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왕의 예언(2)(마태복음 23-25장)-1

화 있을진저(23 :1-39)

본 장은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온유하시다는 잘못된 환상을 말끔히 씻어

줍니다. 주님께서는 물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분이시며,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이시며,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가진 자들에게는 온유하게

대하시며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주님

의 통렬한 책망은 주님의 거룩이 모든 형태의 거짓과 종교적인 외식에 대해

서는 결코 관용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분노는 연약한

인간의 감정적인 폭발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분노입

니다.

본 장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 즉 군중들(1-7절)과 제자들(8-12절)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13-36절)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마치시면서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을 향해 슬픈 애가를 부르셨습니다(37-

39절). 구주이시며 메시야이신 그분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예루살렘을 책망

하시면서 자신이 그들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얼마나 많이 주었으며 또

한 그들이 얼마나 자주 자신이 허락한 구원과 보호에 대한 제안을 저버렸는

지에 대해 상기시켜 주십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화를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

들을 향해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말씀

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1. 명령과 경고(23 :1-7)

바리새인들은 그들 자신을 모세의 자리에 갖다 놓음으로써 스스로를 율

법의 권위있는 해설자라고 자부했으며,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모

순된 행동에 대해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사실은 인정하셨습니다(2

절). 그들의 직무는 마땅히 존중을 받아야 했습니다. 모세의 계명은 실제로

는 하나님의 계명으로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는 완전한 효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상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견

고케 하기 위한 할례의 수종자로 오셨습니다(롬 15 :8). 그러나 십자가에서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므로써 하나님께서는 모든 장애물

이 제거되었다고 선언하셨으며, 주님의 온전한 대속(代贖)에 근거하여 이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축복하시며 구원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대교

의 모형과 의식들은 실체가 온 이후로는 그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었

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및 영광받으심에 근거한

새로운 경륜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가르침에 있어서는 정통적이었지만 행위에 있어

서는 이단적이었습니다. 고(故) 스크로기(Graham Scroggie)박사는 만일

마귀가 복음을 전한다 해도, 우리는 그가 복음을 믿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

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지라도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존중해야 한다고 자주

말했습니다. 우리는 나쁜 사람들에게서도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명성과 권력 그리고 사람의 칭찬을 사랑했습니

다. 그들의 종교적인 허영심은 그들이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에 앉는

것을 좋아하며, 사람에게 "랍비"라고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고, 그들의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차는 경문"이란 정사각형 모양의 작은 가죽 상자로서 그 안에는

출애굽기 13 :1-10, 11-16; 신명기 6 :4-9; 11 :13-21 말씀을 기록한 작은

양피지가 들어있고 그것을 긴 가죽 끈으로 이마에나 가슴 근처의 오른 팔

주위에 고정시키고 다녔습니다.

2. 진정한 겸손(23 :8-12)

여기에서 "너희" 라는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이 단어는 특히 제자들을 가

리키는 말로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여기에서는 종교적인 직

함을 나타내는 용어와 관련하여 세 가지 금지가 나와 있습니다. 랍비는 "선

생"(요 1 :38)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단지 존경을 나타내는 표현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과 침례 요한도 이러한 명칭을 인정했지만(마 26 :25, 49 ; 요

3 :26) 우리는 우월한 영적인 권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러한 명칭을 사용해

서는 안됩니다.

"랍비" 라는 단어 속에는 선생이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주"(master)라는

개념도 들어있으며, 이 문맥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제자들

은 다 동일한 형제이므로 아무도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더 우월한 성직의

위치에 있다고 주장해서는 안되었습니다. 또한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 "아

비"(Father)라는 명칭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아비는 생명을 상징하며 생

명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은 자

신이 복음으로써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낳았다고 언급했지만 그것은 오직

그들의 아버지이시자 그들을 자녀로 삼으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되어진

일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고전 4 :15).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물론

바울을 "아비"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을 낮추어야만 높은 자리에 오를 수가 있습니

다.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모든 사람

의 종입니다. 참된 사랑은 섬기는 것을 기뻐하며 여기에 진정한 권위가 있

습니다. 야고보서(약 4 :10)와 베드로전서(벧전 5 :6)에 기록된 교훈은 주님

께서 여러 번 강조하시며 교훈하신 12절(눅 14 :11; 18 :14)말씀의 메아리입

니다.

3. 일곱 가지 화(23 :13-36)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탄식을 표현하시면서 경고의 말씀에 이어

서 일곱 가지 화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미국 표준역 성경과 다른

신뢰할 만한 번역들이 14절을 생략했기 때문에 일곱 가지 화라고 이야기 합

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러한 정죄의 말씀이 평범한 죄인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자들

에 대해서는 동정과 은혜로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부끄러움을 모

르는 종교적인 외식자들, 다시 말해서 주님을 배척함으로써 천국 문을 사람

들 앞에서 닫고 예수님께 충성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출교해 버리겠다고 위

협한 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요 9 :22 ; 12 :42). 이러므로 그들은 자기

자신이 영원히 잃어진 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영원히 잃

어진 자들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심판이 기다

리고 있는지요!

그들은 이외에도 교인을 한 사람이라도 더 얻어서 그들의 숭배자로 만드

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교인은 물론 개종자를 의미하며 서기관과 바리새

인들은 이들을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과 비용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

다. 하지만 그들은 개종자를 천국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선

생보다 더 나은 자가 되고 싶어하는 개종자의 성향을 이용하여 개종하기 이

전보다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 되게 했습니다. 그 개종자는 개종하기 이전

에 지은 죄에 바리새인의 외식과 불신을 본받음으로써 생긴 새로운 죄를 더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더 큰 심판을 받을 자가 된 것입니다(15절).

세 번째 "화"는 16-22절의 책망과 소경된 인도자들이 행한 어리석은 일

들을 폭로하는 말씀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준으로는 성전이나

제단 심지어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로서 그것으로 맹세하

는 사람은 어떠한 의무감도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전의 금이나

혹은 제단 위에 있는 물건으로 맹세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주

님께서는 이러한 궤변을 즉시 깨뜨리셨습니다. 실제로는 성전이 성전의 금

을 거룩하게 하며, 제단이 제단 위에 있는 물건을 거룩하게 하며, 하늘이 하

늘의 보좌를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이나 제단 및 하늘로

맹세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맹세입니다.

그다음 언급된 세 가지 "화"(23-28절)는 종교적인 외식자들의 마음을 아

프게 찌르는 것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숨은 진정한 동기가

무엇인지를 지적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심지

어 뜰에 있는 가장 작은 향료 식물들의 십일조까지 정확하게 하나님께 바쳤

지만 삶에 있어서의 더 중요한 도덕적인 명령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

다. 그들에게는 박하의 잔 가지가 자비를 행하는 것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

었습니다! 잔과 대접의 겉은 윤이 날 정도로 깨끗하게 닦으면서도 속에 있

는 더러운 것들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또

한 무덤 속의 더러운 것들을 그 앞에 잘 꾸며서 세워놓은 묘비 하나로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들과 같았습니다!

29-36절의 일곱 번째 "화"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내리는 마지막

판결과 선고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엄숙한 말씀을 대할 때 그

중요성이 우리에게 깊이 각인(刻印)될 수 있도록 음미하며 숙독해야 합니

다. 이 외식하는 자들은 그들과 조상들의 관계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자기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행한 범죄와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

은 값비싼 무덤과 비석으로 선지자들을 공경하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29,

30절).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선지자들을 죽인 자들의 후손이며, 그

들 자신이 곧 여태까지 쌓아 온 이스라엘의 오랜 범죄를 완성하게 될 것이

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깨우쳐 주셨습니다. 32절 말씀은 창세기 15 :16의 메

아리입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는 사건으로 이어질 갈보리에서의 범

죄는 그들이 지을 죄의 양(量)을 채우게 될 것이며, 그들이 바로 자신들을

향해 넓은 입을 벌리고 있는 지옥의 문 턱에 선 겉만 아름답게 장식한 독사

라는 사실을 드러내 줄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피로 얼룩진 이스라엘의 과거에 대한 말씀 이후에 그들의 미

래에 대한 예언이 이어집니다. 조상들이 지은 범죄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 바로 그들은 얼마 후에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 할 것이며(34절), 가

장 무서운 심판을 기다리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35, 36절).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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