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기상을 품은 순수의 땅 몽골
나는 몽골에서의 삶과 여행을 늘 그리워한다. 몽골에서 살며 그들 언어를 배우고, 풍습을 익히고, 함께 먹고 자며 지낸 시간이 언제나 그립다. 고비의 황무지와 홉스골 호수, 테를지 국립공원, 다르항 가는 기찻길에서 보던 게르(천막집)가 눈에 선하다. 초원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피어 있던 에델바이스도 ‘소중한 추억’을 더한다. 몽골 초원에서 눈으로 보던 바람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멀리서 다가오는 바람은 ‘휘’ 소리와 함께 초원의 풀을 눕히며, 볼을 애무하고 지나갈 때 사람의 눈에 흔적을 남긴다. 휘휘한 겨울밤엔 사각사각 눈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치 귀뚜라미가 날개를 비비대는 소리처럼 들린다. 여름밤에는 은하수가 내를 이루어 흘러가듯 하늘을 가로지르고, 초원의 밤에는 유성우가 마구마구 떨어져 바구니에 밤하늘의 별을 가득 담을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나 그리운 몽골에서의 시간들
지나가는 나그네를 무작정 불러들여 아이락(일본인이 마유주라고 잘못 번역했음)을 권하는 몽골 노인의 순수한 인심이 생각난다. 길을 잃을까 봐 떠나가는 손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문 밖에서 기다려주는 주인의 인정도 그리워한다. 혹시라도 길을 잘못 들면 말을 타고 한나절을 달려와 바른 길을 알려주고 가는 젊은이의 친절함도 잊지 못한다. 가다가 배가 고프면 먹으라고 귀한 아롤(유제품)을 싸주던 주인 여자의 손길도 아련하게 떠오른다. 가난하지만 함께 살아야 한다는 칭기즈칸 때부터 내려오는 인간 존중의 삶이다. 모든 일에서 인간이 중심이고,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참 좋아했다. 밤이면 달빛 아래 둘러앉아 수수께끼를 풀고, 우리의 밤 윷놀이처럼 샤가이(양의 복사뼈)를 던지면서 놀던 때도 그립다. 고비를 달리는 낙타의 거친 숨소리엔 위대한 몽골인의 천 년 역사가 녹아 있고, 므릉에서 홉스골 호수로 가는 산길에서 본 늑대의 날카로운 눈빛에선 몽골인의 기상을 느낀다. 국내선 여객기의 프로펠러 소리와 겹쳐지는 뚱뚱한 몽골인의 넓은 가슴도 나에겐 인상적이었다. 분초를 다투며 사는 우리와 달리 모든 약속 시간을 “마르가시(내일)”란 말로 넉넉하게 잡는 그들의 생활이 여유롭고 정겨웠다. 조금 안다고 아는 체하지 않고 겸손을 담아 “미트구이(모른다)”라고 정확하게 답하던 소녀의 얼굴에 낀 홍조가 노을에 오버랩 된다. 조금만 있어도 덜 가진 자를 온갖 짓으로 억누르고 모욕하는 ‘갑질’에 신물이 나 여행길에 나선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아무것도 없지만 당연한 듯 “바학구이(없다)”라고 말하는 그들이 더 당당하다. 가진 것보다 더 큰 자존심과 세계를 제패했던 영광을 지닌 그들이 더 원대한 꿈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겨울처럼 혹독한 몽골의 경제 위기,
서로에게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여행
올해가 몽골로 여행 가기 가장 좋은 해일 것이다. 우리도 경험했던 외환 위기로 몽골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얼마 전에는 몽골도 우리 국민이 나섰던 ‘금 모으기’와 비슷한 운동을 시작했다. 국민 모두가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1990년 개방 이후 어려운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성장을 이어오던 몽골 경제가 최근에 자원의 국제 가격이 하락하면서 어려움에 처했다. 1달러라도 더 필요한 그들에게 도움도 줄 수 있고 높아진 달러 가격으로 효율적으로 여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와 같이 몽골 반점을 가진 그들이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나가도록 도와주는 사랑이 필요하다. 몽골인은 4계절 이야기를 자주 한다. 혹독한 기후와 맞서 살며 얻은 지식 때문이리라. 봄과 관련해 몽골인은 “설날 다음은 봄”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또 “변덕 심한 어린 여성 같은 날씨”라고도 말한다. 설날 무렵 기온은 영하 30℃ 이하로 내려가며 ‘세계 여성의 날’인 3월 8일에도 최저 기온은 영하 20℃를 밑돈다. 그럼에도 봄을 노래하는 것은 긍정적인 삶을 살겠다는 몽골인의 다짐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봄을 즐길 준비를 하지만 몽골의 봄은 아직도 멀리에 있다. 이 무렵 기후의 변화는 엄청 변덕스럽다. 저장해둔 식량도 거의 동나 가축에게서 새 젖을 짤 때까지 몽골인의 삶은 정말 팍팍하다. 보릿고개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는 실감이 덜하겠지만 이때가 몽골에서는 ‘젖고개’이다. 몽골인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 여름에는 몽골 어디를 가나 풍요롭다. 가는 곳마다 먹을 것이 그득그득 쌓여 있고 가축은 통통하게 살지고, 물산은 넘쳐난다. 집집마다 가축의 젖을 짜서 만든 유제품이 그릇마다 가득하다. 이때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생산에 동원된다. 7월 중순에 3일을 쉬는 이 나라 최고의 축제 ‘나담’에는 모두가 맘껏 즐긴다. 낯모르는 사람이 찾아와도 집집마다 아이락을 한 사발씩 내놓는다. 어디를 가나 사람이 넘쳐 교통편과 숙박시설을 찾기 어려운 계절이다. 이때는 초원에 생기가 가득하다. 한편으로는 ‘화무십일홍’을 잘 알아 혹독한 겨울을 대비하는 유목민의 손길이 매우 바빠지는 시간이다. “나담 이후 가을”이라는 말이 있어 생산을 독려한다. 기나긴 겨울을 날 채비를 서두르고 가을의 끝자락에는 살찐 양을 잡아 집집마다 갈무리한다. 겨울이 되면 몽골인들이 표현하는 “81일간의 길고 혹독한 겨울”을 넘겨야 한다. 황소 뿔이 얼어서 부러진다는 추위가 올 때면 초원의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하지만 생명은 질겨 그 혹독한 기간에도 양들은 앞발굽으로 눈을 헤쳐 부썩 마른 풀잎을 뜯어 먹으며 견딘다.
인구 증가 정책의 일환인 공녀에 얽힌 이야기
역사 이래 몽골족은 인구 증가가 최우선 정책이었다. 힘이 있을 때는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점령국에서 아이를 생산할 수 있는 공녀를 받아들였다. 그에 얽힌 이야기도 참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 기황후와 한나라 왕소군 이야기를 들 수 있다. 기황후는 고려 여인이 원나라에서 황녀까지 올랐던 것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유래한 것이 ‘환향녀(還鄕女)’ 이야기란다. 환향녀가 음이 변해 ‘화냥년’이 되었다고들 말한다. 한편 중국의 4대 미녀 중 한 명인 왕소군은 한나라 궁녀였다. 그녀는 미모가 특출했고 성품도 온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나라는 몽골족과 화친하는 외교 수단으로 궁녀를 보내기로 약속했고 초상화를 보고 간택하는 관례에 따라 그녀가 낙점되었다. 그런데 이때의 선발이란 미녀를 뽑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추녀 경쟁이었는데, 미모의 왕소군이 선발돼 황실이 발칵 뒤집혔다. 초상화를 그리던 화공들이 뇌물을 받은 궁녀들의 얼굴은 곱게 그리고 뇌물을 건네지 않은 궁녀들은 아무렇게나 그렸던 것이다. 왕소군이 몽골로 떠나기 전 인사차 황제를 찾아온 날 황제가 왕소군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고 단정한 용모였다. 남에게 주자니 아깝고 갖자니 부담되는 그런 여인이 아니라 품에 안고 있기도 아까운 여신 같은 궁녀였다. 눈물을 흘리며 떠나는 왕소군을 인계하는 황제의 가슴은 찢어졌고, 왕소군이 오히려 황제를 위로해야만 했다. 왕소군이 떠난 뒤 황실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뇌물을 받고 그림을 그린 화공은 물론, 그동안 황실에서 자행된 뇌물죄를 다 밝혀냈다. 왕소군의 무덤과 동상은 내몽고 자치주의 수도인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 외롭게 서 있다. 그녀는 죽어서도 고향의 푸른 초원을 잊지 못했다. 비록 몸은 메마른 내몽고 땅에 묻혔지만 무덤에는 푸른 풀이 돋아난다고 한다. 그래서 무덤 위의 정자 이름도 ‘청총각’이다.
‘아내를 빌려주는 나라’라는 충격적 제목의 슬픈 진실
졸저 몽골 리포트 <아내를 빌려주는 나라>가 출간된 지 20년이 넘었다. 책이 나올 무렵에는 몽골과 수교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몽골을 제대로 알리는 자료가 거의 없었다. 그 책이 몽골 소식에 목말라하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줬고, 거리로는 가깝지만 심정적으로 멀리 있다고 느꼈던 몽골을 우리 곁으로 불러 온 계기가 됐다. 책이 출간되자 첫 번째 반응은 주한 몽골대사관 영사로부터의 전화였다. 그는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고 대뜸 “책 제목이 그게 뭐냐?”며 항의했다. 당시 국내에선 한창 성 문란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책을 읽었느냐”고 물었더니 “아직 보지 못했다”는 대답에 “읽고 나서 연락하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 후 전화는 다시 오지 않았다. 책을 읽고 내용을 그대로 인정한 것인지, 공무원들의 전형적인 ‘귀차니즘’ 때문에 그만두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제목만 보았다면 많은 사람이 그 나라를 모욕한다고 느낄 만도 하다고 생각한다. 몽골인의 삶도 우리와 생각과 행동, 느낌이 같다. 정확하게 말해 세상에 자기 아내를 빌려주는 종족은 물론, 사람도 없다. 아무리 생각이 모자라도 자기 아내를 어떻게 남에게 물건처럼 내어줄 수 있을까. 책 제목을 보고 사람들은 “에스키모가 그렇게 한다는데 몽골도 그러냐?”면서 나를 쳐다봤다. 그때 사람에 따라 눈빛의 의미도 참 제각각이었다. 나는 그들의 눈빛에서 질시, 경멸, 호기심, 의아함 등등을 느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된 영화 <바렌>의 영향이었다. 1960년에 제작된 이 영화의 원제는 ‘The Savage Innocents’이며 지금도 구글(Google)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영화에서 에스키모로 출연한 안소니 퀸은 선교사에게 아내와 동침하라고 권했고, 거절하는 그를 죽였다. 선교사는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길 수 없었고, 에스키모는 살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풍습대로 한 것이기에 선교사가 죽었다 해도 순진한 에스키모의 풍습이므로 ‘무죄’라는 줄거리다. 영화를 통해 이렇게들 알고 있었는데 책 제목으로 아내를 빌려준다고 했으니 주한 몽골대사관의 영사가 당황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제목을 지을 때 몇 사람과 협의하고 토론도 했다.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보자는 단순한 이유로 정한 제목이었다. 각 언론에서는 흥미를 가졌고 기사로 소개됐으며 방송의 대담 프로그램 등에 출연할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초기 판매 부수는 예상보다 약간 밑돌았다. 알고 보니, 오히려 제목 때문에 부진했다. 내놓고 책을 들고 다니기에 민망한 제목이었다고 한 친구에게서 들었다. 내용은 정말 슬픈 이야기다. 교통이 발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은 배우자를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반경 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몽골인도 역시 같았다. 남쪽 고비나 북쪽 산악 지방에서 결혼 상대를 찾다 보면 몇 대만 내려가도 사방 몇 백 킬로미터 이내에는 혼처가 없었다. 가능하면 피가 덜 섞인 상대를 찾아 자녀를 결혼시키려고 했지만, 세월이 오랠수록 혼처를 찾기는 어려워졌다. 그 결과 우생학적으로 점점 열성 유전자가 나타나는 경우가 늘었다. 그래서 종족의 우수함을 계승하기 위해 아주 순수하며 단순한 방법으로 생각해낸 것이 씨받이 행사였다. 멀리서 손님이 오면, 그가 가족과 함께 묵는 동안 손님의 여러 가지 면모를 관찰해 씨를 받았다. 학식, 인품, 인물 등 모든 요소가 고려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남녀가 눈이 맞아 몰래한 사랑은 벌로 목숨을 잃어야 했으니 씨받이와는 분명 다르다. 몽골은 지금도 지구상에서 인구밀도가 지극히 낮은 곳 중의 하나다. 현재 몽골의 국토 면적은 156만㎢가 넘지만 인구는 고작 300만 명(2016년 유엔 통계)이다. 1㎢당 인구밀도는 1.9명이다. 이 중 울란바토르에 몰려 사는 인구가 전체 인구의 반에 가까운 138만 명이며, 울란바토르와 다르항 등 도시에 몰려 사는 인구가 72%를 넘다 보니 시골에서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 지금도 이런 상태인데 역사를 100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인구밀도는 현재보다 훨씬 낮았을 것이다. 몽골은 워낙 험지인 데다가 의료시설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고(현재 영아 사망률 1,000명당 26명) 추위 때문에 식량 생산도 풍부하지 못했다. 또 인구 증가는 대를 이어서 해야만 하는,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 장기 계획이어야만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부정적인 결과로 열성 유전인자가 나타났다. 이를 두고 서구인들은 몽골인 전체를 열성 유전자의 집합체로 치부했다. 스코틀랜드의 과학자 로버트 체임버스는 ‘몽골리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영국의 한 의사는 몽골인이 근친상간 등 비정상적인 행동의 결과로 이루어진, 인간 이전의 단계라고 독한 말을 쏟아냈다. 그래서인지 영어 사전을 보면 몽골인과 관계된 ‘몽골리안(mongolian)’과 ‘몽골리즘(mongolism)’은 의학 용어로 ‘다운증후군’을 의미한다. 다운증후군 환자의 얼굴 특징이 몽골인과 같아서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유럽인은 칭기즈칸과 그 후손들이 유럽으로 쳐들어와 그들의 자존심을 짓밟은 것을 갚느라 이렇게 비열한, 비하하는 말로 몽골인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마치 중국인이 몽골인을 ‘몽고(蒙古)’인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름없다(‘몽고’라는 이름은 몽골을 비하하기 위해 ‘우매할 몽(蒙)’과 ‘옛 고(古)’ 자를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와 관련해 여담이지만, 오랜 기억 때문인지 중국인은 몽골인과 만나는 것을 왠지 모르게 거북해한다. 두 나라 간의 외교에서도 몽골인은 당당하고 중국인은 호의를 베푸는 것 같다. 중국이 돈을 앞세워 큰소릴 치지만 몽골인은 웃기만 한다. 몽골과 중국, 두 나라는 나라 이름의 뜻이 ‘세계의 중심’으로 같다. 중국(中國)이란 명칭은 설명하지 않아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몽골(Монгол)’은 생소하다. 이를 분석해보면 ‘몽(мοн)’은 ‘(мн)’이라는 말에서 모음이 변해 사용된다고 한다. ‘(мн)’은 ‘진짜, 바로’ 등의 뜻이며 ‘골(гол)’은 ‘중심, 가장 중요한 것, 태풍의 중심, 가운데 부분, 핵심’이란 뜻으로 쓰인다. 둘을 합해보면 ‘진짜 중심’이라는 말이다. 어느 나라가 진짜 세계의 중심인지는 더 오랜 역사가 흐른 뒤에 밝혀질 것이다. 몽골인의 오랜 염원인 인구 증가 정책은 옛 소련 시절 또 한 번 짓밟혔다. 소련은 한창 인구 증가를 위해 노력하던 몽골인으로부터 성(姓)을 빼앗고는 성 대신 아버지의 이름을 성처럼 사용하도록 강요했다. 유목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호적을 갖게 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몽골족의 용맹과 기상을 꺾기 위한 흉악한 정책이었다. 씨받이를 해야 하는 것보다도 더 슬픈 역사가 최근 세기에도 자행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조상의 성이 ‘김해 김’이면 그 후손은 몇 백 대를 내려가도 ‘김’이라는 성을 사용한다. 몽골인은 그러나 아버지의 이름을 성처럼 사용하고 보니 할아버지와, 또는 사촌 간에도 같은 성이 아니다. 할아버지 이름이 ‘철수’라면 아들은 ‘철수의 영식’이고, 손자는 ‘영식의 명수’가 된다. 소련이 이 제도를 시행한 것은 단결력이 어느 민족보다도 강한 몽골인의 가족 관계 의식을 희박하게 하려는 아주 고약한 정책이었다. 지금 몽골은 경제 수준의 향상에 따라 의료시설도 확충되었고, 의료인들의 의술도 향상돼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전체 인구 증가율 1.7%, 도시 지역 2.8%)하는 아주 젊은 국가이다. 일할 사람이 넘쳐 난다. 자원도 풍부하다. 아마 여러 나라가 가진 자원이 고갈될 때쯤이면 몽골의 자원이 각광을 받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몽골인은 또다시 세계를 호령하던 때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몽골이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크게 높아졌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남북과 관련하여 몽골이 여러 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김일성이 죽고 나서 북한에서 가장 먼저 우리나라에 온 사람이 몽골인이었다. 평양 주재 몽골대사 부인이 서울에 유학 중인 딸을 만나기 위해 왔었다. 서울에 주재했던 전직 몽골대사 한 명은 평양에서 대학을 다니고 외교관 생활을 하는 등 18년간이나 북한에 머물렀던 인물이다. 남북을 동시에 알며 관계를 맺어온 몽골이 우리의 통일에 기여할 날을 기다려본다.
우리나라 몽골 박사 1호, 신현덕 교수의 생생한 몽골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세요. 오는 3월 29일 수요일 오후 3시, 서울문화사 별관 강당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우먼센스> 인문 강좌 ‘여행자의 인문학’에서 ‘몽골의 자연과 문화’를 주제로 신현덕 교수의 강연이 펼쳐집니다. 관련 내용은 p.91 참조
글 : 신현덕(국민대학교 교수) | 사진 :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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