지는 북미의 모든 주와 지방에 엠마오교도소 사역의 해당 교도소 담당 책임자가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교도소 전심 사역

 

   엠마오 성경학교 교도소 전심 사역은(Jail Impact Ministries, JIM)은 새로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개인이나 지역교회가 근방에 위치한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재소자들을 섬기는 것을 돕기 위해 지난 10년간 도입되었습니다.

 

   이제 엠마오성경학교(ECS) 사역의 일환으로 미국 엠마오 교도소 사역을 하고 있는 우리는 80명이 넘는 교도소 책임자와 교도소 전심사역 동역자(associates), 셀 수 없이 많은 봉사자와 함께 북미의 교도소에 감금된 230만 재소자에게 엠마오 교재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정규 교육과정은 영어로는 90개가 넘는 교재가, 스페인어로는 50개가 넘는 교재로 확장되면서 144개 과목이 넘는 엠마오 강좌 교재들이 재소자들에게 공급되고 있습니다. 현재 5권의 교재가 특별히 재소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아래의 간증은 이러한 교도소 사역의 효과를 잘 보여줍니다.

 

   "저는 막 '본 투 윈'(Born to win)을 끝내고 첫 번째 수료증을 받았습니다. 저의 모든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 엠마오 성경학교가 성실하게 답해주는 것을 보았을 때 저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공부를 끝마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나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긴 편지를 써주고 격려해 줄 만큼 나를 돌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텍사스 수감자 길버트(Gilbert)

 

   북미의 미국과 캐나다 모든 주를 거쳐 교도소와 감옥 안에서 영적인 회복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엠마오 성경학교는 재소자들이 참된 진리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배우도록 돕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많은 재소자들은 기독교나 성경에 대해 사전지식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제공된 교재를 통해 확실한 성경적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노스 캐롤리나 지역의 교도소 책임자인 빌 아킨슨(Bill Akinson)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교도소에선 한주 동안에 엠마오 교재를 통해 거듭났다고 고백하는 재소자들이 한 명도 없는 그와 같은 한 주(a week)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엠마오 교도소 사역을 통해서 강력하게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 열매를 풍성하게 경험하는 일은 얼마나 감사가 되고 흥분되는 일입니까!

 

   어느 교도관에게서 온 편지

 

   "저는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 쿡 카운티 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한 재소자가 제가 책상에서 성경 공부 안내문을 읽고 있는 것을 지켜봤다고 하며 제게 다가오길래 그와 잠시 성경 말씀에 대해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엠마오 성경학교 교재를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교재들은 내용과 편집 디자인까지 모두가 굉장히 훌륭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재소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크게 끼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엠마오 성경학교 교도소 담당자로부터 피드백을 받고 있는 것에 매우 행복해 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자리를 빌려 저희 교도소 교도관을 대표하여 엠마오 성경학교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재소자들의 교육을 돕고 그들의 삶을 바꾸는 것은 원래 저희들의 일인데, 저희들이 하지 못한 일을 엠마오 성경학교에서 잘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Zimbabwe)의 재소자에게서 온 편지

 

   "먼저 저의 생명을 구해주신 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008년~2010년 사이 짐바브웨는  식량부족으로 인한 극심한 기아에 시달렸습니다. 그 누구도 재소자들을 돌보지 않았고, 우리는 떠돌이 개와 같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교도관들까지 배고픔에 허덕였습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두, 세끼의 식사로 연명했습니다. 많은 재소자들이 영양실조에 시달렸고, 어떤 이들은 아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결국 우리는 생존을 위해 쥐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교도소 안의 이러한 극심한 어려움은 생존자들로 하여금 구원을 갈망하며 그들의 목숨을 주님 손에 맡기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엠마오성경학교 교재를 통해서 그룹스터디를 시작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동안, 대부분의 재소자들은 하나님의 더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재소자들의 삶은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엠마오성경학교 교재를 통해 새 생명 가운데 가장 큰 힘이 되시는 주님께 기대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 목숨을 살려주신 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EMMAUS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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