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강단]
세상의 대접
-한 봉 래-
"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행 21:27-30).
바울은 드디어 체포됩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믿는 유대인의 오해를 풀기 위해 나실인 의식을 하기 위해 성전 안에 있다가 오해받아 체포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을 위해 전도하다 체포된 게 아닙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이 믿는 자에게 얼마나 본능적으로 적대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변명하지 않고 잡힙니다. 즉 그의 생애는 장렬하다기보다 작은 문제에서 하나님 뜻을 따르는 삶을 삽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삶을 사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마 26:59-65). 주님도 죽일 죄목이 없었습니다. 거짓 증언의 터무니없는,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고소로 사형판결을 받습니다. 그들이 기껏 택한 죄목은 "성전을 헐고 3일에 짓겠다'는 주님 말씀입니다. 이는 사람을 죽일 죄목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사장의 질문에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답을 하셔서 죽음의 길로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진리와 믿음에 대해 적대적임을 주님이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고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사 53:7).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요 8:45-46). 세상은 진리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옳고 그름을 제시해주면 승복하리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진리가 자신에게 손해를 주면 싫어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죄인이라고 지적하니 거부한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39-40, 44). 유대인은 성경마저도 영생으로 가는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성경을 안다는 자기 자랑으로 사용했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알았다면 주님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영광을 구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 천국을 원치 않습니다. 구원 받은 우리만 이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시험은 이런 형태로 오게 됩니다. 왜 나만 이 고생을 하는가? 다른 사람은 적당히 잘 사는데, 혹은 왜 세상은 이 꼴인가? 미국같은 좋은 나라는 그렇지 않을 텐데. 우리는 이 세상의 공격, 다른 사람(성도)의 형통으로 시험에 들어 내가 가야 할 길을 방해 받지 말아야 합니다.
최고의 시험은 주님이 광야에서 받은 시험일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10).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배고픔, 명예, 권세가 아닙니다. 시험은 의식주, 목숨,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이 경로를 통해 정작 건드리는 것은 메시야 직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이를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이 이일을 이루시는 데 가장 힘든 것은 배고픔, 사람의 모독이 아닌 종의 신분입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 는 시험에 대해, '내가 이를 못할 줄 알아?' 하고 만들면 이는 종의 위치를 이탈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은 항상 '하나님만이 나를 지키시고, 나는 하나님을 순종한다' 는 답을 합니다. 우리도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야지, 반대하고 모독하는 자에게 설명하거나 공격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가능한 한 오해를 막으려 하나 잡히면 반항하지 않고 잡혀갔습니다. 회당에서 전도하다 반대하면 이방인에게로 갔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해 예루살렘 교회의 영접을 받고 맨 처음 율법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바울의 복음이 유대인의 믿음을 반대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결례를 행합니다. 이에대해 우리는 이같은 의문이 듭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한 바울이 왜 이같은 타협을 하는가?' 이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고전 9:19-23). 목숨을 걸고 주를 섬기는 목표를 실제로 이루기 위해 이 과정을 가야 합니다. 주를 섬기는 것은 결국 모든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하나님을 아는데로 나오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오해와 멸시를 피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지식, 이해, 분별력을 상대방을 위해 절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이 말은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억을하게 갇혀서 하는 말입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베어버린 말고의 귀를 다시 고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눅 22:51).
우리는 사람 앞에서 믿음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합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공정하게 갚으실 것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에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아직 내 믿음이 어린 탓입니다. 누가 뭐라 하는가와 상관없이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게 바울의 잡힘입니다.
아무도, 심지어 가족도 알아주지 않고, 이 세상에서 보상 없는 길을 혼자 가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이 길을 어떻게든 못 가게 막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 때 우리는 주님이 당하신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가장 억울하신 분은 주님입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모독을 받으신 것입니다. 세상의 반응이나 조롱과 반대로 인해 우리(교회)가 가야 할 길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내 믿음이 성경 대로인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원하는 것을 알고, 어리석은 생각으로 옆으로 새지 않고, 똑바로 주님 앞에 가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교회) 삶에 나타나고 하나님이 그 계획을 우리 생애(교회)를 통해서 이루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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