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왕의 예언(1)(마태복음 20-22장)-1

흥정하는 자와 신뢰하는 자(20 :1-16)

이 비유는 19 :30과 20 :16의 먼저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는 주님의 말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의 세세

한 사항을 일일이 해석하여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시도는 우리를 말씀의 올바른 분별로 인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는 구원의 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비유를

구원과 연관하여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을 고용인으로 묘사하는 것

과 같기 때문에 이러한 시각은 은혜의 복음 전체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모든 봉사에 대해 동일한 수준의

보상을 해 주신다고 가르치고 계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를 포함하

여 성경의 일반적인 교훈은 주님께서 각 사람의 행한대로 서로 다른 보상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장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과 이 비유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

한 이유는 두 장(章)이 서로 다른 장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서는 19장에서 모든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동기를 인정하셨습니다. 제

자들은 단순히 보상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모든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은 것

이 아니라 주님과 주님의 이름을 위해(19 :28, 29) 그렇게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내어드림으로써 그들은 자기 부인의 놀라운 발걸음

을 내디뎠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고, 그들 자신은 마지막

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기본적이고 대조적인 봉사의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이유가 합의된 계약에 의한 것

인지 아니면 사업적 이해 관계를 벗어나 주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에 의한

것인지 입니다. 2절에 나오는 "약속하여"(agreed)라는 단어는 서로 분명하

게 계약을 맺었음을 시사합니다. 그 계약이란 일한 만큼 대가를 주고 받는

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온 사람들은 주인과 계약에 의해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랑어린 신뢰 가운데 주인을 섬기는 의미를 충분

히 이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주인이 제안을 할 때, 그들은그 주인을

신뢰했으며 무조건적인 믿음을 가지고 포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첫 번째

포도원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계약대로의 보상이 주어졌으며,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는 주인의 온정에 의해 넉넉한 보상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그

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올바른 동기를 갖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

요한지를 입증해 줍니다. 첫 번째 부류의 고용인들은 보상을 위해 일을 했

고,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주인을 알고 사랑하기 때문에 일을 했습니다.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보상은 이러한 기준에 의해 정해질 것이며, 그 날에

는 나중된 자인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실제로는 먼저될 자들이 많을 것입

니다. 반대로, 먼저된 자로서 나중될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흥정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단 한 가

지 이유 때문에 그를 섬긴 사람들에게는 한 없는 은혜 가운데 풍성한 보상

을 약속하십니다.

마지막 예언(20 :17-19)

주 예수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그분의 마지막 여행 길

에서 제자들을 앞서 인도하십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

시는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폭풍이 불어닥치는 것을 예감하면서 열 두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두려움과 놀라움의 감정이 교차합니다. 그리스도께

서는 자신이 당할 엄청난 일들에 대해 자세하게 예언하십니다. 오직 하나님

처럼 전지(全知)하신 분만이 미래의 일을 예언하실 수 있습니다. 사기꾼은

자기의 오류를 변명할 충분한 여지를 만들어 놓고 일반적인 원칙 아래 미래

의 일을 추측할 수 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자신이 예언한 일

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 영원히 불신을 당하게 될 임박한 미래의 일을

아주 자세하게 일일이 설명하십니다. 주님의 예언은 일곱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임을 당하실 장소, 죽임을 당하실 방법, 자

신을 죽음에 넘기울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일에

대해 예언하셨습니다. 이 예언은 주님의 말씀대로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

다.

섬김으로 이루어지는 지도자(20 :20-28)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주님께 드린 요구는 19 :28에 나와 있는 주님

의 약속에 자극을 받은 것 같습니다. 마가는 야고보와 요한 두 사람이(막

10 :35) 주님께 나아왔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러한 생각은 그들의 어머니

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녀의 가장 큰 소망은 자기 아

들들이 메시야의 왕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자리에 앉음으로 다른 모든 제자

들보다 명예로운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요구에 대답하시면서 메시야의 왕국에 대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오해라는 것을 전혀 암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

님께서는 그러한 예상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좌우편에 앉

는 것이 누구를 위해 예비되었든지 아버지께서 정하신 대로 될 것이라고 선

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고난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면류관

을 쓰기 이전에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순서를 깨닫지 못했습

니다. 주님께서 마셔야 할 잔은 사람과 하나님으로서 당해야 할 고통을 포

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사람과 하나님의 손에서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

습니다. 제자들은 구주의 대속(代贖)의 고난에는 결코 동참할 수 없었지만

구주와 더불어 사람들로부터 받는 고난은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며 또 나누게

되어 있었습니다. 보좌에 이른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는

미래의 어느 날 그들이 힘든 길을 걸은 일에 대해 보상해 주실 것이지만 예

수님께서는 그 과정 동안 그들로 하여금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이기적인 야심은 다른 제자들의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타오르는 분노 역시 비슷한 육신적인 욕심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두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곧 그들 자신을 정죄하는 것과 마찬가

지였습니다. 그들이 분노한 이유는 주님의 명예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명예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분노한다고 해서 주님의 좌우편에 앉을 수는

없습니다. 슬픈 사실은 주 예수님께서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그분의 제자들은 개인적인 야심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입

니다. 이 얼마나 동정이 결여된 마음입니까! 그 상황에서 정당하게 분한 마

음을 품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주님 자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

은 오히려 그상황에서 제자들을 교훈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상의 문제에

있어서 먼저된 자가 나중된다고 하신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실

제적으로 이러한 교훈을 미래의 보상에 적용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주목하

십시오. 또한 미래의 왕국에서 그 시기와 자리를 결정하시는 분이 아버지이

시라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막 13 :32 : 행 1 :7 ; 마 20 :23).

그리스도의 미래 왕국의 기초는 인간 왕국의 기초와는 정반대의 원칙 위

에 세워집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에는 교만과 이기적인 욕심이 들어설 자리

가 없기때문입니다. 그분의 왕국에서 명예로운 자리에 오르는 사람들은 지

금 이 세상에서 자기를 낮추며 겸손하게 섬기는 자들입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며,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아래서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

을 그분은 높여주실 것입니다. 사랑의 봉사야말로 참된 기준입니다. 형제들

을 섬긴 바로 그 사람이 형제들 가운데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의 완

전한 모범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주님은 갈보리에서 모든 종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종으로서 섬기셨으며, 이제 이 영광스럽게 된 종은 자기 자신을 대

속물로 주어 섬긴 사람들을 다스리시는 가장 위대한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

다. 우리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와 같은 태도를 보이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합니다. 그녀는 언제나 우리 곁에 서서 기회가 올 때마다 자기 아들들

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힘입어 주목을 받는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육신적인

권리를 주장합니다.

왕의 공식적인 나타내심에 대한 준비(20 :29-34)

주님께서는 이제 이스라엘 왕으로서 수도(首都) 예루살렘에 나타나려

고 하십니다. 주님을 소리쳐 부른 두 소경을 고쳐주신 기적은 예루살렘 도

성에 왕이 입성하시는 중요한 사건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적절한 역할을 하

는 사건이었습니다.

마태는 둘이라는 숫자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 사건은

틀림없이 마가(막 10 :46-52)와 누가(눅 18 :35-43)의 기록과 동일한 사건

인데, 거기에서는 소경이 한 사람만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

태의 기록을 종합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소경 둘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

으며, 그 중의 한 명이 바디매오였음이 분명합니다. 마태는 유대인 독자들

에게 분명한 증거를 토대로 메시야에 대한 생생한 인상을 심어주고 싶어했

습니다. 율법은 법률적으로 타당한 증거를 위해 " 두 세 증인"을 요구합니다

(마 8 :28-34과 막 5 :1-20을 비교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처음에 두 소경의 눈을 고쳐주셨을 때에는 그들이 그 사실

을 증거하지 못하도록 엄히 명하셨지만(9 :30) 여기에서는 그러한 명령을 하

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에게 마지막으로 메시야를 공적으로 완

전히 드러내셔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두 소경은 예수님을 "다윗

의 자손이여"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막30, 31절). 그들은 예수님을 사단

의 능력을 힘입어 이적을 행하는 자라고 비난했던 종교 지도자들보다도 뛰

어난 영적인 안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소경된 자들은 다름아닌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대표하는 이스라엘

역시 영적으로 소경인 상태에 있었습니다.

성경의 예언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기적 속에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께

서 구원자로서 공적으로 시온에 다시 임하시는 지상재림 직전의 대환란 기

간에 경건한 유대인의 남은 자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사건이 예시적으로 나

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왕으로서 자신을 이스라엘에 나타내심(21 :1-11)

주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후 이제 요단 계곡의 여리

고를 지나 예루살렘 도성으로 올라가십니다. 수 세기 전에 선지자 스가랴는

그리스도의 지위("네 왕"), 그리스도의 인격("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또한 그리스도의 태도("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을 것 곧 나귀새끼니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슥 9 :9). 모든 예언은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지시하신 세밀한 부분들은(2, 3절) 그분의 전지

하심을 온전히 드러내 줍니다. 그분은 나귀와 나귀 새끼가 있는 정확한 장

소 그리고 그 주인이 어떤 반응을 보일 지에 대해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뿐

만 아니라 스가랴의 예언에 이 두 동물이 언급되어 있는 것과 또한 정확한

시간에 예비되어 있다가 주님에 의해 쓰임을 받았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십

시오. 여태까지 성경의 일점 일획도 오류없이 그대로 성취되어 왔으며 또한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전지하신 분이시자 전능하신 분

입니다. 미천한 동물들조차 그분의 주재권에 순복했기 때문입니다. 그 나귀

새끼는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막 11 :2) 나귀였으며, 자기의 창조주를 등에

태워 "위대한 왕의 도성"으로 들어가시게 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실제로 자기 백성들로부터 이스

라엘의 왕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셨습니다. 흥분한 수 많은 군중들에 의

해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지만 많은 시민들은 아직도 "이는 누구뇨"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모호한 대답이 주어졌습니다. "갈릴

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10, 11절). 물론 주님은 선지자이셨지

만, 이때의 주님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이스라엘 왕의 신분으로 오신 것이

었습니다. 군중들은 그분을 다윗의 자손으로 환영하며 시편 118 :26을 큰 소

리로 외침으로써 어느 정도의 영적인 지식을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

엘의 종교 지도자들의 목소리는 그들 가운데 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군중들이 주님을 환영하는 태도에 적대감을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

입니다.

(한국엠마오성경학교)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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