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왕의 예언(1)(마태복음 20-22장)-3
왕의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네 가지 반응(22:1-14)
우리는 22장에서 연속된 세 번째 비유를 접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주님
께서 말씀하신 비유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 즉 복종하는 사람들과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두 아들에 관한 비유에서는 종교인들
은 복종하지 않는 반면 죄인들은 회개하고 축복을 받습니다. 그 이야기 뒤
에는 주인의 외아들을 죽인 악한 농부들과 주인에게 복종하는 "다른 농부
들"(21 :14)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비유가 나옵니다. 이제 세 번째 비유가
시작되는데 이 비유 속에서는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사람들이 나중에 그 초
청을 거절하고, 잔치의 자리는 그들 대신 임금의 초청을 받아들인 다른 사
람들로 채워집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배척한 결
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되었다는 것을 쉽게 분별할 수 있습
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과 이후 두 번에 걸쳐 이스
라엘을 은혜롭게 초청하셨습니다. 그 중 첫 번째 초청은 이스라엘의 왕이
가시 면류관을 쓰고 죽임을 당하시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두 번째 초청은
오순절 이후에 성령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전해 주신 것으로서 이것은 사도
들에 대한 혹독한 핍박과 스데반의 순교로 이어졌습니다. 두 번째 초청의
말씀은 사도행전 3 :19-26에 선포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는 넓은 의미로 볼 때 누가복음 14 :16-24에 나오는 이야기와 비
슷하지만 여기에서는 경륜적인 측면이 특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기본적으로 천국에 관한 것이므로 이 비유가 내포하고 있는 교훈을 적용할
수 있는 영역은 일차적으로 하늘이나 교회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
정하는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
간의 관계가 혼인 잔치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것처럼 화목한 관계로 묘사되
어 있기 때문입니다. 임금으로 묘사되어 있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드님의 영광은 지극
한 영광입니다. 예언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비유의 목적은 아드님께서
하늘에서 뿐만 아니라 바로 이 땅-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이중적인 초청은 3절과 4절에 나타나있습니
다. 첫 번째 초청은 10장에서 메시야를 대신하여 열 두명의 제자들이 모든
유대인들에게 행한 사역과 관련이 있으며, 두 번째 초청은 사도행전 3-7장
에 개략적으로 나와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두 번째 증거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자손으로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특권을 누렸지
만(행 3 :25, 26)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그들 자신을 영생 얻기
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했기에 복음은 그 이후에 이방인들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행 13 :46).
6절에는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임금의 초청을 거절하는 자,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무
시하는 자, 그리고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임금이 보낸 종들을 능욕하고
죽인 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AD 70년에 로마 군대가 침입하여 성전을
훼파하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은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신속하
게 시행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인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
하지는 않습니다. 아드님을 위한 그분의 뜻이 성취되지 못하는 법은 없습니
다. 혼인 잔치의 자리는 손님들로 온전히 가득 채워져야만 합니다. 그러므
로 모든 사람을 혼인 잔치에 오게 하라는 아버지의 당부 속에서 우리는 오
늘날 잃어진 이방 세계에 복음의 초청이 널리 전파된 이유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로 말미암아 구원은 이방인들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롬 11:11). 예복은 임금이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신 것이었습니
다. 왜냐하면 종들의 말을 듣고 임금의 초청을 받아드려서 막 연회장으로
가고 있던 사람들이 사전에 예복을 준비했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혼인 잔
치와 그곳에 참여할 수 있는 합당한 자격은 모두 임금이 베풀어주신 것이었
으며 온전한 은혜였습니다. 물론 예복은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사 61 ;10 ;
롬 3 :22 ; 고전 1 :30).
혼인 잔치가 시작되려고 할 즈음에 예복을 입지 않고 그 자리에 참석한
한 침입자로 인해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그는 예복을 입고 참석해
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에게 예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터이지만 그는 달랐습니다! 하지만 예복에 대
해 소홀이 생각하므로써 그는 실상 임금을 무시하는 태도를 드러낸 것입니
다. 더군다나 그의 이러한 행동은 고의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혼인 잔치에 예복을 입고 참석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변명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라고 질문함으로써 그에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주었
지만 그는 유구무언이었습니다. 그 침입자는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이 드러났
고, 조사를 받았으며, 묵묵 부답이었고, 결국 심판에 넘겨졌습니다. 그 사람
에게 임한 두려운 운명은 거짓으로 믿음을 가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맞이할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해 말해줍니다. 그들의 진정한 상태는 이스라엘의
왕이 다시 오셔서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낼 때" 온전히 드러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 13 :41).
올무를 놓는 자들이 올무에 걸림(22 :15-22)
바리새인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났음
에도 불구하고 다시 예수님을 공격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번
엔 자기 제자들과 자신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헤롯 당원들을 함께 보내어 예
수님을 시험하려고 했습니다. 헤롯 당원들은 헤롯 왕조를 지지하는 당파였
으며, 로마의 통치에 찬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에는 거의 혹
은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바리새인들은 이들을 극도로 혐오했습니다. 누가
는 바리새인들과 그들이 보낸 악한 무리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
사하고 있습니다.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
잡게 하니"(눅 20 :20). 그들의 아첨의 말 속에는 유도성의 질문이 숨어 있
었습니다(16절). 만일 예수님께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다고 말
씀하신다면, 그분은 참된 왕이 아니라는 비난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반대
로 만일 예수님께서 부정적으로 대답하신다면, 그분은 로마에 대항하여 싸
움을 선동하는 자라는 누명을 쓰게 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계략을 간파하시고 동전을 실물교재로 한 유명한 대
답을 그들에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
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대답하셨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했었다면,
무엇보다도 그들은 결코 가이사의 종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죄
로 인해서 로마의 멍에 아래 있게 되었으며, 이제는 오직 참된 회개를 통해
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당황하여 주님의 대답을 기이히
여기며 물러간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답하심(22 :23-33)
바리새인들이 물러간 다음 그들과 경쟁 관계에 있는 사두개인들이 곧 주
님께 나아왔습니다. 이것은 "같은 날" 일어난 사건이었으므로 주님께서는
쉴 틈이 없으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합리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모세오경은 제외하고)
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천사와 영(靈)들의 존재 및 불멸(不滅)을 포함하여
초자연적인 것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활에 관한 교훈이 불합리한
철학이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제시한 내용의 이야기는 전
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가설이었을 것입니
다. 그들이 인용한 모세의 말(신 25 :5, 6)은 사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철학은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에 관한 왜곡된 관점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
다. 왜냐하면 그들의 철학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간의 차원으로 끌어내리
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는
것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오류가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로 인
해 생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특히 사두개인들이 인정하
지 않는 부활에 관한 교훈을 분명하게 설명하셨으며, 부활에 이른 사람들은
성별(性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고 발씀하셨습니다
(눅 20 :35,36). 하나님의 능력이 틀림없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실 것
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는 이 회의론자들을 그들이 인정하는 구약성
경의 한 부분으로 인도하셔서 그 말씀으로부터 그들이 부인하는 부활에 관
한 진리를 이끌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
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이었다"가 아닌)고 말
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족장들은 오래 전에 죽었지만 여전히 그들의 육
체 밖에서 존재하고 있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들이 유효하다는 것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지금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
들은 틀림없이 그 약속들을 즐기기 위해 다시 깨어날 것입니다. 주님의 가
르침은 그들이 비록 지금 몸은 가지고 있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죽은 자
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32절)라고 말씀하실 때 그 절
정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존하지 않는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십
니다. 주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이 동사의 현재시제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구약성경의 축자영감(逐
字靈感)을 믿고 계셨습니다.
군중들이 주님께서 지혜롭게 반박하시는 것을 듣고 놀란 것은 전혀 이상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대답에는 불신앙에 대한 반박이라는
측면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확한 진리를 계시해 주시는 하
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의인으로서 죽은
자들의 현재의 상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원한 삶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곳에 있던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즉시 예수님을 옳다고 하였습니다(눅 20 :39).
모세의 율법의 강령(22 :34-40)
이 사건에 대한 마가의 설명은(막 12 :28-34) 교육적이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서 지혜로운 대답으로 바리새인들의 입을
막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다른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마태는 주님을
시험하려는 서기관의 동기를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는 이 사건을 면밀
히 살펴보면서 그 서기관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서기관에게 깊은 인
상을 심어주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주님께서는 진
리를 조명해주는 설명을 그에게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마태의 초점은 국가
로서의 이스라엘에게 미치는 효과에 맞추어져 있었으므로 그는 국가적인
사상(思想)을 반영하지 않는 개인적인 반응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습니
다.
서기관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주님께서는 십계명 중에서 크고 첫째가
되는 계명을 먼저 말씀하시고, 그후에 인간관계에 대한 계명을 말씀하셨습
니다.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하나님과 인간을 향한 완전한 사랑입니
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해 절대적인 권리를 갖고 계시므로 인간이 하나
님에게 최고의 자리를 내어드릴 것을 요구하십니다. 인간이 다른 사람에 대
해 가지는 의무는 다음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행함의 문제이
기 이전에 인간의 근본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죄가 하
나님을 보좌에서 밀어내고 자기 자신을 그 자리에 앉힘으로써 모든 질서가
왜곡되어 일어난 결과입니다. 이 얼마나 우리 영혼을 샅샅이 들여다보게 하
는 일입니까! 스크로기(Scroggie)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했
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핵심을 찌르신다. 그분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으로부터 절대적인 것을, 신뢰할 만한 것으로부터 근본적인 것을 구분해
내신다. 사랑에 의해서만이, 오직 사랑에 의해서 만이 모든 도덕적인 문제
를 해결할 수 있으며, 모든 도덕적인 의무를 이행할 수 있다".
결정적인 타격(22 :41-46)
반대자들의 모든 공격을 무산시킨 후 주님께서는 이제 종교인들에게 그
들의 입을 완전히 막는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
메시야에 관한 예수님의 질문에 올바른 대답을 했지만 주님께서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성경의 일부분을 인용하여 또다시 질문하셨을 때 완전히 혼동에
사로잡혔습니다. 시편 110 :1은 다윗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시편을 기록하면
서 메시야를 자기 주님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지적해 줍니다. 그렇
다면 다윗이 어떻게 자기 자손을 주라고 칭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바리새인들의 대답은 틀림없이 옳지
만 그것만이 진리의 전부는 아닙니다. 온전한 진리는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
이시며 자손이라는 면에서는 인간이시며, 다윗의 주님으로 칭함을 받는 면
에 있어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이중적인 진리는 나중에 요한 계시록
22 :16에서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라는 말씀 안에 선언되어 있습
니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반대자들의 모든 도전을 영광스럽게 물리치셨으
며, 그리스도인들이 전하는 계시의 핵심인 이중적인 진리, 즉 메시야는 유
일하고 영광스러운 한 본체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계시다는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주님께서 신학적으로 새
로운 이론으로서 갑자기 주장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 세기 동안
성경 안에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진리로 남아 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양심은 마비되어 있었고, 그들의 마음은 굳어 있었으며,
그들의 의지는 불신으로 닫혀진 상태에 있었습니다. 주님의 대적들은 침묵
을 통하여 자신들의 패배와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
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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