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 칼럼] 합리로운 기독교 신앙을 소망한다
정재영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종교사회학) l 등록일:2016-01-13 16:59:22 l 수정일:2016-01-15 17:31:57
▲정재영 교수 |
또 다시 새해가 밝았다. 언제나 새해가 되면 마음속에 한두 가지 소망을 품는다. 개인적인 소망도 있지만 기독교인으로서 한국 교회를 바라보며 품는 소망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한국교회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으면 하고 바랄수도 있고, 어떤 이는 한국교회가 침체기를 벗어나 제2의 도약을 했으면 하고 바랄수도 있겠다. 올해 9월에 2015년 인구센서스 결과가 나올 예정이고, 이때 10년 사이의 종교인구 변동도 발표될 것이지만 그 결과를 긍정적으로 전망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성장세가 꺾인 종교가 반등을 하는 경우는 좀체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가질 수 있는 소망은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기보다는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위대한 종교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그에 걸맞은 역할을 감당하기를 바라는 것일 것이다. 사실 초기 한국 개신교는 교회나 기독교인이 숫자상 많지 않았고, 주류 종교가 아니었음에도 사회를 선도하며 큰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나 전체 인구의 20% 가까이 차지하며 주류 종교의 위치로 올라서면서 오히려 여러 가지 위기 징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이것은 개신교회가 주류 종교가 되면서 신흥종교로서 가지고 있었던 순수함이나 절박함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개신교가 기성종교가 되어버린 것이다.
종교사회학의 관점에서 볼 때, 한 종교가 탄생했을 때에는 기존 질서를 혁파하며 새로운 정신과 가치를 앞세워 사회를 이끌어나가지만 주류에 편입하게 되면 더 이상 이러한 참신함이나 혁신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기존의 가치에 동화되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결국 종교가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인 초월성이 사라지게 되어 종교로서의 의미 자체가 약화되고 그 종교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면 이 종교는 다른 종교의 도전을 받게 되고 그 중심적인 위치를 다른 종교에 내어주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 교회가 바로 이러한 처지에 놓여 있다. 아직은 국내 2대 종교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전래 130년 만에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작년 한해를 돌이켜보더라도, 한국교회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우리 사회의 아픔에 동참하며 삶의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교회가 자기들의 왕국을 만들어놓고 스스로의 세력을 유지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듯이 비치고 있다. 또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입장을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저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이에 동의하는 않는 사람들을 윽박지르는 모습에 가까웠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 교회를 ‘불통’의 종교로 여겨지게 할 것이다.
합리로운 기독교 신앙
한국교회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해왔지만 열심히 하면 할수록 사회와의 간극이 더 벌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언어와 사회의 언어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계몽주의 이래로 인간의 이성을 중시해 온 인류의 역사는 믿음보다는 관찰과 실험에 기초한 과학적 사고를 발전시키며 사회를 종교로부터 독립시켜나갔다. 흔히 종교는 ‘믿음’에서 출발하지만 과학은 ‘의심’에서 출발한다고 표현된다. 여기서 ‘의심’한다는 것은 사람을 의심한다는 것이 아니라 뉴튼이 사과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의심했듯이, 당연시되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종교와 과학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려왔다. 사람들은 점차 모호한 언설로 표현되는 종교보다는 분명하고 합리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과학적인 사고에 더 설득되어왔다.
여기서 우리는 ‘합리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합리적’이라고 하는 것을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목적 합리적’인 측면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근대 서구 사회의 발전을 ‘합리화’가 진전되는 과정으로 이해한 고전 사회이론가인 막스 베버(Max Weber)는 인간의 행위에는 ‘목적 합리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가치 합리적’인 행위도 있음을 설파하였다. ‘가치 합리적’인 행위란 외부자가 볼 때는 합리적이지 않아 보이는 행위도 특정의 가치 체계 안에서 보면 그 나름의 합리성을 가진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대표적인 보기가 바로 종교 행위이다. 보기를 들어 십일조를 드리는 기독교인들의 행동은 비기독교인들이 볼 때에는 매우 합리적이지 못한 행위이다. 소득의 십분의 일은 적지 않은 돈이므로 종교단체에 기부하기보다는 더 높은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으로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생각은 단순히 십분의 일만 하나님께 바친다기보다는 소득의 십분의 십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 위에 하나님의 주권을 표현하는 상징의 뜻으로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기독교의 가치 체계 안에서 ‘이치에 맞는’, 즉 ‘합리로운’ 행위인 것이다.
사회와 소통하자
신앙을 모두 이성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의 논리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이성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신학 중에서 조직신학이 이러한 작업을 하는 학문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의 언어를 보편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곧 우리 사회에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논리와 표현을 개발해야 한다. 교회의 입장을 드러낼 때 단순히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이라는 방식보다는 그것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충분한 이유를 설명해줘야 한다.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은 똑같은 말이라도 맥락이나 상황(context)에 따라서 아주 다르게 들릴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의 관점에서 주장하거나 행하는 일들이 특정한 상황에서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내 믿음대로 행동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한 영화에서 부정한 일을 행하는 언론인이 “주여! 혜안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대목이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더욱이 기독교계 안에서조차 자신의 입장과 다른 사람에 대해서 비성경적이라고 몰아붙이며 인격 모독에 가까운 표현까지 써가며 비하하는 일들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성경을 매우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성경을 인용하거나 심지어는 그 뜻을 곡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신앙에 대한 생각이나 관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공동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것이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다양한 교단과 교파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독교 진리는 특정인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윽박지르기보다는 합리적인 이성으로 대화하며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새해에는 한국교회가 보다 합리로운 신앙의 전당이 되고 우리 사회와 소통하는 참다운 종교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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