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왕국에서의 죄의 문제(마태복음 18, 19장)-2

용서(18 :21-35)

베드로는 범죄한 형제를 얼마나 오랫 동안 참아주어야 하는지 알기를 원

했습니다. 범죄한 형제를 일곱 번 용서해 주어야 할까요? 주님의 놀라운 대

답은 용서에는 제한이 없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해

주라는 것은 무한한 용서를 가리킵니다.

주님께서는 곧이어 영원하고 무조건적인 용서를 베푸는 하나님의 은혜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놀랄만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서 주어진 용서는 분명히 잠정적이었습니다. 용서를 받은 종이 정작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임이 드러났기 때문에 자신이 용서 받은 것이 취

소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이 오늘날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방법-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가 우리의

행동에 따라 그 사실을 번복하시는-일까요?

우리가 이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든지 그것은 본 장의 마지막 구절에서 주

님께서 제시하신 일반적인 적용과 일치해야 합니다. 그 적용의 의미를 올바

로 파악하는 길은 너의 "형제"라는 단어와 관련하여 "너"라는 단어를 이해

하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우리의 현재나 미래의 안녕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천국 즉, 그리스도인의 실재적인 영역과 비실재적인 영역을 모

두 포함하는 영역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여기에 나오는 사람

들은 사람이며 사람의 원칙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유의

세세한 사항을 일일이 해석하므로써 하나님의 다루심의 원칙을 캐내려고

시도해서는 안됩니다. 이비유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태도는 때때로 사람들

간에 일어나는 문제해결의 절차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채권자인 왕이 악한 종을 불쌍히 여겨서 그를 용서해 주신

것과 용서함을 받은 그 종이 용서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동료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태도로 대하는 그의 악함(32절)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

지막으로 이 이야기는 처음에 왕의 호의에 의해 용서받은 사실이 그 종의

악한 행동으로 인해 취소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악한 종은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불의한 태도가 증명하듯 왕이 베푼 은혜

는 그의 마음 속에 자기가 받은 은혜에 상응하는 자비로운 태도를 일깨워주

지 못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어느 영역까지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주님께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

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는 말씀을 통해 구체적

인 적용의 방법을 말씀하신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35절). 그러므로 어떤 의

미에서 주님의 용서가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만일 우

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을 미룬다면, 주님의 뜻은 지연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용서의 두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영원과 관계

가 있고 다른 하나는 일시적인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영원한 용서는 그리

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죄인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영원하고 참된 용서를 말합니다. 이 영원한 축복은 구주 안에 있

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증된 것입니다.(눅 24 :47 ; 행 19 :43 ; 13 :38, 39 ;

엡 1 :7 ; 히 10 :17). 주 예수님의 "이름"을 인하여 하나님의 가족 안에 있는

모든 "소자들"은 그들의 죄(요일 2 :12)에 대한 완전하고 영원한 용서를 즐

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진리에는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용서와 관련된 또 다른 측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가족을 지금 이 세상에서 심는

대로 거두는 원칙에 따라 다스리십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

생을 거두리라"(갈 6 :8). 이 법칙은 죄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에게도 적용되며, 이 세상에서의 삶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건적인

용서가 적용되는 것은 바로 이 영역에서입니다. 일시적인 용서는 동료 신자

들에 대한 신자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그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

서해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그의 태도에 따라 그를 다루실

것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죄를 범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는 만큼 자신의

죄를 사함 받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많은 그리스도인

들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하늘의 자비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결혼(19 :1-12)

유대를 향해 남쪽으로 여행하시면서 주님께서는 다소 위험한 요단 동쪽

지역인 페레아(Perea)를 지나가시려고 하셨습니다. 그곳에서도 수 많은 무

리들이 주님께 몰려들었으며, 그들의 동기는 이기적이었지만 예수님의 관

심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고쳐주셨으며, 단 한 번도 주님께서

해결하시기가 어려운 경우나 그냥 돌아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도(誘導)적인" 질문을 가지고 주님께 접근하기 시작했

습니다. 그들의 불순한 동기는 "그를 시험하여"(3절)라는 두 마디의 말 속

에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신용을 잃

어버리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경쟁관계에 있던 힐렐(Hillel)과 샤마이

(Shammai) 두 학파는 이혼이라는 주제에 관해 여론을 두 갈래로 나누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논쟁거리를 사용하여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

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 라고 질문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그 문제에 관해 생각할 여유를 달라거나 당황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두 학파의 견해를 예로 들지 않으시고

인간이 처음 창조된 사실을 인용하시므로써 곧장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

셨습니다. 근원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는 것은 가장 안전한 기초에서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본래"(the beginning)라는 단어를 두 번(4, 8절) 언급

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일부일처제를 강력히 옹호하시고 일부다처제와

이혼을 정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

이 한 몸이 될찌니라"(5절)라는 말씀을 하나님("사람을 지으신 이가...말씀

하시기를")께서 하신 말씀으로 간주하셨습니다. 하지만 원문의 문맥에는 이

말들을 아담이 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창 2 :23, 24). 죄로 인해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은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때에는 아

무 죄도 그의 생각 속에 들어오지 않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혼에 관해

주님을 시험했을 때 주님께서 하신 대답은 이혼이 하나님의 마음과 모순된

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비판자들은 즉시 모세가 이혼을 허락했다는 반증을 들고 나왔습

니다. 모세는 특정한 경우에 이혼을 명령하지 않았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모세는 이혼을 명령한 것이 아니라 단지 허락했을 뿐이며, 그가 그

렇게 한 이유는 사람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아내를 내어버리게한 마음의 완악함이 바로 그들이 메시야를 배척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근거는 간음이 아니라 그것보다 덜 심각한 죄였습

니다(신 24 :1-4). 흠정역에는 "수치되는 일" 이라는 의미로 "부정함"

(uncleanness)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개역표준역에는 "수치"

(indecency)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모펫(Moffatt)은 "정결하

지 못한 태도"(immodest in some way) 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죽음

의 형벌을 당하는 가장 큰 죄는 간음 죄였기 때문입니다(신 22 :22). 그러므

로 모세가 허락한 "이혼증서"는 인간이 영적으로 완악한 상태에 빠져 있었

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허락된 편법이었으며, 결코 하나님의 뜻이 바뀌어진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결국 모세의 이혼증서는 주님을 정죄하는 것이 아

니라 실상은 바리새인들을 정죄하는 것입니다(요5 :45-47과 비교해 보십

시오).

이제 주님께서는 다시 결혼관계가 가져다 주는 연합의 성격에 대해 가르

치십니다. 주님께서는 5 :31, 32절에서도 이러한 교훈을 가르치신 적이 있

습니다. 결혼관계는 기독교나 유대교 심지어 죄가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성

립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인 성격에 있어서 인간적이며, "인간의

무죄시대에 제정"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혼은 오직 음행-아마도 간음을

범한 경우와 동등한 조건-에 의해서만이 허락될 수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

법에는 간음 죄를 범한 경우에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나와 있지만 그리스도

의 왕국의 법은 이러한 죄를 범한 경우에 죽임을 당하는 대신 결혼관계의

해제를 허락합니다.

제자들은 결혼에 대한 이러한 엄격한 제한 때문에 차라리 독신으로 지내

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결혼해서는 안될 세 부

류의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신으로 사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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