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아사는 인생들이여!


                            속아사는 인생들이여!


"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전도서 7:10).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깨우치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어리석은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참된 지혜를 계시하사 그 어리석음 가운데서 건지시기를 원하신다.

   필자는 인생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전도서를 살피고 있다. 이 전도서는 어리석게 속아사는 무지한 인생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인생은 속아사는 것이다. 자신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속아사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하고 속아사는 것이다. 자신의 종착역을 알지 못하고 속아사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속아사는 인생들에 대해서 성경 안에서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첫째로 인생은 자신의 생각에 속아산다.


   사람들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또는 금년보다 내년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때에는 여러 면에서 더 나은 인생을 살게 될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학생들은 상급학교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하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청년들은 결혼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아름다운 아내를 얻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예쁜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는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신혼 부부들은 날마다 더해지는 저금통장을 기쁘게 여기며, 재롱동이 아기를 신기해 하며,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한다. 그들은 아이들이 자라감에 따라 아이들에게 소망을 두며 살아가는 것이다. 자녀들이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진출하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 아니한가!

   오,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형편이 나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실체가 확실히 나아지고 있는가? 진정 그들의 소망처럼 그들의 행복은 보장되어 있는 것인가?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도서 6:9).

   인생들의 보장되어 있지 않은 소망은 말씀에 기록된대로 한낱 헛된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무지개를 잡으려고 쫓아가는 소년처럼 헛된 공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모습을 잘 가르쳐주시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두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눈 앞에 나타난 현실이, 나타나지 아니한 심령의 공상보다 낫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생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 실제로 공상에 잡혀있을 때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나 현실에 충실하면 유익을 얻을 뿐만 아니라, 형편을 어느 정도 좋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노력으로 좋은 열매를 얻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공상만을 가지고 헛되이 배부른 사람보다는 노력하여 현실을 잘 가꾸어 나가는 것이 났다.

   그러나 사실이 이와 같지만 이것도 헛되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참된 평안, 확실한 행복,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은 진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점점 나아질 것이라는 공상적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문득 문득 뒤를 돌아볼 때마다 " 지난 날들이 좋았었다" 고 푸념하기 일쑤이다. 서두에 기록한 말씀처럼 " 옛날이 오늘보다 나음" 을 한탄하는 것이다.

   필자는 며칠 전 내과의사로부터 슬픈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내용인즉 서울 법대 3년생이라는 어느 청년이 얼마 전부터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여러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다. 정밀진찰을 해본 결과 소화기를 비롯한 내장에 암세포가 퍼져 있어서 2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꺼질 시한부 생명이었다. 그는 학업보다 치료부터 하라는 의사의 말에 4학년 등록을 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렇게 자기 길을 고집하는 청년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가령 그가 건강하여 최고의 실력으로 법관이 되었다고 하자. 그것이 그 인생에 진정한 행복일 수 있을까? 모든 고뇌와 고통은 그에게서 다 사라진 것일까?

   아!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이룰 수 없는 헛된 소망에 잡혀 있는 인생의 허탄함이여... . 바람을 잡는 헛됨이여, 헛됨이여... .


   둘째로 인생은 세상에 속아산다.


   세상은 인생들에게 속삭인다. 세상 어디엔가는 행복이 있다고... . 달콤하고 그럴듯한 속삼임으로 인생들의 삶을 송두리째 뽑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순간 순간 인생들을 즐겁게 하는 일들을 통해서 사람들을 그 속에 빠지게 한다.

   지금부터 약 3,000년 전에 이 세상에 살았던 솔로몬 왕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낙은 거의 다 누렸던 왕이었다. 전도서 2장에 기록된 것처럼 그는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를 더이상 요구할 필요가 없도록 누렸다. 그러나 그는 동일한 장에서 "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고 하였다.

   왜 웃음을 논하여 미친 것이라 하였을까? 그것은 해 아래 인생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도 진정한 행복의 웃음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 죄 용서함이 없는 세상, 구원이 없는 상태에서의 웃음이 무슨 진정한 웃음이겠는가?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실수로 범죄하여 형무소에 갇혔다고 하자. 그는 형무소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서 여러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거나 다른 일들로 인하여 때때로 웃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 진정 기쁘고 평안한 웃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가 순간 순간 일들로 인하여 크게 웃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웃음은 아닌 것이다.

   인생도 이와 같아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에 매여 지옥으로 가고 있는 인생에겐 잠시 잠시 즐거움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진정한 행복의 웃음은 아닌 것이다.

   사단은 세상의 그럴듯한 유혹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거기 빠져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생각할 여유조차 갖지 못하게 한다. 요한 사도가 권면하고 있는 말씀을 들어보라.

   "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일서 2:17).


   셋째로 인생은 사단에게 속아산다.


   사단은 여러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여 인생으로 하여금 내세를 믿지 못하도록 속이고 있다. 인생들로 하여금 절대로 지옥은 없으며 천국도 없다고 생각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도록 역사한다. 사단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지 못하도록 역사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 중 두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첫째로 기독교의 모습을 통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사단은 오늘날 기독교계에 깊숙히 개입하여 기독교를 교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변질, 타락시키고 있다. 사단은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타락시켜 선한 간증을 나타내지 못하게 하여 기독교계를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속이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행실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사실이며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둘째로 사람들의 생각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한다. 사단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신의 생각들을 심어줌으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우주라도 능히 다 수용할 수 없는 크신 하나님을 제한된 사고와 육체를 가지고 측량하다가 이해가 되지 않으니 하나님은 없다고 결론내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대단히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인생이 속고 있는 이 세가지 이유에는 사단이 절대적으로 역사하고 있다. 사단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옥과 천국과 자신의 영혼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한다. 헛된 소망에 사로잡혀 헛된 것에 모든 인생을 허비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사단은 세상의 수많은 쾌락적인 것과 욕망을 추구하게 함으로 인생을 속여 이생에만 관심을 쏟게 한다. 이와 같이 헛된 일에 잡혀 인생의 나날들을 보내는 동안 육체는 점점 낡아져가므로 죽음을 재촉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을 사단에게 속아서 다 허비해 버리고 영원한 멸망의 지옥을 향하여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다.

   오! 우리 모두 생각하여 보자. 멸망의 지옥에 떨어진 속아 살아온 인생들의 절규를... . 그들이 이 세상에 살 때는 괴로운 세상, 답답한 고통의 세상이라고 하였을지도 모른다. 또 어떤이는 실제로 괴로운 세상을 한탄하여 자살하는 이도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그들이 멸망의 지옥에서 부르짖는 절규 중에는 "차라리 고통스럽다고 생각했던 옛날이 오늘보다 나았다" 라는 탄식이 있을 것이다. 온통 황금같은 모든 시간들을 사단에게 속아서 헛되이 보내버리고 뜨거운 눈물 속에 탄식과 통곡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후회할 것이다.

   다음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라.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태복음 13:50).

   필자는 최근 어떤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친구를 살인한 사람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었다.

   " 친구에게 배반당한 것, 즉 친구에게 속았다는 생각을 떠 올릴 때는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절망감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세상에서 속는 것은 한시적이지만 사단에게 속아 지옥의 고통 속에 들어 가는 것은 영원한 것이다. 자신에게 속고, 세상에 속고, 사단에게 속아 멸망의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후회하고 통곡하는 인생은 인간으로서 가장 불행한 모습인 것이다.


   사랑하는 독자여! 부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하나님은 영원한 진리요 사랑이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따뜻한 품 안에서 금세와 내세의 복락을 누리라.

   "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이사야 55: 7).


                                                                                                   -전도자 허윤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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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서


                           제6과 지 혜(야고보서 3:13-18)


   야고보는 이제 참된 지혜와 거짓 지혜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지혜는 어떤 사람이 그 머리에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가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그가 어떻게 그의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합당한 올바른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 참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물론 근본적으로 그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육체로 오신 지혜이십니다(마 11:19 ; 고전 1:30). 그러므로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그리스도의 삶을 나타내는 자이며 성령의 열매가 그 증거입니다(갈 5:22, 23).

   또한 우리는 세상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그는 모든 행동을 이 세상의 원리에 의해 행하는 자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영광을 취하는 모든 특징을 구현하는 자입니다. 그의 행동은 그 안에 거룩한 삶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3:13)


   어떤 사람이 지혜롭고 총명하다면, 그는 참된 지혜로부터 나오는 겸손한 모습과 선한 삶으로 그것을 나타내야 합니다(13절). 참된 지혜의 현현이신 주 예수님은 교만하거나 거만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온유하시고 그 마음이 겸손하십니다(마 11:29). 그러므로 모든 참된 지혜 자는 참된 겸손으로 인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지혜로운 자(3:14-16)


   세상적으로 지혜로운 자는 그 마음에 독한 시기와 이기적인 야망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그가 지니고 있는 한가지 욕망은 자신을 크게 이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경쟁자들에 대해 시기하며 무자비하게 대합니다. 그는 성공을 가져다 주는 자신의 지혜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것이 지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자랑은 공허한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참으로 겸손한 자라는 진리를 실제적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14절).

   그리스도인의 섬김에 있어서도, 세상적인 지혜는 다른 일군들에 대해 독한 시기를 내며 자신을 나타낼 유리한 위치를 구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세상적으로  지혜로운 자가 교회 안에서 인도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세상적인 원리가 영적인 일을 인도하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야고보는 이 잘못된 지혜를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고 불렀습니다(15절).

이 세 가지 형용사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의도한 것입니다. 세상적이라는 것은 그 지혜가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정욕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사람의 저급한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마귀적이라는 것은 그 행동이 사람의 행동을 닮기보다는 마귀의 행동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시기와 다툼을 보게 된다면 또한 무질서와 부조화 그리고 모든 다른 악한 일들도 보게 될 것입니다(16절). 이 얼마나 진실입니까! 오늘날 세상의 불안과 소요를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착각함으로 말미암아 참된 지혜를 거절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지혜의 특징(3:17-18)


   참된 지혜가 17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님이 그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지혜는 첫째 성결합니다. 말과 행동과 생각이 깨끗합니다. 정신이나 육체나, 교리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믿음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더럽혀지지 않은 것입니다. 참된 지혜는 또한 화평합니다.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은 평화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의미이며, 자신의 순결을 희생시키지 않는 한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깊은 물위에 놓여있는 외나무다리 위에서 만난 두 마리 염소에 대한 루터의 이야기가 한 예가 될 것입니다. 염소들은 뒷걸음질 할 수도 없었고 감히 싸우고자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잠깐 이야기 한 후에 한 마리가 엎드려 다른 염소가 자기 위로 지나가도록 해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지나가게 되었다. 도덕은 쉬운 것이다. 당신 자신이 화평을 위해 희생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라. 내가 말한 것은 당신 자신에 대한 것이지 당신의 양심을 말한 것은 아니다." 참된 지혜는 관용합니다. 이는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참는 것이며, 제멋대로가 아니라 예의 바른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존중할 줄 아는 신사입니다. A. B. 심슨(Simpson)은 "무례하고, 비꼬는 태도와 날카로운 말, 냉혹하게 마음을 도려내는 이 모든 것들은 일반적으로 보혜사의 온유한 가르침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특징은 양순입니다. 이는 부드럽고, 가까이 하기 쉬우며, 이성적으로 열려 있고, 진리가 요구하면 언제나 양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고집세고, 완고한 것과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합니다. 이는 잘못한 자에게 긍휼을 크게 베푸는 것이며, 그들이 바른 길을 찾도록 도우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혜는 동정하며 친절합니다. 거기에는 복수심이 없습니다. 참으로 무례를 자비로 갚는 것입니다. 참된 지혜는 차별하지 않습니다. 즉 편애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차별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참된 지혜는 위선이 없습니다. 진실하고 참됩니다. 사실과 다르게 가장하지 않습니다.

   이제 이 모든 생각과 함께 참된 지혜를 가진 사람의 모습과 거짓 지혜를 가진 사람의 모습을 그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참 지혜를 가진 자의 모습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참으로 겸손합니다.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깁니다. 허세를 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해줍니다.

     그 사람의 행동은 그를 둘러싼 세상과 같지 않으므로 세상을 초월해 있습니다. 그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영의 소욕을 따라 삽니다. 그의 말과 행동은 당신에게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의 삶은 성결합니다.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깨끗합니다. 또한 그는 화평합니다. 그는 모욕과 거짓 참소를 참아낼 뿐, 그에 대항 하지도 자신의 정당함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관용하고, 온화하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이야기하기 편하며,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보복하지 않으며 늘 자신에게 잘못하는 사람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특히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도 친절히 대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대하며, 결코 편애하지 않습니다. 부자에게도 가난한 자와 동일하게 대하며 유명한 인사일 지라도 평민과 동일하게 대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외식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뜻을 가지고 어떤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가 아첨하는 것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진실을 말할 뿐이며 결코 가면을 쓰지 않습니다.


세상적으로 지혜로운 자의 모습


   세상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은 시기와 다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 때문에 그는 모든 경쟁자나 자신과 필적한 자를 참을 수 없게 됩니다. 그의 행동은 이 땅보다 조금도 높지 않기 때문에 고상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동물처럼 본능적인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의 방법은 잔인하고, 믿을 수 없으며, 마귀적입니다. 그의 잘 차려입은 옷 아래에는 더러운 생활이 있습니다. 그의 모든 생각은 불결한 것뿐입니다. 그의 도덕은 타락했습니다. 말은 더럽고 그를 인정하지 않거나 어떤 면으로든 반대하는 모든 사람과 말다툼하기를 좋아합니다.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사회생활에 있어서 그는 늘 논쟁하기를 좋아합니다. 또한 그는 거칠고 위협하며, 무례하고 조잡합니다. 그는 항상 사람들과 팔 길이 만큼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와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의 생각은 이미 굳어져 있기 때문에 그의 견해는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용서하지 않고 보복하는 자입니다. 그가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알게 되면 자비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는 속박을 풀기보다는 모욕과 무례와 천박함을 쏟아 냅니다. 그는 사람이 자기에게 어떠한 유익을 끼칠 것인가에 따라 그들을 존중하며, 그들을 인정하는 것이 더 이상 자신에게 유익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면 더 이상 그들을 "사용" 하지 않고, 그들에게 관심도 두지 않습니다. 결국 그는 이중적인 사람이며, 신실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그의 말이든 행동이든 전혀 그를 신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예


   야고보는 "화평케 하는 자는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18절)는 말씀으로 이 장을 끝내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한 것과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을 연결해 주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이제 막 참된 지혜는 평화를 사랑한다고 배웠습니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에 대해 볼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삶이란 농사와 같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농사에는 농부(지혜로운 자인 화평케 하는 자)가 있고 기후(평화)와 결실(의)도 있습니다. 농부는 의 의 싹이 자라기를 바랍니다. 불화와 다툼의 환경 속에서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아닙니다. 평화로운 환경에서만 씨가 뿌려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평화로운 품성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르게 자란 곡식은 그 자신들의 삶과 그들이 섬긴 자들의 삶에서 결실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에게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조용히 씨를 뿌리러 나가는 화평케 하는 자이다"(18절, 필립스 역).

   야고보는 우리가 매일의 생활에서 어떠한 지혜를 나타내는가 하는 것으로 다시 한번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주 예수님의 겸손한 신자보다도 이 세상의 교만한 자를 더 존중하고 있습니까? 나는 신뢰를 얻고 있는 사람을 무시하면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나는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 미심쩍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해 아첨하는 자입니까? 나는 마음속에 시기와 원한을 품고 있습니까? 나는 비꼬는 말이나 냉정한 말을 즐깁니까? 나는 생각이나 말이나 도덕적으로나 깨끗합니까?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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