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왕국에서의 죄의 문제(마태복음 18, 19장)-1
마태복음에는 다섯 편의 강론이 나와 있습니다. 첫 번째 강론은 산상수훈
의 강론(5-7장)이며, 두 번째 강론은 왕국에 대한 선포(10장)입니다. 세 번
째 강론은 왕국에 대한 비유(13장)이며, 18장에는 네 번째 강론이 나오는데
이 네 번째 강론은 왕국에서의 죄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이 강론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마감되는 시점에 이루어졌습니다. 마가복음 9 :33
말씀은 이 네 번째 강론이 가버나움에 있는 "집에서" 예수님에 의해 전해졌
다고 지적합니다. 이 강론을 들은 사람들은 열 두 사도였지만 이강론은 모
든 시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
서는 하나님에 대한 죄를 다루십니다(18 :1-4). 그리고 이 죄에 이어서 다른
사람에 대한 죄(18 :5-7)와 자기 자신에 대한 죄가 다루어집니다(18 :8, 9).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과 그
들과 더불어 화목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18 :10-35). 이제 다음과
같은 죄의 네 가지 영역에 대해 고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죄의 네 가지 영역(18 :1-14)
사도들은 18 :1-4에서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주님께 질문했습
니다. 이것은 나쁜 질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기적인 동기를 가지
고 그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자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들은 이러한 논쟁을 숨기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막
9 :30-32과 눅 9 :46-48을 보십시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범하
는 죄였습니다. 그들의 다툼을 아신 주님께서는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 :2, 3)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가장 큰 자는 어린
아이와 같은 자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스스로를 낮추며 단순한 의뢰와 믿음
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들이 때때로 다루기가 힘들고 반항적
이라는 사실까지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오만한 태도
를 바꾸어 어린 아이와 같은 겸손함과 의뢰하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었습
니다. 진정한 위대함은 겸손 안에 있습니다.
5-7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죄에 관해 말씀하십니
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표준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동료 신자가 다른 신자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접하
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18 :5). 그러나 형제를 실족케(죄를 범하도록 유혹
하는) 하는 것은 심각한 범죄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이 너무나 큰 범죄이기
때문에 차라리 범죄하는 형제가 자기 목에 연자 맷돌을 달리우고 깊은 바닷
속에 빠뜨리우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18 :6). 실족케 하는 장애
물들은 불신세상으로부터도 올 수 있습니다(18 :7). 사단은 죄인들이 사는
세상을 사용하여 참된 신자들이 죄에 빠지도록 유혹합니다. 신자들로 하여
금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가 다른 동료 신자를 실족케 만드는 일은 참으로 충격적인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마음으로 사랑과 선행을 피차 격려하는 일에 전념해
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죄와 다른 사람에 대한 죄에 관한 말씀을 마
치시고 이제 자기 자신에 관한 죄에 대해 설명하십니다(18 :8,9). 우리가 살
아가는 방식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왕국 안에 있는지, 혹은 무서운 지옥
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
다. 이것은 돈을 사랑했던 유다가 결코 배우지 못한 교훈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범하는 사람들에 대해 다루십니
다(18 :10-14). 주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범하는 형제를 멸시하지 말아
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10절 상). 오히려 우리는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
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보여주어야 할 이유는 분명하고 단순합
니다(10절 하, 11절). 한편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있는
형제이며(10절 하), 또 한편으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기 때문입니다(11절, 한글 개역성경에는 11절이 없고 난하주에 기록
되어 있음-역주). 우리가 동정어린 친절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
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양 아흔 아홉 마리를 안전한 우리에 남겨두고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예화를 사용하셨습니다(한글 개역성
경에는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로 되어 있으나 흠정역에는 "그 아
흔 아홉 마리를 남겨두고"로 되어 있음-역주).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범죄한 형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목자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갈
6 :1).
화목의 실제적인 단계(15-35절)
어떤 사람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가?"라고 질문할지 모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18장
의 나머지 부분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15-20절
안에서 주님께서는 화목의 단계를 매우 분명하게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21-35절 안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범한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범죄한 형제(18 :15-20)
주님께서는 이제 그리스도인 형제들 간의 분쟁을 치유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이것은 "이 소자"라는 단어 대신 "네 형제"라는 단어가 사용
된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피해를 입은 형제는 죄를 범한 형제에게 먼저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5:23, 24에서 동전의 또다른 면인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피해를 입힌
형제이든 피해를 당한 형제이든 먼저 상대방에게 가서 화해를 구해야 한다
는 것입니다. 만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 명령이 진지하게 받아들
여진다면, 오랜 동안 지속되던 반목과 불화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결과를 가
져오겠습니까! 불행하게도 완고함과 자존심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
가 먼저 나에게 와야 한다"(Let-him-come -to-me-first)라는 태도를
취하곤 합니다.
화해에는 세 가지 분명한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먼저 당사자들 끼리만
은밀하게 만나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노력이 실패로 끝난다면, 몇 명의 증
인들이 함께 만나야 합니다. 마지막 해결책으로서, 범죄한 형제를 판단하기
위해 신자들의 모임 앞에서 그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죄는 반드시 드러
내어 판단해야 하지만 그것의 분명한 목적은 범죄한 형제를 회복시키는 것
이어야 합니다.
이 단락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두 번 째 언급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언급(16 :18)은 우주적인 교회에 대한 것인데 반해 여기에서는 지역
교회에 대한 것입니다. 언급된 순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주적인
교회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선행되지 아니하면 지역교회에 대한 분명한 성
경적인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범죄한 형제를 다루는 일은 인내와 세심함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문제 해
결을 위한 당사자 간의 은밀한 만남이 실패로 끝났을 때에는 두 세증인과
함께 범죄한 형제를 만나야 합니다. 이것은 내용이 와전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양쪽의 말을 다 들어본 후에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
해서 꼭 필요합니다. 종종 당사자끼리 만났다 할지라도 자연스럽지 못한 관
계와 입장의 차이 때문에 내용의 와전과 오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 두 단계가 실패로 끝났을 때에는 불가피하게 지역교회가 그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취해지는 조치입니다. 범죄한 형제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는 이제 피해를 입은 형제(단수 형태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주목하십시
오)에 의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됩니다. 이전에 자기 자신이
세리였으며,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받는 능욕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는 마태가 이와 같은 엄중한 판단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
심장한 일입니다.
17절의 "그"("thee" ;한글 개역 성경에는이 단어가 분명하게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영어 흠정역 성경에는 "그 형제에 의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되어 있음-역주)는 단수인데 반해 18절의 "너희"(ye)는 복수로
서 분명하게 모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교회의 판단이 정당한 방
법으로 취해진다면, 그것은 하늘에서도 인정을 받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
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가 단지 두 세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지라
도 그 지역 교회에 거룩하고 엄위한 하나님의 권위가 부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의 판단을 이와 같은 엄숙한 사실로 옷을
입혀서 권위있는 인상을 풍기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
께서 실제로 임재(臨在)해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가 모이는 것은
그분의 권위아래 모이는 것이며, 그분의 이름이 지닌 권위 때문에 교회가
내린 판단을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예수님의 주재권
을 온전히 인정하는 지역교회는 송사(訟事)를 다루는 마지막 법정입니다.
푸는 것이 용서를 의미하듯이 매는 것은 회개하지 않는 형제에게 그가 범한
죄에 대해 영원히 책임을 지우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처음엔 베드로에게(16 :19) 위임되었던 영적인 권위는 이제 지역교회에게
위임되었습니다(요한복음 20 :23과 비교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러한 권
위가 "사도의 계승"을 넘어서 오늘날의 교회에 위임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19절은 "for"라는 작은 단어로 20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일에 대해 "같은" 마음의 부담을 느끼고 있는 두 세 영혼이 그 일을 위해 합
심하여 기도하려고 모여 있습니다. "일치하다"라는 단어는 두 세 명의 그리
스도인들이 어떤 일에 대해 단지 우연히 일치된 마음을 갖는 것 이상을 의
미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 "조화시키다"(symphonize)라는
뜻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필요에 관해 동일한 부담을 느끼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성령님께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
떤 특정한 문제에 대해 부담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것에 대해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간구야말로 진실로 "성령 안에
서 기도하는 것"(유 20절)이며, 그러므로 그 응답은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19절)라는 주님의 말씀 안에 온전히 보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
서는 그분 자신의 영으로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며, 그들의 간구에 정당성과
권위를 부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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