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총'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5.07.28 갈라디아서 -제8과 종이냐 자유자냐
  2. 2015.07.06 갈라디아서 제5과 율법과 약속

갈라디아서


                              제 8 과

                           종이냐 자유자냐(4:17-5:1)


동기의 대조(4:17-20)


4:17 거짓 선생들의 동기는 바울과 달랐습니다. (4:17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그들은 추종자들을 원했지만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의 영적인 부요함에 관심이 있었습니다(4:17-20). 거짓 선생들은 갈라디아인들의 열정을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했기에 그들의 동기가 진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너희를 쫓아내기 원한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너희를 이간붙여" 라고 되어있음-역자주)는 구절에 다비역에는 "우리에게서" 가 더해져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인들을 사도바울에게서 떼어놓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추종자들을 원했고 그 추종자들을 얻기 위해 분파를 형성하려 했던 것입니다.

4:18 결론적으로 바울은 "나는 내가 없을 때에라도 순수한 동기와 선한 목적으로 행하는 한 다른 사람들이 너희 가운데에서 사역하는 것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4:19 갈라디아인들을 자기의 자녀들이라고 부름으로 바울은 자신이 그들에게 그가 그리스도를 나타내준 사람인 것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그들을 위한 해산의 고통을 다시 겪는 것은 그들의 구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목적입니다(엡 4:13; 골 1:28).

4:20 이 구절은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의 참된 상태에 대해 알기 원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그들이 진리에서 떠났다는 것에 바울은 의심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 대하여 분명함과 확신함을 가진 음성과 말로 바뀔 수 있게 되길 바랐던지 아니면 그의 편지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반을할지 몰랐던 것같습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말하는 것이 더낫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면 그의 음성의 높낮이를 바꿈으로 자신을 더낫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의 책망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부드럽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거만하고 완고하게 된다면 그는 엄하게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그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며, 그의 메시지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어떻할지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종으로 매는 율법주의(4:21-31)


   거짓 선지자들이 아브라함을 그렇게 중요시 하여 신자들이 그의 할례받은 본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바울은 아브라함의 가정 역사를 통해 율법주의는 종된 것이며 은혜와는 섞일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와 그의 아내 사라가 매우 늙었지만 한 아들을 낳을 것을 약속하심으로 자연히 자녀들을 갖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의롭게 되었습니다(창 15:1-6). 얼마 후에 사라는 아브라함이 약속된 아들을 기다리는 것을 방해하게 되어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계집종 하갈을 통해 자녀를 갖도록 제안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녀의 충고를 따랐고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사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초조함과 세속성과 신뢰의 부족에 의해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창 16장).

   그 후,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었을 때,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이 탄생은 분명히 기적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창 21:1-5). 이삭의 젖떼는 통상적인 의식을 치루었을 때, 사라는 이스마엘이 자기 아들을 희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고 말함으로 이스마엘과 그의 어미를 집에서 내쫓으라고 했습니다(창 21:8-11). 이것이 사도바울이 지금 갈라디아서에서 시작하려는 논증의 배경입니다.

4: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이 구절에 나오는 "율법"은 두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로는 거룩에 이르려는 수단으로서의 율법을 제시하였고, 그 다음은 율법서인 구약성경(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을 말하는 것으로 특히 창세기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내게 말하라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는 자들아 율법책의 메시지를 듣지 못하였느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4:22 (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두 아들은 이스마엘과 이삭입니다. 계집종은 하갈이며 자유하는 여자는 사라입니다.

4: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계획적인 간섭한 결과로 태어났습니다. 이에 반하여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비유적인 이야기는 처음 보기보다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참된 의의는 명백하게 진술된 것이 아니라 암시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과 이스마엘에 대한 참된 이야기는 바울이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깊은 영적 진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두 여자는 두 언약입니다. 하갈은 율법의 언약이고 사라는 은혜의 언약입니다. 율법은 시내산에서 주어졌습니다. 너무도 묘하게 "하갈" 이라는 말은 아랍어로 "바위" 를 의미하며 아랍인들은 시내산을 "바위산" 이라고 부릅니다. 시내산에서 주어진 언약은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계집종인 하갈은 율법에 대한 알맞은 모형입니다.

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율법의 모형인 하갈은 유대나라의 도성이며 여전히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구원받지 못한 이스라엘인의 중심인 예루살렘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그들의 추종자들을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믿지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라보다는 하갈에게, 이삭보다는 이스마엘에게 연결시킴으로 그 특성을 신랄하게 묘사하였습니다.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의 어머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의 도성은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든 신자들의 본향입니다.

4: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이사야 54:1에서 인용한 이 구절은 하늘 도성의 자녀들이 지상 예루살렘의 자녀들보다 더 많아질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사라는 오랫동안 구로치 못하고 홀로 사는 여자였습니다. 하갈은 "남편있는" 여자였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라 또는 하늘 예루살렘의 최후의 승리를 알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율법아래 거하는 하갈의 자녀들보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포함된 약속의 자녀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참된 신자는 사람의 뜻으로나 육체의 뜻을 따라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난 자들입니다. 이것은 셀 수 있는 자연적인 후손들이 아니라 주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기적적으로 태어난 것을 말합니다.

4: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린 것같이 언제나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을 핍박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 의해 받은 우리 주님의 고난과 사도바울의 고난을 생각하십시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린 것이 우리에게는 하찮은 잘못으로 보일 수 있지만 성경은 그것을 기록하였고, 바울은 그것에서 늘 존재하고 있는 육체와 성령 사이의 불화를 보았습니다.

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라디아인들에게 성경을 언급함으로 그들은 율법과 은혜는 섞일 수 없으며, 사람의 공로나 육체의 노력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복을 유업으로 이을 수 없다는 판결을 듣게된 것입니다.

4: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는 수단으로서의 율법과 어떠한 관계도 없습니다. 그들은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들이며, 그들은 그 어머니의 사회적인 조건들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자(5:1)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4장의 마지막 구절은 자유자라는 신자들의 신분을 묘사하였습니다. 이 5장의 첫구절은 자유한 자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그의 처신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 우리에게 율법과 은혜의 차이에 대한 아주 훌륭한 예가 있습니다. 율법은 "네가 자유를 얻으려면 네가 자유자가 되어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너는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매우 큰 대가를 치르고 자유하게 되었으니 이제 주님께 감사하며 너를 자유자로 만들어 주신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 안에 굳게 서라" 고 말합니다. 율법은 명령하지만 행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제공함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신분에 맞는 삶을 살 수 있게 합니다.

   C. H. 매킨토시는 "율법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 능력을 요구하여 만일 그가 그것을 나타내지 못할 경우 그를 저주한다. 복음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어 그것을 나타내는 사람에게 복을 준다' 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은 명했네, '달려라 그러면 살리라' 고

   그러나 내게는 다리도 팔도 주지않았네.

   훨씬 뛰어난 복음의 소식이 오자

   내게 날으라고 명했네, 날개를 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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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제 5 과


                       율법과 약속(3:10-18)


   4과에서 우리는 이 서신의 네 주요 부분을 살펴보기 시작하여, 복음의 위대한 진리(3:1-18), 갈라디아인들의 경험에 대한 고찰(3:1-5), 그리고 구약성경의 증거(3:6-14)를 살펴 보았습니다. 구약성경의 증거에 대해서 10-14절에서 계속해 살펴보겠습니다.

3:10 바울은 성경에서 율법은 결코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저주할 뿐임을 보여주었습니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 구절은 "율법을 범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행위에 속한 자"를 말하는 것으로, 율법에 순종하는 것을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고 애쓰는 모든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저주아래 있는 자"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입니다. 신명기 27:26절에는 "기록된바...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자"라고 말씀되었습니다. 이는 하루나 한달 혹은 일년동안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 율법을 항상 행해야 하며 완전하게 지켜야 합니다. 다만 십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오경에 있는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 합니다.

3:11 거짓 선생들은 다시한번 구약성경으로 반박되었습니다.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의 성경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율법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사람을 의롭게 하셨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신약성경에 있는 원어로 그 인용구절을 문자적으로 읽어보면 "믿음에 의한 의인은 살리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은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살 것입니다.

3:12 율법은 사람에게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또한 그 계명들을 지키도록 노력하라고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엄격하고 완전하고 완벽하게 레위기에서 가르치고 있는대로 분명하게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원리와는 대조됩니다. 율법은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고 말합니다. 믿음은 "믿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고 말합니다. 바울의 논증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는 구절은 이상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준수를 통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13 속량(deliver)은 다시 사다 또는 구하다, 대가를 지불하다라는 말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계명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인 율법의 저주는 사형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에 의해 요구된 사형의 형벌을 갚으심으로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구하셨습니다. (바울이 "우리" 라는 대명사를 사용했을 때 비록 유대인들이 모든 인류를 대표하지만 우선적으로 믿는 유대인들을 말한 것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킨들란 존스는 "갈라디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반정도만 샀다고 생각했기에 그 나머지 부분을 그들의 할례와 다른 유대 절기와 의식들에 복종하여 사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거짓 선생들과 기독교와 유대교를 혼합한 것에 속히 이끌려 들어갔던 것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완전히 속량하셨다' 고 말한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참으심으로 그들을 속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사람들의 대속자이신 주님께 임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죄인이 아니셨지만 사람들의 죄가 주님께 놓여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 동안 십계명을 완전히 지키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성경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신 것으로 여기심을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 무서운 사형의 저주를 참으심으로 사람들을 율법에서 건지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없는 곳에는 어떠한 구원도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특히 죄인으로 나무에 달린것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의 표시라고 가르칩니다(신 21:23). 성령님은 그 구절을 구주께서 피조물들을 위해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실 예언으로 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어느쪽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신 채 하늘과 땅 사이에 달리셨습니다.

3:14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며 또한 그를 통해 온 세상에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아브라함의 복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참된 은혜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죽음의 형벌이 치뤄져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다가올 수 있기 위해 주 예수님은 저주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아브라함의 후손) 안에서 모든 족속이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성령님을 말한 것이 아니며 바울이 여기에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조건 없는 구원의 언약 안에 포함 되어 있는 성령님의 은사입니다. 이것은 시작입니다. 성령님은 율법이 막고 있는 한 오실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이 오시기 전에 죽으시고 영화롭게 되셔야 했습니다(요 16:7).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해 나타냈습니다. (1) 갈라디아인들의 경험과 (2) 구약성경의 증거, 사도바울은 이제 일상 생활로부터 한 예를 들었습니다.


단순한 인간 약속에 대한 의무(3:15-18)


   이 단락에 대한 바울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속한 지상의 모든 가족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약속에는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창세기 22:18에서 하나님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씨" (단수)라고 말씀하시고 "씨들" (복수)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직계후손인(눅 3:34)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은 조건이 없는 것으로 선한 행위나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단순한 약속입니다.

   430년 후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이 약속에 어떠한 조건을 더하거나 어떻게든지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일에서도 옳지 않은 일인데 하나님의 일에는 더욱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주시는 복의 약속은 율법 준수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집니다.

3:15 사람의 일에서도 어떤 언약이나 뜻에 서명을 하고 인을 치면 누구도 그 문서를 바꾸거나 더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15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만일 사람의 언약도 어기지 못할진대 하나님의 언약은 얼마나 더 어렵겠습니까!

3:16 유대주의자들은 비록 그 약속이 원래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이스라엘 백성) 믿음에 의해 주어진 것이지만 그 동일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에 율법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주장한 것이 분명합니다.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래서 갈라디아인들도 원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이제는 십계명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 "씨" 라는 단어는 단수입니다. 그 단어가 때때로 군중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여기에서 그 단어는 한 사람인 바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을 때 이러한 것을 보지 못할 지라도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조명해 주십니다)

3: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조건이 없는 것으로 어떠한 행위에 의존된 것이 아닙니다.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아브라함과 그 씨(그리스도)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오실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며 그러므로 그가 의롭게 된 것입니다. 사백년이 지난 후에 주어진 율법은 이 구원의 약속에 어떻게든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율법은 그 약속을 폐하거나 어떠한 조건도 더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유대주의자들은 그 약속을 한지 사백 삼십년 후에 율법이 온 것은 그 약속이 무효가 되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제안했을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약속은 뜻과 같은 것이며, 죽음으로 확증된 것입니다(희생의 언약으로 창 15:7-11과 히 9:15-22을 보십시오). 이것은 결코 폐하여질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18 이 430년은 언약이 제정된 때로부터 계산된 것이 아니라 이 언약이 마지막으로 확증된 때 즉 야곱에게서부터 계산된 것입니다(창 46:1-4).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유업은 믿음에서 나지 않으면 행위에서 난 것입니다. 그것은 두가지 모두에서 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에게 조건없는 약속을 주심으로 그것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서 난 유업은 구원을 동반합니다. 그것은 조건없는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어떠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배제됩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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