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주일은 천국, 평일은 지옥 가는 신자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0).


   금일의 기독교 범주 아래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율법 아래서 고통당하고 있는 현실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쉽게 분별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은 예수를 믿고 있으며, 죄 용서함 받았으며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아 상당수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그들을 율법 아래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기독교인이 있다면 스스로를 분석해 보고 구원의 문제를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사단은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되 감쪽같이 속인다. 성경에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저주 아래 있으며" 지옥 자식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누가 자기를 율법 아래 있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자신이 율법 아래 있는 것을 안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겠는가? 필자가 볼 때에 율법 아래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을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단에게 철저히 속은 결과이다.

   여기서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증상을 철저히 분석해 봄으로 아직 구원받지 못한 독자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자 한다.

   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일은 천국, 평일은 지옥"이라는 말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어떤 분이 나에게 고백하였다.

   "예배당에서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며 통성기도 시간에 힘을 다하여 기도하면 마음이 기쁘고 하나님의 사랑을 혼자만 받은 것처럼 즐겁고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갈 것 같은 자신감이 솟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시간이 지나고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세파에 시달리고, 또 형편에 따라서 실수가 나타나고, 죄를 짓게 되면 신앙에도 자신감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죽으면 지옥에 갈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해 옵니다. 나는 왜 이럴까요?"

   그는 왜 예배당에서는 천국이요, 집에서는 지옥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그들의 양심의 문제인가, 아니면 인격의 문제인가?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양심도 인격도 아니고 그들의 근본적인 신앙의 문제이다. 그리고 잘못된 신앙은 잘못된 가르침에서 온다. 그 가르침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째는 진지하게 구원의 문제로 갈등해 본 일이 없다. 오늘날 거리에서 만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개인적으로 상담해 보라. 그들의 대부분은 지옥에서 구원받는 문제를 진지하게 갈등해 본적이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의 영혼이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에 지옥에 떨어지면 어떻게 할까? 정말 지옥이 있는 것인가?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옥에 가지 아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듭남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영생을 얻었다는 확신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나의 죄가 얼마큼 용서 되었으며, 속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갈등의 제목은 얼마든지 있다. 참된 신앙은 진지한 갈등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위하여 이 정도의 갈등도 하지 아니하면서 참된 신앙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떠한가? 진지한 갈등의 시간들이 있었는가?

   예전에 필자는 어떤 성도를 만났다. 그는 현재 캐나다 교포로서 한인교회에 나가는 성도이다. 그가 이민 가기 전에 친구의 권유에 따라서 필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집회에 딱 한번 참석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후에 보니 그 때에 구원받았다고 간증하였다. 당시에 교회에 다니지 아니하던 그가 어떻게 딱 한 번 전도집회에 출석하고 구원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의 고백은 이러하였다. 그가 어려서 주일학교에 얼마 동안 나간 적이 있었다. 그 때 어떤 주일학교 교사가 지옥에 대해서 실감나게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그 설교를 들은 뒤 그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자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으면 지옥에 간다는 생각이 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아니 사실상 마음의 고통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그 마음에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 언젠가는 돌아가야 된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그가 참석했던 그 날은 필자가 지옥 갈 죄인이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는가에 대하여 전하고 있었다. 그는 그 날 나도 지옥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훗날 깨달아 보니 그 날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비록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지만 지옥에 대한 갈등이 그를 구원받게 하였다. 다시 말하거니와 구원은 갈등으로부터 시작된다.


   둘째로 진지한 상담의 기회가 없었다. 대부분의 구원은 구원 문제를 진지하게 상담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물론 상담은 구원받은 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생명이 생명을 낳을 수 있다는 원칙에서 말하는 바이다. 여러분 주변에 기독교인들을 상담해 보라. 그들 중에 상당수는 그래도 앞에 말한 갈등을 겪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갈등이 있든 없든 그 모든자의 문제점은 누구도 그들에게 구원에 대한 진지한 상담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도 같은 경험을 겪었거니와 필자가 만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이렇게 목사님과 같이 앉아서 진지하게 구원의 문제를 놓고 상담하는 것이 처음있는 일이라고 고백한다. 기독교인들을 만나보라. 그들은 상담은커녕 이와 같은 상담이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

   얼마 전에도 한 교인이 구원받았는데 그는 수 십 년 교회를 다니는 중 이와 같은 상담을 처음 했으며 지옥에 대한 갈등에 대해서 감히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고 한다. 상담의 기회가 없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교회에 출석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잘 듣고 교회생활 충실히 하면, 그리고 성경 공부반에서 배워 나가다보면 신앙이 성장하고 점점 믿음이 자라서 천국에 가게 되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다니다보면 다 잘되지 않겠는가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막연한 것이 아니다. 작은 구멍가게를 열어도 잘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하면 안 되는데 그대의 영혼이 영원한 지옥에 빠질 수 있는 문제를 막연하게 처리하지 말라.


   셋째로 상담을 하되 잘못된 상담도 문제이다. 어떤 구도자는 기가 막힌 사연을 필자에게 고백하였다. 성경을 읽다가 지옥을 발견하고 어떻게 하면 지옥에 가지 아니하는지를 목사님에게 상담을 요청하였다. 목사님은 상기된 목소리로 다니다보면 다 잘 될 것인데 왜 급하게 생각하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가 하고 퉁명스럽게 말하므로 민망한 생각을 하며 쫓기다시피 나왔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였다. 구원의 문제를 물어보니 목사님이 대답하시기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예배당에 나오는 날 믿음으로 나왔으니 그 날을 구원받은 날로 알고 있어라." 그래서 그는 그냥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말은 맞지만 어딘가 모르게 석연치 않고 자꾸 의문이 생겨서 고민하였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여야 죄를 용서받는가를 상담하였는데 예수님이 내 죄를 십자가에서 다 담당해 주셨다는 대답을 들었다. 마음이 시원하고 그 목사님의 설교도 은혜롭고 한동안 좋았다고 한다. 죄를 용서받은 기쁨도 있었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확신도 있으므로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 설교에 우리는 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죄를 숨기지 말고 통회하여야 한다는 설교를 듣고 난 다음,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사라진 줄 알았던 죄가 자기 가슴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죄는 자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심령은 나날이 죄에 대한 갈등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용서하시지 않았는가 하고 반문하면서 죄의 고통을 이겨보려 하였지만 고통은 사라지지 아니하였다. 십자가의 속죄는 성경에 있고 2000년 전에 있었고 멀리 있는데 내 마음속의 죄는 현실이 아닌가! 이 밤을 새고 나면 내일 직장에 나가서 나는 또 죄를 지어야 하는데 나는 언제까지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야 하는가?

      주일날 말씀에 죄를 통회하라고 하여서 통곡을 하고 죄를 고백했다. 또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은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 기뻐하고 감사하라. 찬양하고 경배하라. 하염없는 눈물과 함께 찬양하고 또 찬양하였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울고 같이 찬양하고 같이 기뻐하였다. 당장에 죽어도 천국에 갈 것 같았다. 진실로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그런데 오늘이 겨우 화요일이 아닌가. 나는 벌써 죄의 올무에 걸려서 괴로워하고 있지 아니한가. 기쁨은 한 때의 감정으로 끝나고 이틀도 다 지나지 않은 화요일 밤에 나는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주일날의 그 신령한 말씀과 성령 충만한 분위기는 왜 나의 신앙을 이틀도 지탱시켜주지 못하는가. 어찌하여 나는 주일날은 천국이요 평일에는 지옥인가? 이 신앙의 틀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금일의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와 같은 갈등에 잡혀있다. 그 중에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포기한 사람도 많다. 한 주간 지은 죄를 주일날에 가서 회개하고 용서받으면 되지 아니한가. 그 다음에는 또 주일이 있으니 그냥 족하지 아니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서두에 말한 것처럼 율법 아래 있는 것이 문제이다. 율법 아래 있는 것은 율법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저주 아래 있는 것이며 지옥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이 주일날 말씀을 듣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며 예배당에 있을 동안에는 죄를 멀리 하고 있다. 그러나 월요일부터는 죄와 가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멀리하고 있는 동안에는 기쁘고 죄와 가까이 있을 때는 기쁨이 없고 답답한 것이다. 이것이 율법 아래 있는 모습이다. 생각하여 보라. 세상법도 내가 법을 지켰을 때는 담대하고 당당하고 기쁨이 있다 그러나 법을 어기고 죄를 짓는 순간 기쁨과 담대함은 사라지고 불안이 찾아온다. 그런데 일이 잘 되어서 구속되었다가 석방되면 다시 편안해진다. 다시 말해서 죄와 나와의 관계 속에서 기쁨과 불안이 수시로 교차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법에 의해서 죄인이 되었다가 풀려났다가 하는 과정에 의해서 나의 마음상태가 수시로 변하는 것이다.

   이처럼 율법 아래 있는 사람도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정죄 될만한 죄 가운데에 있을 때에는 낙심되고 죄를 회개했거나 신앙의 상태가 좋을 때에는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다. 율법 아래서는 대단한 열심을 내고 있는 사람은 천국 갈 수 있는 확신에 차있다. 그는 큰소리로 구원받았다고 우기고 심지어 구원받은 날까지도  주장하지만 그의 실상은 자기 열심에 의한 자기의 의에 잡혀서 교만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열심과 그의 정직과 그의 충성과 그의 성실함이 그가 천국 가는데 오히려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 얼마나 불쌍한 모습인가. 구원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고 그 후에 열심을 내야 할 것인데 본질적인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열심만 내고 있으니 율법 아래서 교만한 모습이다. 그는 교만하여 지옥에 가는 것이다.

   율법 아래 있는 또 다른 모습은 앞에서도 언급한대로 열심을 내지 못하고 자주 죄와 타협하고 말씀을 순종하지 못함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 같은 죄인이 무슨 천국인가' 하는 낙심 속에 겸손(?)하다. 그는 그 겸손으로 인하여 지옥에 간다.

   그렇다면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다음 말씀에 답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셨으니..."(갈라디아서 3;13).

   예수께서 저주받을 죄인을 위하여 저주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죄와 저주의 지옥에서 해방시키셨다. 죄가 죄인을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후로는 그를 죄인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라 부른다. 십자가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다 해결하셨으므로 이 후로는 죄로 말미암아 지옥 갈 번민에서 해방받았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신 그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것이다. 죄를 절제하는 것도 지옥이 겁나서가 아니라 은혜를 갚기 위함이요 헌금을 내는 것도 벌을 겁냄이 아니요 체면문제가 아니라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자원함으로 하는 것이다. 삶의 모든 행동이 십자가의 은혜와 관계가 있는 것이니 이것을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한다.구원의 문제,

   오! 그대여 그대는 율법 아래 있는가, 은혜 아래 있는가?

   신앙의 상태와 관계없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하였는가? 그대의 모든 죄가 십자가상에서 온전히 해결된 사실을 그대의 양심이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천국에서 같이 살게 될 것이다. 종파와 인종과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

Posted by 행복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