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내라고, 한 걸음, 힘내자고, 한 걸음, 그러자 정상이었다
아샤푸르나 남벽 신루트 개척, 강가푸르나 남벽 고난이도 신루트 등정월간마운틴
글 박정용 대원, 사진 원정대 입력 2016.12.13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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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헉~’ 등 뒤에 있는 멋진 마차푸차레를 바라 볼 여유도, 배낭 안의 물을 마실 기력도 없다. 어떠한 생각도 없다. 오직 발걸음을 내 딛을 뿐이다. |
작년 가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이전에 두 번의 히말라야 원정 등반, 2004년 로체 남벽과 2008년 마칼루를 같이 오른 창호형이었다. 내년 봄에 안나푸르나 히말 쪽으로 등반을 가자는 내용이었다. 형은 마칼루에서 나에게 등정할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줬다. 그래서 평소 고마움을 가졌었고 이 원정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자 흔쾌히 간다고 했다. 난 이 대답이 알파인 스타일 등반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때는 잘 알지 몰랐다.
우리가 등반하려는 아샤푸르나(7140m), 강가푸르나(7455m)는 네팔 서부 안나푸르나 산군에 위치해 있다. 강가푸르나는 1965년 독일대가 남면~동릉루트로 초등한 이래 2015년까지 25개 팀이 시도하여 8개 팀이 성공했다. 한국은 1984년부터 3번의 등반시도가 있었고, 1986년 봄 시즌에 엄개성-남난희, 석채언-정영희가 독일 초등루트로 등정했다.
원정대의 주목표는 베이스캠프로부터 3400m높이의 강가푸르나 남벽에 신 루트로 오르는 것이다. 우린 그전에 미등봉인 아샤푸르나 등반을 통해 고소 및 등반환경에 적응할 계획을 세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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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3400미터의 표고차 강가푸르나의 벽으로 진입하고 있다. |
9월 12일 출국한 우리는 빠르게 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베이스캠프로 올라가는 길은, 이 길이 왜 13년 전 마지막 원정대의 발길이였는지를 곧 바로 알아차릴 만큼 험했다.
안나푸르나 남벽의 빙하에서 흘러나오는 10여미터 너비의 모디콜라 물살은 귀청이 멍하도록 울렸다. 늦은 오후 쿡인 치링 보테와 창호형은 거칠게 넘실대는 물살을 버티며 대나무 장대로 다리를 만들었다.
다음날 무너질 듯이 흘러내리는 물살에도 무사한 다리를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리를 만든 대원, 베이스캠프 스태프, 로컬포터가 등반도 시작하기 전에 크게 다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급경사의 길은 오히려 쉽게 느껴지고 한 숨 돌리려고 하니 20m 길이의 산양이나 다닐만한 바위 절벽이 나타났다. 앞서 있던 치링이 길이 너무 미끄럽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것도 잠시, 포터들이 한둘 모여들어 보조 로프로 포터들이 잡고 내려갈 매듭을 만들었다. 모두 조심스럽게 짐을 자일에 매달아 내리고 절벽을 가로질러 건너간 다음 하강했다. 그리고 한 번 더 나온 빙하 강은 티롤리안 브릿지로 건너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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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캠프로 가는 접근로는 험했다. 모디콜라의 강물 위에 10여 미터의 다리를 설치하는 대원과 현지 스태프. |
베이스캠프에 들어선 지 이틀이 지나 ‘뿌자(무사안일을 기원하는 의식)’를 지냈다. 이후 열흘간 3번의 고소적응과 루트 관찰을 통해 등반을 위한 준비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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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샤푸르나와 강가푸르나 사이의 남릉으로 어프로치 했다. |
나는 다음날 정상으로 향하는 등반에서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어질 것 같은 생각에 캠프에 도착해서 형들에게 여기서 기다릴 테니 두 분이서 다녀오시라고 이야기했다.
다음날 오후에 힘들게 루트작업하고 돌아온 형들이 같이 가자고 달콤한 말로 권하는 게 아닌가. 아! 내가 이리 심지가 약한지, 반나절 쉬면서 아샤푸르나를 바라보니 ‘벽이 점점 가까워 보이네’ 이런 생각도 한몫을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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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허공으로 뻗어서 앉은 자세로 긴 밤을 안전벨트에 확보를 하고 졸아야 했다. 기온은 영하 18~20도였다. |
하루라도 놓치면 빈손으로 돌아가야
10월 8일 새벽 1시 30분쯤에 등반이 시작됐다. 벽의 경사도는 예상보다 두 배는 가팔랐다.(항상 실제상황은 생각과는 달리 그랬던 것 같다.)
새벽의 등반으로 얼어붙는 손을 쉴 새 없이 흔드는 사이 아침햇살이 온몸을 감쌌다. 오르면 오를수록 손과 발이 점점 느려지고 제자리에서 숨 쉬는 시간이 길어지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6900m대에 올랐을 때 창호형이 어떠냐고? 갈 수 있겠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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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파른 아샤푸르나의 남벽을 연등 방식으로 올랐다. |
일주일의 휴식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체력이 70~90% 소모된 상태에서 이를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힘들게 내려간 MBC(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서 3일간의 휴식은 기력을 되찾는데 도움이 됐다.
석문형은 장염으로 인한 설사로 고생하다가 한국인 트레커에게서 얻은 약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난 국내에서 훈련 중 무릎인대를 다쳐 많이 회복됐으나 고소에서 다시 재발해 절뚝거리는 상태에서 찜질, 뜸, 마사지, 테이핑 등으로 상태를 호전시키려고 노력했다.
10월 16일 다시 베이스캠프를 떠났다. 이번엔 6박7일이고 각 날짜마다 올라갈 높이가 정해져 있었다. 만약 하루라도 놓치면 우린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첫날부터 문제가 생겼다. 첫 캠프지에 두고 온 아이스바일이 안 보였다. 결국 30여분 만에 찾으니 형한테 혼은 났지만 그래도 찾아서 다행이라 안도하며 그렇게 첫날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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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푸르나 벽으로 연결되는 미로같은 빙하에서 길을 찾아나가고 있다. |
셋째 날은 긴 설사면을 가능한 끝까지 오르는 것이다. 한번 아샤푸르나의 긴 루트에서 혼난 게 몸에 남아있어 더욱더 집중하여 올랐다. 오르긴 올랐건만 텐트자리는 보이지 않아 설사면에 매트리스로 벽을 세워 그 빈 공간에 눈과 얼음을 채워 겨우 엉덩이만 걸칠 정도로만 자리를 만들어 텐트를 세웠다. 전날까지 우리는 3.8kg의 텐트를 사용하다가 이날부터 보다 작은 2인용 1kg대를 사용했다. 그래도 1/3은 허공에 떠 있고 2/3만 가파른 벽에 붙어있었다.
난 그 다음 작업으로 바위틈사이로 졸졸 흐르는 물을 스노우바를 깔대기 삼아 수통으로 받았다. 그러는 중에 그늘이 지고 손에 물이 젖으니 곧 내 몸도 급격하게 추워지는 게 아닌가. 놀래서 형들이 쳐준 텐트에 들어가 몸을 덥히니 다시 정상컨디션으로 돌아왔다.
텐트 안에서는 발을 허공으로 뻗어서 앉은 자세로 긴 밤을 안전벨트에 확보를 하고 졸아야 했다. 버티고 버티다 옆으로 누우려고 석문형을 살살 밀어내다 떨어트릴 뻔해서 곧 또 다시 앉아야 했다.
넷째 날은 300~400m의 고난이도 벽을 오르는 날이다. 첫 피치 수직 빙벽은 속이 비어 ‘텅~텅~’ 큰소리를 냈다. 창호형은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그나마 위험이 작은 구간은 후등자 확보 없이 선등했다. 그 후 믹스구간과 빙벽으로 된 오버행 쿨르와르를 오르고 부서지는 눈사면을 온몸으로 오르자 7100m대의 예정된 높이에 다다를 수 있었다. 등 뒤로 헬리콥터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낙석만이 등반 고도를 온몸으로 되새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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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샤푸르나에서 나 때문에 마지막 한 부분을 못 갔는데 이번에는 그럴 수 없다고. 다시 한걸음 깊은 숨 한 번, 정상이었다. |
다섯 째날 드디어 정상으로 향하는 날이었다. 형이 컨디션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런데 어제의 안 좋았던 몸이 다시 정상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도리어 기분은 좋기까지 했다. 아침의 상태는 내게 거짓말이라도 한 걸까? 300m를 오르는 동안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몸이 힘들어 하고 있었다. 정상 아래에서, 형이 힘내라고, 같이 가자고, 포기하지 말라고 독려했다. 고민을 길게 할 수는 없었다. 난 다시 바일을 콱 쥐고 한 걸음을 옮겼다. 힘겹게 10걸음 옮기자 또 다른 생각이 날 휘어 감았다. 포기하자고, 포기하라고, 생각이 메아리쳤다. 가쁜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또 한쪽에선 이렇게 속삭였다.
아샤푸르나에서 나 때문에 마지막 한 부분을 못 갔는데, 이번에는 그럴 수 없다고. 힘내라고, 힘내자고. 점점 생각조차도 사라졌다. 다시 한걸음 깊은 숨 한번, 다시 한걸음 깊은 숨 한 번, 이렇게 한번 다시 한 번, 한번 다시 한 번. 그러자 정상이었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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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푸르나 남벽에 개척한 ‘코리안웨이’ 개념도. |
글 박정용 대원, 사진 원정대 / emountain@emount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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