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성령은 알되 열매가 없는 기독교인들이여!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라디아서 5:5).


   필자는 길을 가다가 "성령폭발대집회" 라고 쓴 부흥회 포스터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었다. 도대체 성령이 폭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성령이 무슨 폭발물인가!

   이 웃지 못할 희극이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계를 휩쓸고 있어도 수많은 양떼들은 영문 모르고 따라가고 그의 지도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도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신약성경에서 성령의 본질을 가장 적절하고 세밀하게 가르치는 말씀이 요한복음 16:1~16에 있다. 여기에는 성령의 본질과 사역의 목적, 그리고 사역의 방법이 소상하게 기록 되어 있다. 이것은 주님께서 직접 설명하신 말씀이다. 여기에 말씀하신 성령의 모습은 인격이다. 말하고 듣고 가르치며 신자를 인도하는 인격적인 분이시다.

   생각해 보라. 이러한 인격적 성령이 어떻게 폭발할 수 있는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망칙스러운 일이다. 금세기 기독교계를 휩쓸고 있는 바람 중 하나가 성령운동이다. 일명 오순절 운동이라고도 하는 이 운동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이 운동은 외적으로 볼 때 기독교에 많은 양적 부흥을 가져온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는 이 운동이 마지막 시대에 사단의 대전략 중 하나라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말할 수 있다. 실상이 이러한데도 오늘날 보수주의라고 하는 교회들도 상당수가 이러한 물결에 휘말리고 있음은 슬픈 일이다. 이 오순절 운동의 특징은 대부분 신앙의 중심을 외적인데서 찾는 것이다.

   사람들을 이와 같이 기형적 종교인으로 만들어 지옥으로 보내는데는, 성경에 대해서 까막눈이며 성령에 대해서 오해 가운데 빠져 있는 기독교의 소경 지도자들이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도 거듭난 적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물론 구원은 개인적 체험이기 때문에 오순절주의에 연루된 사람들이 다 구원받지 못했다고 매도하는 것은 아님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니 오해가 없기 바란다. 다만 이 오순절주의의 큰 위험은 이와 같은 외적 경험만을 강하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구원의 증거로 굳게 붙들고 실제는 내적인 거듭남의 경험 없이 열심히 믿으나 지옥을 향하여 내닫는 무리가 많기로 드리는 말씀이다.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경험들이 무엇인가? 몇 가지만 열거하면 방언, 입신, 신유, 투시 등이다. 필자는 20여 년 전에 방언을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물론 구원을 경험하기 전이다. 아무런 뜻도 모르고 아무런 유익도 받지 못하고 그저 내 자신도 알아듣거나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말들을 일정한 규칙도 없이 소리질렀던 것이다. 물론 1시간이나 2시간 기도하고 나면 머리도 맑아지고 기분은 좋다. 그러나 그것이 영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었던가?

   신약성경에 방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이 그것이며 고린도전서 12,13,14장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방언은 하나의 은사요(12:4 이하), 은사는 주님의 필요에 의해 주어짐을 볼 수 있다. 가령 집을 짓는데 기초를 파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하자. 이 사람의 노력으로 기초를 파고 현재 집을 짓는 중이라면 이 기술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은사도 이와 같은 것이다. 사도행전 2장부터 주님이 공중에 재림하실 때까지의 모든 교회를 하나의 건물로 본다면 방언이나 예언 같은 은사는 기초를 만드는 은사라 할 것이다. 신약교회의 근본 지침이 되는 성경이 완성 되기 전에는 이 은사들이 필요했으나 완성되고 난 이후 성령께서는 이 은사들을 의존하지 않고 성경만으로 충분히 교회를 인도하신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린도전서 13:8~10).

   10절의 '온전한 것' 은 '말씀' 임이 분명하다. 기록된 성경말씀이 없어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행동지침을 모르고 방황할 때 예언이나 방언의 은사가 크게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그후 성경이 완성되면서 이러한 은사는 소멸되어져 가게 된 것이다.

   어떤 목사님이 00지역에 석유가 나온다고 예언하여 떠들썩했던 경험을 한국교회사는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 동창 중 하나는 목사님께 예언을 받아보았는데 제주도 해양대학을 가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와 같은 샤머니즘적 기독교가 한국의 기독교를 멍들게 하여 순수한 양떼들을 망하게 하고 있지 아니한가?

      신유의 은사도 그렇다. 수많은 신자들이 거듭난 경험도 없이 신유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초대교회의 신유(병고침)는 성경(신약)이 없는 상황에서 주님을 증거하고 믿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 신유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만약 병고침의 은사가 있는 곳에 참된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병고침의 역사는 거짓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3장 16절에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죄인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 주님의 뜻이지, 병 고치고 건강 축복 받는 것이 주님의 오신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가 두렵고 슬프게 생각하는 것은 진정 저들이 성령으로 행한다면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열매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집안 일은 제쳐놓고 날마다 새벽마다 예배당에만 매달리고 며칠씩 기도원에 쫓아다니므로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다. 보다못한 남편의 책망이 시작되면 주님을 인해서 핍박받는 것이라고 기뻐하고, 남편에게 대든다고 맞아서 멍이 든 얼굴이 주를 위한 고난의 증거라고 자랑해도 되는가?

   오늘날 한국 사람들의 사고 속에 "예수 믿으면 집안 망한다" 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하나님은 가정을 파괴하시는 분이신가? 아담의 아내 하와를 지어 가정을 이루게 해주신 분이 누구인가?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실 때에도 가정을 불러 내지 아니하였던가?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에 롯의 가정을 불러내지 아니하였던가? 하나님은 가정을 파괴하시는 분이 아니고 가정을 세우는 분이시다. 예수 믿는 자신의 경건하지 못한 행위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성령의 열매가 결코 아니다.

   필자가 알고 있는 어느 집사님은 새벽기도에 나갈 때마다 "시어머니 빨리 죽게 해달라" 고 기도를 했다. 그런데 어느 자매가 전해준 복음 테이프를 듣고 구원받은 후 시어머니 앞에서 이 사실을 털어놓고 눈물로 회개하므로 여러 식구가 주님을 믿게 되었다.

   현재 교회의 지체가 되어 있는 자매 중 한 분은 늘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구박받으므로 죽음까지도 생각했으나 어느 날 방문을 걸어 잠그고 "기독교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 고 기도하고 그 후 7개월만에 전도자를 만나 구원을 받았다. 이 자매의 변화를 통해 그 가정이 화목한 가정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것이 진정한 성령의 사역이 아니겠는가? 이혼 직전에 예수님 믿고 새로운 가정으로 변화된 경우는 수없이 많다. 서두에 기록된 말씀대로 진정 성령을 받아서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그러한 곳에는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 당연하다. 요한복음 3장 8절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들려주신 놀라운 말씀이 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바람은 실체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바람이 부는 소리와 나뭇가지의 흔들림을 통해서 그 흔적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이 눈에 보이지 않으나 성령으로 거듭남에는 열매를 통해서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열매가 분명치 않은 교인은 그가 아무리 훌륭한 교인이거나 교회 지도자일지라도 그는 거듭난 적이 없는 쭉정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검토해 보기로 하자. 먼저 갈라디아서 5장 22절을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고 가르친다.

   성령의 첫 번째 열매는 사랑이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에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함은 물론 부모 형제 이웃과 교우 또는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위해 소금의 직분을 다하여 세상을 변화시켜 나갑시다." 하는 내용을 들은 적이 있다

   얼른 듣기에 훌륭한 설교라고 생각될 수 있을지 모르나 이것은 너무나 잘못되었음을 말 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 자신에게 남을 사랑할 만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많은 설교자들이 "사랑하라" 는 설교를 하고 있고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만 실제 사랑을 실천하려 하면 벽에 부딪치고 낙담과 절망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에게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신분도 자격도 인격도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로 고생하고 있는 것이니 이는 휘발유 떨어진 자동차가 앞으로 전진하려 애쓰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인 사랑은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가? 성령님은 더럽고 죄 많은 우리 인생들에게 "사랑하라" 고 요구하는 억지를 쓰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인간은 성령님에 의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에 접근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십자가요 그리스도가 아닌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욥기 25장 6절에서 인생은 "구더기"로 비유되고 있다. 이사야 1장 4절에서는 "부패한 자식" 으로, 시편 14편 1~4절에서는 "가증하고 더러운 자" 로 묘사되었다. 정죄당한 인생이 아닌가!

   용서받기를 기대조차 할 수도 없었던 이 더럽고 불쌍한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거룩하시고 흠 없으신 예수님은 친히 이 죄 많고 고통스런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의 고통을 친히 당하시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임을 당하시기를 자원하셨다. 왜 자원하셨는가? 바로 필자 자신을 위함이며 여러분 개개인을 위함이다.

   이로 말미암아 더럽고 추한 인간이 감히 하나님에게만 사용될 수 있었던 선하고 의롭다고 하는 칭호(마가복음 10:18) 를 받게 된 것이다(로마서 3:24).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어떤 찬송가 저자는 "이와 같이 아름다운 하나님 사랑에 아직 감복하지 않은 자를 사람이라 할까" 라고 썼다.

   이와 같은 사랑을 죄인이 깨달았을 때, 그 사랑이 죄인의 심정에 박혔을 때 비로소 죄인의 인격이 변화를 입게 되며, 이것을 거듭남의 실체라 한다. 이 거듭남은 신분적 변화이며, 신분의 변화로 말미암아 행위에 변화를 가져온다.

   다시 갈라디아서 5장의 열매를 보자. 이렇게 사랑을 경험한 신자는 자기 의지적 노력 없이도, "희락" 이 찾아오는 것이다. 죄인이 의인되었으며, 지옥 자식이 천국의 소유자로 변하였는데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당연히 안팎으로 기쁜 것이다.

   희락 다음으로 "화평"의 열매가 저절로 온다. 이것은 의심이나 불안 요소가 사라진 결과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에게 오는 당연한 결과다. 이제는 의심이 사라지고 오히려 천국의 소망이 마음에 꽉 차게 된 것이다. 그러니 마음에 화평이 올 수밖에 없지 않는가?

   "화평" 의 소망 후에 오래 참음이 온다. 세상에 소망 없는 사람들을 보라. 얼마나 신경질적인가? 시험에 떨어지거나 사업에 망한 사람들을 상상해보면 알리라. 그들은 소망으로 말미암은 화평이 없으니 오래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본래 성격이 훌륭해서 오래 참는 것과 성령의 열매로 참는 것과는 다르다. 성령의 열매는 오직 십자가를 통한 열매이니 만큼 주님을 묵상하고 십자가의 사랑이 내 속에 있으므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베드로전서 2;18) 참조). 십자가를 통한 열매가 아니면 성령의 열매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실례로 바울을 보라. 바울의 성격을 생각해 볼 때 매사에 적극적이고 강력한 추진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러 가는 당당한 모습이 이를 말하고 있으며, 사도행전이나 서신서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혹자는 말하기를 바울이 그런 성격이라 복음을 열심히 전했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의 말을 들어 보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린도후서 5:14).

   이것이 바울 자신의 고백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그분께 드렸으며 그리스도 때문에 살고, 그리스도 때문에 죽고, 그분 때문에 고생하고, 그분의 사랑을 못 잊어 눈물지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의 진면목이다.

   오래 참은 뒤에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는 당연하지 않는가? 주님의 사랑 받는 사람들은 당연히 다른 사람에 대하여 자비하고 양선하며 하나님과 교회와 사람에게 충성하고자 하며 온유와 절제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절제는 마지막에 기록된 열매로 쉬워 보여도 가장 어려운 열매 중 하나라고 생각 된다. 세상 욕심과 죄악과 정욕을 절제하고, 자기의 생각과 주장을 절제하고 주님 말씀 앞에 굴복함이 말처럼 쉬운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오랜 훈련을  통해서 가능하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나오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실을 기억하며 사단에게 속지 말고 절제하여야 할 것이다.

   오, 독자여!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대의 신앙의 본질이 자신의 노력과 수양과 결심으로 말미암았는가? 아니면 순수한 십자가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열매인가? 이것은 그대의 신앙을 저울질해 볼 수 있는 놀라운 말씀이다.

   감나무가 감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고 결심하고 몸부림쳐서 감이 열리는가? 자연스럽게 감을 열지 아니하는가?  왜 그런가? 그것은 감나무이기에 감이 열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성령의 열매도 마찬가지이다. 노력의 결실, 결심의 결실, 새벽마다 예배당에서 통곡하는 눈물의 결실, 날마다 회개하므로 맺는 육신적인 열매들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자연스럽게 성령으로 변화되어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이 말이 이해되지 않는 자는 이해하려 하지 말고 거듭남을 경험하기 위하여 기도하기 바란다. 그러면 그대가 십자가로 변화 받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지옥)에 던지우느니라."

   두려운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시라!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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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다른 복음으로 고통받는 기독교인들이여!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라디아서 1:6).


   바울은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이 진리에서 떠나 급속히 변질되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슬프고 탄식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앞에서 필자는 사람을 따라 다니는 불쌍한 갈라디아인들을 생각하며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여 본 바 있다.

   여기서는 다른 복음에 병들어 있는 갈라디아인들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진단하여 보고자 한다.

   다른 복음! 이것은 분명 복음은 복음인 것 같은데 다른 복음이다. 쉽게 생각할 때 복음과 비슷한 가르침이지만 실상은 그 질과 내용에 있어서 가짜 복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다른 복음에 병들어 있는 사람들의 증상을 살펴봄으로 우리의 신앙을 진단하여 확실한 깨달음이 있기를 원한다.

   참 복음을 듣지 못하고 다른 복음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의 첫 번째 증상은 교회에 다니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뛰어난 것이 많은데 그 중에 폭포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큰 기쁨이 신자들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4장 27절에 약속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하셨다.

   이 약속은 신실하여 오늘날 예수님을 통하여 진실로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세상 종교들의 특성은 인생의 모든 고뇌와 죄악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학대하거나 심신을 단련하는 등, 스스로의 부단한 노력을 권장하고 있다. 자신의 인격과 능력을 의지한 자기 노력으로 평안을 이루려고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수양하는 과정에 있는 종교인들에게 무슨 평강과 기쁨이 있겠는가? 종교인의 얼굴은 세월이 갈수록 심각하여지고, 거듭남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사람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기쁨으로 가득 찬 밝은 모습이다. 우리 자신의 인격이나 성격, 그리고 육신을 들여다 볼 때 기쁨과 소망이 있을 수 있을까? 아니다! 오히려 근심과 절망이 있을 뿐이다.

   어떤 종교는 참 도를 찾아서 방황하다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심지어는 순교자의 반열에 서는 것을 보게 된다. 생각하여 보라! 아무리 종교적 업적을 훌륭히 쌓고 종교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하여도 그의 중심에 참 평안이 없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또는 세상 종교는 그렇다하여도 주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이 참 평강을 가지지 못하였다면 이것은 껍질만 있는 쭉정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다른 복음에 잡혀있는 종교인의 모습은 쭉정이 그 자체다. 쭉정이의 특징은 겉으로는 알곡처럼 보이는데 속은 텅 비어있는 가짜다. 겉으로는 주님의 제자인 듯하나 속에는 내적인 변화가 없이 스스로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는, 변화된 기쁨이 없는 쭉정이 기독교 교인은 물론이요 지도자들도 포함되고 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음을 주목하기 바란다(마태복음 7:21~23).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태복음 3:12).

   최근에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어떤 성도는 죽기 위하여 자살 장소로 가다가 친구 집에 잠시 들러 구원받고 주님을 만난 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어 큰 기쁨 중에 주님을 섬기고 있다.


   다른 복음에 붙잡힌 자의 두 번째 증상은, 기쁨이 없을뿐만 아니라 거듭난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입술로는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지만 그들의 생활에서는 천국의 소망에 붙잡혀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입으로만 그리스도인이지 실제로는 세상 일에 빠져서 천국에 대한 확신과 소망 가운데 사는 모습이 전혀 없는 것이다. 죄 용서받는 십자가의 진리를 기독교 교리 중 하나로 이해하고 있을 뿐 구원의 근원, 즉 생명의 근원이 되는 천국의 열쇠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의 피로 속죄 받고 천국에 가는 진리는 성경의 주제이며 모든 믿는 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깨달아야 하며 늘 감사해야 할 놀라운 말씀이다.

   이와 같이 확실한 구속의 진리를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는 거듭남의 기쁨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확신 중에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천성을 향하여 살아간다. 이것을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 한다. 이말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생활에 무책임하거나 무관심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니 오해 없기 바란다.


   다른 복음에 붙잡혀 지옥에 가는 자들의 세 번째 증상은,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생활을 할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 상담 중 18년 동안 교회에 다녔다는 한 종교인을 만나 성경의 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말씀이지요" 하고 대답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대답인가!

   12년 동안 교회에 다닌 어떤 사람에게 구약은 "옛날에 주신 약속", 신약은 "새로 주신 약속" 이라고 말하니 " 그 말이 그 뜻입니까?" 하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다. 기가 막힐 일이다. 거듭나지 못하였으니 성령이 그 속에 없는 것이요, 그 속에 성령이 없으니 성경이 깨달아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은 성경을 도대체 읽지 않는다. 성경은 예배당에서 설교 때 한두 번 찾아보기 위하여 소지하고 있을 뿐 도대체 읽지 않는다. 바빠서도 그렇지만 그들의 중심에 주님의 영이 없으니 성경을 읽을 의욕이 없는 것이다.

   불쌍하고 불쌍하다. 안타깝고 불쌍하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성경은 교회 지도자나 기타 특정 자격이 있는 사람만 깨달아지는 책으로 치부하고 있으며. 그들의 지도자 또한 그렇게 가르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그들은 성경을 읽어도 깨달음이 전혀 없다. 사실 그들이 소경이기 때문에 깨달음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정상적인 성도라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문제나 잘못을 깨닫고 바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신자들을 바른 길로 깨우치고 인도하는 지침서이다. 모름지기 거듭난 신자라면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깨닫고 실천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디모데후서 3:16).

   성경에 대한 정상적인 깨달음이 없으니 내적인 기쁨과 평강이 없을 뿐 아니라 외적인 변화도 없는 것이다.


   다른 복음에 붙잡혀 있는 종교인들의 네 번째 증상은, 기도응답을 몇 번 경험한 것으로, 혹은 광신적인 체험을 경험한 것으로 구원 얻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그들 중에는 양보할 수 없는 구원의 확신이 있으나 자세히 분석하여 보면 어려운 상황에서 기도할 때 주님의 도우심을 몇 번 경험한 것으로 구원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알 것은 구원받지 아니한 이방인도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기도응답이 구원의 궁극적인 증표가 될 수 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방언이나 기타 신비한 체험을 가지고 구원으로 주장하고 있는바 이것은 다 위험한 신앙관임을 알아야 한다. 초대교회에 특수한 목적으로 주어진 방언이 오늘날 그러한 목적성이 사라진 때에도 존재한다고 보기 힘들다. 방언을 통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계시 받고 하나님을 섬겼고 그러한 섬김의 모습 속에서 서신서들이 기록되었다. 오늘날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증거할만한 분명한 근거도 없거니와 그것이 구원의 증거는 더더욱 될 수 없다.

   신비한 체험들이 구원의 증거가 될 수 없으니 이러한 것들 또한 다른 복음에 잡혀 있는 불행한 현상이다.


   다른 복음에 붙잡혀 지옥으로 가고 있는 종교인들의 다섯 번째 증상은 그들 마음에 있는 무거운 짐을 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집사님과 대화한 내용을 소개해 보겠다. 그 집사님은 자신의 신앙을 나에게 관철시키려고 변론하는 가운데 있었다. 그는 필자에게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길은 얼마나 험난하고 힘든 길이며, 고난의 길이며, 어려운 길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에게 마태복음 11장 28절을 펴서 보여 주면서 "내가 믿는 예수님은 이렇게 모든 짐과 인생의 짐을 다 풀어 주셔서, 나는 기쁘고 평안하게 주님을 섬기고 있는데 당신이 믿는 예수님은 무슨 짐을 오히려 지워줍니까? 그 예수님은 나의 예수님과 다른 이상한 예수님이네요?" 하고 말하니 그 후에는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예수님은 인생의 모든 고뇌를, 모든 죄를 다 담당하셨다. 주님은 거짓말하실 리가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인가! 죄의 짐에 눌려 웃을 날이 없고, 평강이 없으며, 고통 가운데 살던 자에게 주신 기쁜 소식이 아닌가!

   예수님이 그대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것을 지식적으로나 교리적으로는 알지만 그 말씀이 그대의 생활을 변화시키지 못하였다면 그대는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대의 모든 죄를 친히 담당하심으로 그대를 죄와 죄의 고통에서 실제로 해방시켜주셨다. 이제 죄의 굴레가 결단코 그대를 고통스럽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분명히 설정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궁극적 신앙의 대상이다. 그분에게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며 예배하는 것이며 그분의 뜻 안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분 뵈올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천국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요한계시록 21:3).

   우리는 잠시 후에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함께 동참하게 될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무슨 역할을 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이 궁극적 신앙의 대상이라면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구원자요, 인도자이신 것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들림 받을 때에도 예수님께서 친히 공중까지 마중 나오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실 것이다(데살로니가전서 4:16 ; 요한복음 14: 2,3 참조).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셔서 인간의 죄악을 담당하셔야만 하였던가 하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이며, 유일한 걸림돌이 되는 것은 죄악이다.

   "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이사야 59:2).

   이 말씀과 같이 인간의 죄악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교제를 끊는 걸림돌이 되었으니 주님의 십자가의 속죄는 인간에게 최고의 복음(기쁜 소식)이 아니겠는가!

   이 단번에 이루신 십자가 사역으로 인간의 모든 죄가 완전하게 청산되었고 그러므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이 고개를 들 수 있게 되었다. 또는 아주 악질적인 죄인도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인류 역사 6,000년에 최고의 경사가 있다면 주님의 십자가 사역이다. 이일로 말미암아 죄인이 그의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갈 그 어떠한 이유도 사라졌다. 다만 완전한 속죄와 영원한 속죄(히브리서 10:17~18, 9:12)를 믿지 아니함으로만 지옥에 가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영원한 속죄로 말미암아 죄인의 굴레를 벗어버린 사실을 심령으로 깨닫고 믿었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 말씀드리건대 그대는 의인이 되었으며 구원을 받은 것이다(히브리서 10:10~18 ; 요한복음 5:24 참조). 그러므로 지옥과 인연이 끊어졌고 죄악과도 인연이 끊어졌다. 하나님은 그대의 영원한 아버지와 보호자가 되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그대의 영원한 구원자가 되신 것이다.

   그분은 세상에 계실 때에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복음의 실체다. 당신에게 참된 기쁨을 주실 수 있는 구세주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그대도 받아들이고 주님의 참 제자가 되었기를 바란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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