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19장
자매들의 태도는?
오늘날 세상에는 여성의 권리를 향상시키려는 여권운동이 크게 일고 있습니다. 이 장의 목적은 그러한 운동을 자세히 살피려는 것이 아니라 지역교회에서 그런 경향이 두 가지 점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자매들의 너울 쓰는 문제는 이제까지 논란거리가 되어왔습니다. 어떤 자매들은 성도들의 모임에서 머리에 너울을 쓰는 것을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없으며 또 오늘날 시대에 부적합하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편견에 근거한 낡은 관습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전도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사람들은 주장합니다.
성경에 근거가 없는 전통을 고집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자매들이 머리에 쓰지 않고, 형제들이 머리에 쓰는 규례는 하나님 말씀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가르침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발견됩니다. 여자들의 너울은 그 장에서 언급된 세 가지 상징물 중 하나입니다. 다른 두 가지는 떡과 잔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중요한 문제이며, 또한 우리의 편의대로 받아들이거나 무시할 수 있는 가르침으로 격하시켜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린도전서 11장의 후반부가 전반부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할 권리를 부여해주었을까요?
바울은 이 고린도전서 11장 서두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머리됨의 질서를 제시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머리됨(headship)이 뭐지요? "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에게 인치신 질서입니다. 그분의 모든 행사에는 질서와 권위가 나타나 있습니다. 창조에 있어서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며 그리스도는 남자의 머리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질서를 부인합니다. 세상은 주님이 만물의 머리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합니다. 세상은 성경에 계시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혹은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 최고라고 믿습니다.
믿는 자들이 함께 모일 때 하나님이 정하신 머리됨의 질서와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따라서 남자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그의 머리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타나고, 오직 그분의 권위만이 인정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여자는 그녀의 머리인 남자는 감취어진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 머리를 가립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남자가 머리를 가리면 그 머리를 욕되게 하고 그로써 주님을 욕되게 한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머리를 가리기를 거절하는 여자는 하나님이 정하신 머리됨의 질서를 무시함으로써 남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매들이 머리를 가린다고 해서 곧 여자가 남자보다 덜 영적이라거나 여자가 성경을 잘 모른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그 상징에서 여자의 열등함이 선포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 상징은 단순히 창조의 질서와, 남자와 여자의 역할상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을 나타낼 뿐입니다. 두 역할 모두 중요하며, 그것이 인정되는 것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제기되는 반론은,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너울은 여자의 긴 머리라는 주장입니다. NIV성경은 그런 뜻을 내포한 각주를 싣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4절의 각주는 "쓰는 것(covering) 대신에 "긴 머리" (with long hair)라는 표현을 삽입하여 "무릇 긴 머리를 한 채 예언하는 남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Every man who prophesies with long hair dishonors his head)라고 옮겨놓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후의 본문에서 쓰는 것을 모두 긴 머리로 대치시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자세한 검증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이 15절에서 여자의 머리카락(덮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는 머리 위에 덮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와 아주 다릅니다. 여자의 머리카락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가리는 것'(cloak), '싸는 것' (wrap), '덮개'(mantle)를 뜻하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머리 위에 덮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머리 위에 얹어놓는 것(top-covering)을 뜻하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사실을 접어두고라도, 쓰는 것이 여자의 긴 머리라고 믿는 것은 6절을 이상하게 만드는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6절은 "만일 여자가 머리카락을 깎거나 밀었다면, 그 머리카락을 깎을 것이요" 라고 읽혀지게 됩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대하는 신령한 자매들은 자매들과 형제들에게 부과된 의무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모든 집회가 아닌 일부 집회에서만 너울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복음집회나 소규모 성경공부모임이나 청년집회 등에는 너울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보여줍니다. 신자들이 영적인 활동을 위해 모인 곳이 어디든 장소를 막론하고 반드시 자매들은 머리에 너울을 써야 합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모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경험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그분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에게 어린 딸이 있다면 그 애도 집회에 나올 때 너울을 써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 애가 아직 구주를 영접하지 않았거나, 혹 영접했다 해도 교회의 지체로는 공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들에게 신자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가르칠 필요가 있으며, 너울 쓰는 것도 그러한 기르침의 일부입니다.
때때로 너울이 얼마나 커야 하느냐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너울의 크기는 머리를 덮을 정도면 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하는 자매는 그런 너울을 즐겨 쓸 것입니다. 조그만 천을 머리에 살짝 올려놓고 일부만 덮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충분히 드러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천사들로 인해 이러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고린도전서 11장 10절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천사들은 사단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려다 타락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자와 같아지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천사들은 지역교회의 모임에서 성도들이 사단이 멸시한 진리를 기쁨으로, 자원해서 순종하고 인정하는 것을 하늘 전망대에서 내려다봅니다. 성도들이 모일 때, 천사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나 남녀 사람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봄으로써 교육을 받습니다. 그러한 놀라운 사역에 참여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지요.
또 한가지 문제는 지역교회의 모임에서 자매들이 침묵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자 빌립에게 예언하는 딸들이 있었다는 것과(행 21:8,9),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여자가 기도나 예언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는 사도 바울의 말씀과(고전 14:34), 디모데전서 2장 11,12절의 동일하게 명백한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도자 빌립의 딸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지역교회에서 예언을 했다는 기록이 일절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4절에서 여자들이 교회 집회에서 공적으로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닙니다. 11장에서 바울이 다루고 있는것은 너울 문제입니다. 영적인 은사를 활용하는 문제는 14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자매들이 잠잠하는 문제를 14장으로 넘긴 것입니다.
자매들의 공적인 참여를 허락하기 위해서 어떤 지역교회들은 기도집회와 말씀집회를 폐하고 그 대신 가정집회롤 나눠서 모이도록 권장합니다. 장로들은 온 교회가 한 곳에 함께 모여 기도드리고 말씀을 배울 수 있는 집회를 소집할 책임이 있습니다.(고전 11:17~20). 그 일에 실패하는 것은 지역교회의 장래를 그르치는 것입니다. 지역교회가 여러 그룹으로 나눠지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가르치는바가 아닙니다.
이런 문제들이 자매들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 그들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달리 행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상고하고 그 가르침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거역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어린 신자로서 우리는 다른 모든 문제처럼 이 문제에 있어서도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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