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윌리암 맥도날드

                                                   8장

                    하나님이 에콰도르에서 어떻게 말씀하셨나?


   짐 엘리엇은 하나님의 뜻이 걸린 문제에 있어서는 정말 분별력이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온전한 헌신을 방해하는 일체의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태도를 밝히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교지로 부르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부르고 계신 걸까요? 그는 전 세계 모든 선교지와 접촉을 하고 있었으므로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두 군데로 선택이 좁혀졌습니다. 그 동안 그는 월프레드 티드마쉬라는 연로한 에콰도르 선교사와 자주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그곳의 케크와 원주민을 위해 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있었습니다. 또한 인도 방갈로 지방의 롤랜드힐에게 편지를 띄웠더니 그분 반응도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짐의 마음은 두 선교지 사이에 있었습니다.


   1950년 6월 여름 언어강좌 시간에 어느 선교사가 와서 에콰도르의 아우카 원주민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짐은 그 얘기를 집중해서 듣다가 "마음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는 인도인지 에콰도르인지 분명한 길을 보여 달라고 열흘을 정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음은 그 때 그가 적은 글입니다.


   "요즘은 비전으로 가득하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기 위해서 마땅히 이뤄져야 할 위대한 '의무들'이 내게 계시되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내 주변의, 사실상 하나님 말씀을 벗어난 것들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 또 부분적으로는 성경에 기록된 이상적인 부흥의 예들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 아, 이 현 상황에 비춰볼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지! 주여, 주께서는 내 심령에 거듭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그리고 나는 믿는다. 이렇게 멀리서 겨우 바라보는 그 많은 '의무들'을 성취함으로써 주께서 주의 이름과 주의 말씀과 주의 방법의 놀라움을 증명하실 줄을 믿는다.


   7월 4일, 짐은 에콰도르로 가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 분명히 말씀해달라고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열흘 후 출애굽기 23장을 읽다가 다음 말씀이 눈에 띠었습니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20절).


   일반 독자에게는 이 말씀이 분명한 확증처럼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모든 인도하심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약속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치 않았습니다. 짐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말씀을 대하자 강렬한 느낌과 함께 약속에 대한 단순한 믿음이 생겼다. 나는 그 말씀을, 내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에콰도르로 가겠다고 티드마쉬에게 편지를 보내야 한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였다."


   여러분은 그의 나머지 생애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1956년 1월 8일 그와 네 선교사 동료들(Jim Fleming, Ed McCully, Nate Saint, Roger Youderian)은 아쿠아족이 살고 있는 쿠라리예 강변에 가서 그 석기시대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다가 창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오래 살았을 때보다 그 죽음을 통해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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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윌리암 맥도날드

                                           4장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한 버트


   버트는 처음 클라우디아를 만났을 때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마음과 양심에 역사하셔서 하나님 나라에 아주 가까운 마음 상태가 되었습니다. 클라우디아는 전혀 믿을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버트를 처음 만났을 때 마음이 끌렸으며 버트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녀를 평생의 반려자로 삼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버트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둘이 함께 구원받고 함께 주님을 섬길날을 고대했습니다. 그녀는 쉽게 그를 따라 교회에 갔고 그리스도인들과 쉽게 어울렸습니다. 버트는 그녀와의 관계가 원만하게 진전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모든 일이 아주 순조로웠습니다.


   여러 주가 지나면서 버트의 마음에는 죄에 대한 각성이 생겼습니다. 그는 더 이상 그런 상태로 머물 수 없었습니다. 어느 주일 복음을 듣다가 버트는 마음에 결정을 내려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는 집회 후에 전도자를 찾아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클라우디아가 그 일을 보고 자기도 구원받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여러 자매님들이 그녀에게 몰려와  이제 두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함께 주님을 섬기게 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버트는 원래 열정적인 기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말씀을 파고들고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클라우디아는 한 동안 열심을 내다가 이내 시들어버렸습니다. 버트는 그녀가 성경을 읽는데 아무 관심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일시적인 상태로 넘겨버렸습니다. 버트가 장로들에게 침례상담을 청하자 클라우디아도 함께 침례 받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장로들은 그녀와 상담하기 위해 여러 번 시간을 마련했지만 번번이 그녀의 시간에 맞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은 그녀의 경우를 예외로 인정하고 그녀를 버트와 함께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침례식 자리에서 버트는 그녀의 간증이 허술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회개를 했다든지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천국 소망이 되었다든지 하는 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얘기뿐 주 예수님에 대한 얘기는 거의 없었습니다.


   버트는 의심을 애써 무시하고 약혼과 결혼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갔습니다. 사랑이 문으로 들어오자 이성(理性)이 창문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확신은 없었으나, 만일 클라우디아가 참 신자라면 주님께서 결국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경건의 시간에 이사야 30장 1,2절을 읽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

   주님께서 버트에게 직접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주님께 여쭙지 않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결혼을 막아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버트는 결혼하고픈 소망이 남달리 강했습니다. 그는 혼자 될까봐 두려웠습니다.


   3개월 후 어떤 형제가 버트에게 고린도후서 6장 14절을 보여주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버트는 결단을 못 내리고 우물쭈물거렸습니다. 그 말씀은 그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행동을 멈추도록 계속 경고했습니다. 적신호가 깜박거렸습니다.

   클라우디아가 버트를 위해 생일파티를 준비했습니다.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술도 준비한 아주 떠들썩한 파티였습니다. 그녀의 친구들도 왔고 교회 사람들도 왔습니다. 분위기가 이상했고 모두들 어색해했습니다.


   파티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형제가 버트와 차를 마시면서 고린도후서 6장 14~18절을 간략히 설명해주었습니다. 버트는 이번에는 주님께서 확성기로 그의 주의를 깨우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침내 버트는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갈 수 없다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클라우디아의 삶에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삶에 이루시는 변화의 증거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생활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전혀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런 얘기를 편지로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이제 끝나야 했습니다. 버트는 가능한 부드럽고 다정하게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왜 자신이 그런 갈등을 불러오는 행동을 그만두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된데 대해 미안함을 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호소의 글로 편지를 끝맺었습니다.


   불행히도 클라우디아는 그 일을 회개의 기회로 삼지 못하고 완전히 불신앙의 길로 나갔습니다. 버트는 그녀가 얼마 후에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도 그녀의 배우자도 주님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버트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이 누리는 큰 평화를 경험하고 믿음이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그는 모든 감정적인 혼돈을 극복하고 주님을 삶의 첫째자리에 놓고 그분 안에서 만족을 발견하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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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           성

                                                F. 스마아트  &   J. 영


                           제 2 과


                         여성의 범죄와 그 결과(창세기 3장)


   창세기 3장을 공부하기에 앞서 2장 16,17절을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이것은 해도 좋지만, 저것은 해서는 안된다' 하신  하나님의 분부가 아주 분명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경고하셨습니다. 도덕적 존재로서 창조된 최초의 인간은 순종과 불순종이라는 선택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할 수도 있었고, 불순종하며 제멋대로 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듯이 우리도 일상 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최초의 남녀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거처로 주셨던 아름답고 풍요로운 동산에서, 얼마 동안이나 평화스럽고도 의좋게 살았는지 알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평화는 깨어졌고, 대신 비극이 찾아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여자 때문이었습니다.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던 금단의 과실 나무 가까이에 있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 과실을 따먹으면 어떻게 될까를 이리저리 궁리하면서 서성 거렸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랬다면 유혹하는 자에게 있어서 이는 안성 맞춤의 기회였으며, 이러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사단이 이를 놓칠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혹에서 가능한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며, 죄의 유혹을 받을 만한 일에는 섣불리 접근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    혹


   뱀은 교활한 질문과 거짓말로, 여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모두 의심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손대지 못하도록 금하신 것이 있지 않느냐? 왜 그러셨는지 아느냐? 네가 그것을 먹는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불행이 닥쳐오겠니! 하나님께서는 다만 네가 하나님처럼 위대해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실 뿐이야! 이 과실이 얼마나 맛있는데 그래! 보라구, 보기에도 얼마나 아름다우냐! 이것만 먹으면 넌 지혜롭게 될거야!'

   이처럼 뱀은 욕심과 교만에 호소하며 하와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죄


   하와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하와가 뱀의 그 모든 제의에 대해 잠깐만 깊이 생각해 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거늘 어찌 감히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할 권리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젖혀놓고 사단의 말을 믿는 그 순간에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녕 죽으리라" 고 말씀하셨지만, 뱀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와는 하나님의 음성보다 다른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하나님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와는 마침내 하나님이 베푸시는 모든 자비를 외면했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를 저버린 채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남편까지도 이 일에 끌어들였습니다.

   한편 주 예수님이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던 때의 사단의 접근 방법이 하와가 당했던 경우와 너무나 유사했음을 유의해 보십시오(마 4:1~10). 사단은 세 차례나 주님을 시험하면서, 하나님께서 주님께 주시지 않았던 권세와 명예와 재물을 주님 스스로 취하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 번 모두 하나님의 말씀만을 인용하고 의롸하심으로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단과 어떠한 논쟁도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오늘날 우리를 유혹하는 데에도 이와 똑같은 수법을 사용합니다. 세상에 반짝이는 것들을 우리 앞에 흔들어서 우리로 그런 것에 욕심을 내도록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에 대하여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육신의 정욕과(하와에게는 그 과실이 먹음직스러워 보였습니다.) 안목의 정욕과(하와에게는 그 과실이 보암직스러워 보였습니다.)  이생의 자랑이니(하와에게는 그 과실이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습니다.)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16)고 경고했습니다. 우리가 이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은 오직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 생깁니다.

   결론적으로 하와는 하나님께 범죄했을 뿐 아니라, 아담을 무시하고 행동함으로써 아담에게도 범죄하였습니다. 이렇듯 하와는 아담이 행사하게 되어 있는 지도권을 남용함으로써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고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본분에서 이탈하게 되면, 우리는 무질서와 근심외에 다른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범죄의 결과


   하와의 범죄는 즉각적으로, 이전에 가졌던 순수한 상태가 수치감과 죄책감으로 대치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 죄로 인한 최초의 증세는 부부 관계에서 나타났습니다(창 3:7). 곧 이 죄는 창세기 2장 23~25절에 나타난 부부 일체의 원리를 파괴한 것입니다.

   뱀이 그들에게 선악을 알게 되리라고 꾀었던 대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선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이를 실천할 힘은 없었으며, 그들이 악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이를 물리칠 힘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죄의 궁극적인 결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죽음이었습니다.

   이 죽음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즉시로 이들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영적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둘째, 세월이 지난 후에 그들은 육체적인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 곧 영원한 죽음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높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 했으나(창 3:5), 도리어 죽음과 더불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11절에서는 이와 대조적인 사실을 보게 됩니다. 주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공부하시는 여러분도 하나님의 강하신 손 아래 스스로 겸손하십시오. 때가 되면 그가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벧전 5:6).

   이렇듯 죄가 들어오게 되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행복한 관계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이들 최초의 남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피해 숨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후부터 지금까지 그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은혜로 도우시며, 축복해 주시려고 우리 인간들을 찾고 계십니다.


                    범죄로 인한 형벌


   하나님께서는 이 범죄 사건에 관련하여 세 가지 대상들 즉, 뱀과 남자와 여자를 각각 다루시되, 뱀과 땅은 저주하셨지만(창 3:14,'17) 남자와 여자를 그렇게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옛 뱀(계 12:9)이라고 불리우는 타락한 사단의 상징으로서, 뱀을 보다 하등한 돔물로 격하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사단의 최후 운명에 대해서는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 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창 3:15).

   또한 남자에게 내리신 형벌은 그가 평생토록 가장 보람을 가지고 해야 할 근로가 이제는 고통과 수고와 피로를 수반하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그의 몸이 흙에서 지음을 받았던 대로 흙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형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자에게 내리신 형벌은 근본적으로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본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창 3:16). 즉, 여성으로서의 특유하고도 축복된 기능, 곧 어머니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데에 고통과 슬픔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여성들은 언제나 자녀를 갖고자 하는 강한 갈망이 있습니다. 여성으로서의 그의 소원을 성취할 수는 있었지만, 그 때마다 죄로 인해 당하게 되는 고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슬픔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남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변화가 와서, 이제는 남편의 권위에 복종하며, 다스림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죄를 지을 때에는 하와가 지도자였고 아담이 하와를 따랐으나, 이제는 하와가 아담에게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창조의 질서에 있어서 아담에게 지도적 권위가 부여되어 있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하와가 아담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타락한 이래로 결혼에 대한 갈망, 그리고 결혼에 의한 종속이 여성 대부분의 숙명처럼 되어왔습니다. 여성사, 특히 비 기독교 국가에서의 여성사는 굴종과 멸시, 천대의 기록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들어와서 남성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킴으로, 이러한 굴종과 멸시의 역사가 근본적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러한 형벌의 선언 가운데 16절에서의 고통, 수고라는 낱말과 17절에서의 수고라는 낱말은 한가지로 정신적이고도 육체적인 고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형벌이 내려졌다는 점에 있어서는 남녀간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즉 피로와 고통을 견디면서 처절하리 만큼 수고하는 것이 남녀 모두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비취어오고 있는가를 유의해 보십시오. 비록 여자가 먼저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구속 사업의 일익을 담당하는 영예를 안겨 주셨습니다. 여인의 후손, 곧 사단의 희생 제물이 되었던 하와의 씨가 바로 그 사단을 멸망시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창 3:15). 우리는 이 약속의 성취를 히브리서 2장 14절의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셨다는  말씀에서 보게 됩니다.


                         현대 여성의 지위


   죄악이 가득한 인간 본성에 의하여 살아가고 있는 타락한 세상 사람들에게는 권위가 확립되고 유지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이는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국가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남자가 가정의 머리가 되어, 그 가정의 안녕과 질서에 대한 권위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리는 궁극적으로 결혼 생활과 사회 생활 전반에 걸쳐 유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해보겠다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이에 유의해서 처신해야 할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믿는 아내에게 이러한 여성의 지위에 대해 더 상세하게 교훈해 주십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2~24)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상세히 상고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 지적하려는 것은 이것이 영구적인 원칙으로서 복종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의 축복을 위해서 그렇게 계획하셨다는 점입니다.

   여성 중에 몇 사람이나 참으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전 가족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완전히 책임을 지겠노라고 결단을 내리고 그 길을 선택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체질'(시 103:14)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성으로 하여금 조력하도록 계획하셨고, 조력하는데 알맞게 하셨을 뿐, 한 가정의 가장으로 계획하셨거나 세우시지 않았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 관한 한, 창세기 첫머리에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결혼한다는 것은 여성에게 있어서 예나 지금이나 정상적인 일입니다. 폐일언하고, 여자를 창조하신 순서에서 보나 여자를 창조하신 목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여자의 본분은 남자를 '돕는 배필' 로서의 역할, 곧 후원적이고 보조적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엘리사벳 엘리오트(Elisabeth Elliot)는  "나는 모든 남성이 아주 강인하고, 지성적이고, 유능하고, 덕망이 있고, 거룩해서 남성 우위가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남성 우위란 그들의 훌륭함과 무관한 천부적인 지위임을 알고 있다" 고 술회했습니다.

   아직도 복종의 개념이 좀체로 깨달아지지 않으십니까? 복종하라신 하나님의 명령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명령을 깨달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일상 생활에서 평안을 누리며 사는 비결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친히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주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9)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번뇌가 그치기까지


                                                 주님의 평온을


                                                 새벽 이슬처럼 내려 주소서 !


                                                 우리의 심령에서


                                                 긴장과 초조를 제하여 주소서 !


                                                 그래서


                                                 우리의 단정한 생활로



                                                 아름다움을 나타내게 하소서 !


                                                                                          J. G. Whitt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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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곳간 원리

                                              크리스천의 부자원리

                                                         앨 잰들. 밴 크로치 지음-김성겸 옮김

                                                                      홍성사


앨 잰들Al Jandl

          목사를 위한 위한 목사요, 21세기비전리더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개척한 리빙스톤즈 교회Living Stones Church는 텍사스 주 알빈 전역을 대상으로 지역사회를 위한 다양한 봉사 활동을 하고 있으며, 리빙스톤즈 기독학교(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를 갖춘 학교), 프레셔스 스톤즈 어린이 집, 빅토리 캠프장을 운영한다. 그의 삶은 단순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부르짖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놀라운 전환점들을 목격한 인생의 표본이다.


밴 크로치 Van Crouch

           '밴 크로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컨설팅 회사의 창업자요, 유능하고 유명한 연설가이다. <포춘>지가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들, 정부 기관, 프로 스포츠팀,교회 단체, 전 세계 경영 및 판매업 컨벤션 등에 인기리에 초청되어 생각을 자극하는 각종 세미나와 기조연설 등을 도맡고 있다. <Stay in the Game>, <Winning 101>, <Dare to Succeed> 등의 저자이기도 하다.


p197-200           리치 그라델의 사연


   다음의 사연은 오클라호마 주 브로큰에로우의 한 목사님이 보내 주신 간증이다.


   제가 처음으로 밴 크로치로부터 곳간 원리에 대해 들은 것이 2003년이었습니다. 크로치 목사는 곳간 원리가 그의 인생과 사역에 가져온 변화들에 대해 들려주었습니다. 또한 그것에 동참한 다른 사람들의 긍정적인 변화들에 대해서도 나누었습니다.

   변호사이자 공인회계사, 공인자산관리자, 그리고 이제 오클라호마 주 브로큰에로우에 위치한 뉴 비기닝 패밀리 교회New beginning Family Church의 목사가 된 저로서는 곳간 원리야말로 제가 만나 왔던 성공한 사람들 대부분이 살아온 방식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인들도 꼭 적용했으면 하는 원리였습니다.

   제가 직접 성경을 읽으며 연구해 본 결과 곳간 원리의 적용이 교회와 개인과 가정과 사회, 심지어 정부까지도 혁신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균형 있고 정확한 '부'의 개념입니다. 이 원리는 돈을 사랑하지않고도 성공과 함께하는 '편안한 삶'을 이루어 내며 욕심과 물질주의를 배제한 진정한 부를 창출합니다. 또, 순수한 동기에 근거한 하나님과의 동행을 가능케 하며 우리 주님에 의해 언제든지 사용될 수 있는 준비 상태를 갖추게 합니다. '곳간 사람들'은 성공의 두 가지 핵심 요소를 갖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절제하는 라이프스타일이며 또 하나는 저축하는 습관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 '자제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백성인 우리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준비할 수 있도록 '곳간'의 메시지를 전하고 계신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요즘 세상은 옛날 같지 않습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직장을 여러 번 바꾸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중산층 미국인들이 실직이나 갑작스런 질병으로 인해 파산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재정적 불확실성 때문에 두려워하며 삽니다. 곳간을 세운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 부부는 곳간 원리를 우리 삶에 적용하는 일에 전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메시지를 들은 우리 교인들의 삶 속에서도 이미 놀라운 발전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물질적인 면만이 아닙니다.

   곳간 원리는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식을 혁신하는 실질적인 길입니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이 원리를 무시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돈 문제를 그냥 무시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재정의 문제를 하나님의 영역 밖에 둔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으고 소비하고 저축하는 삶에서도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실 때 비로소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왜 돈과 같은 사소한 것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방해받아야 합니까?

   앞으로 저와 여러분을 포함하여 곳간 원리를 적용한 '곳간 사람들'의 영적, 물질적 삶 속에 어떤 역사가 일어났는가 하는 간증들이 더욱 풍성해지길 기대합니다.                       리치 그라델 목사

                                                                                                                                                                               


   곳간의 모험을 시작하라


   수년간 이 원리를 대중에게 가르치면서 이에 대한 사람들의 세 가지 반응을 보게 된다. 첫째 부류는 "지금 당장 공과금조차 내기 힘든데 어떻게 곳간을 시작한단 말인가! 이건 불가능해. 미친 짓이야"라고 말한다. 또는 "글쎄, 지금 10달러를 은행에 저축하면 그래봐야 이자가 1~2퍼센트밖에 안 되는데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목돈이 생기나?"하고 비웃는다. 그런후 이들은 그냥 늘 살던 대로 살아갈 것이다. 남은 평생 그때그때 벌어먹기 바쁘거나 심지어는 파산에까지 이르기도 할 것이다.

   둘째 부류의 사람들은 즉시 나가서 곳간 계좌를 개설한다. 처음 몇 개월 동안은 수중에 들어오는 모든 수입의 일부를 부지런히 저축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정말 갖고 싶은 마음에 드는 물건을 보거나 또는 친구들과 어디로 여행 갈 기회가 찾아오게 되면 모아 둔 돈을 미련 없이 거기에 날려 버리고 만다. 그러고는 곳간을 다시 시작하려 하겠지만 곧 그렇게 해 봐야 별 소용이 없다고 느끼게 된다. 왜냐 하면 아무리 부지런히 모아 봐야 그들의 미래에 재정적  안정을 가져올 정도로 큰 돈이 모일 가망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이는 기껏 모은 돈을 늘 뭔가 갖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일에 써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셋째 부류의 사람들은 나가서 이 원리를 1년,2년,5년 심지어 10년 동안 꾸준히 적용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복이 넘치고 넘치게 된다. 하나님이 그들의 곳간에 복을 명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지내는 한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역사를 놓친다. 왜냐하면 그들은 깜짝 놀랄만한 갑작스런 기적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백하건대 우리에게 지금껏 벌어진 역사는 상당히 깜짝 놀랄 만한 눈부신 일이다. 우리가 경험한 재정적 복은 활실히 기적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서도 동일하게 역사하신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저 받을 복만 생각한다면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 삶 속에서 적용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 내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점이다. 당신 역시 이 원리를 삶에 적용한다면 그와 동일한 일이 당신에게도 벌어질 것이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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