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소식]
인생 문제의 해결자는
하나님뿐이심을 아는가
- 허 윤욱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창 29:32).
사람들은 자기의 아픔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호소하여 위로를 받고자 한다. 사람은 사람의 호소를 듣고 저들의 눈물을 닦아주고자 하나 그것은 임시조치일 뿐 참된 위로가 되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또 저들의 문제를 풀어도 온전한 해결의 열쇠는 인생에게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고뇌다. 어떤 경우 물질적인 문제나 환경적인 문제는 인간이 인간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려니와 본질적인 문제는 아무데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고생하고 지쳐 어찌할 수 없을 때 하나님에게 나오곤 한다. 필자는 이러한 사람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인생은 지혜로운 것 같으나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른다. 자신이 풀 수 없는 수많은 문제 앞에서 절대자의 필요성을 조금만 생각하면 곧 알 수 있다. 그러나 별 뜻 없이 그냥 현실에 닥치는 대로 살다가 문제에 부딪쳐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인간의 교만함과 고집스러움은 스스로 망할 길을 재촉하는 것이다. 얼마나 슬픈가.
이번호에는 야곱의 아내 레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위로하심을 생각해보기 바란다.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보내야 하는 레아의 이야기는 오늘날 소망없는 세상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야곱은 라헬을 지나칠 정도롤 사랑하되 레아에게는 사랑을 주지 아니했다. 실제로 야곱은 레아를 아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사랑을 주지 아니했다.
레아는 아버지의 추천으로 첫 번째 아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의 견제를 받으며 남편에게 푸대접을 받는 슬픈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은 거의 의무적으로 레아의 방을 출입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성경에 의하면 라헬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은 분명 아닌데 라헬에게는 아이가 없고 레아에게는 아들을 주셨다. 레아는 아들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하였디. 뜻은 '보라 아들이라' 는 뜻이다. 레아가 얼마나 서럽고 힘들었으면 '보라 아들이라' 고 이름을 지었을까. 그런데 신기한 것은 거의 밤마다 같이 지내는 라헬은 아이가 없고 의무적으로 드나들고 있는 레아에게는 아들이 있었으니 의아하지 아니한가.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과 관계가 있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레아는 자기의 아픔을 하나님께 호소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라헬은 그렇지 아니하였다. 후에 라헬도 하나님과 사람에게 호소하여 자녀를 낳게 되는 것을 본다.
사람이 자녀를 낳는 것은 인간의 일같이 여길 수 있으나 그러하지 아니하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레아의 눈물과 고통을 들으시고 그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셨다. 생명의 문제를 비롯한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인간 스스로 이루어 나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나 그렇지 아니하다.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이렇게 외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이 말씀의 참 뜻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이 말씀은 인생의 모든 문제는 주님이 해결자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주님 이외에 인생의 문제에 대하여 아무도 풀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누구든지 다 내게로 오라." 다른 데로 갈 생각조차 하지말라. 다른 곳에는 해결자가 전혀 없다. 오직 나에게로 오라. 나 외에는 결코 해결책이 없다는 뜻이다. 이방인은 이러한 말씀을 교만하다고 비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 그러하다면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교만한 것이 아니다. 진실일 뿐이다. 생각하여 보자. 인생 중에 누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지고 고통하는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 문제를 풀어 놓겠다" 고 한 이가 있는가. 아무도 없다. 감히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인생은 자신의 문제도 스스로 풀 자가 감히 없는 것이다. 그러한 해결사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없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하나님의 참 아들이시다. 그분은 창세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분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분은 전능자(全能者)이시다. 모든 것을 마음대로 행하시는 분이시다. 여러분이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여러분이 지금 들고 있는 돌을 금덩어리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신 분이시다. 믿어지지 않아도 믿어야 한다. 그러기에 주님만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는 누구든지 무슨 문제든지 상관없이 오라" 고 하실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두 번째로, 이러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있어야 그들의 아픔을 고쳐주고 그들의 눈물울 닦아주고 그들의 문제를 풀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정 긍휼이 있는 분이시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103:8). 하나님의 긍휼을 인간이 어찌 다 말로 하랴.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인간을 위하여 창조주의 신분을 내려놓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것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그 자비로우심으로 인간을 살피시고 돌보아주시는 것이다.
성경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참으로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나인이란 성을 지나시는 중에 청년이 죽은 장례행렬을 보셨는데 그는 과부의 아들이었다. 얼마나 슬프고 애통한 장면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고 슬퍼하고 무덤을 향하여 장사지내러 가는 중이었다.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눅 7:12). 아들의 죽은 것도 슬픈데 그는 독자다. 또한 그녀는 과부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우리 주님께서 그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음은 당연한 모습이다. 주님은 그들을 길 가운데 멈추게 하시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셨다. 그리고 그 청년은 일어나 걷고 말도 하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아났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성경의 다른 환자들은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할 때 도와두었지만 이 경우만은 주님이 스스로 그를 만나주셔서 해결해주셨다. 이 일에 대하여 성경은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라고 증언하고 있다. 주님은 저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셨다.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와서 위로했지만 무슨 도움이 되었는가? 무슨 소용이 있었는가? 아무런 효과도 없이 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시신을 들어다가 묻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저를 살리시므로 과부를 근본적으로 위로해주셨다. 얼마나 놀라운가.
그런데 불경에도 이와 같은 똑같은 사건이 나온다. 법구경에 보면 어떤 인도 여자의 아들이 죽었는데 그는 역시 과부였다. 갑자기 아들이 죽자 그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아이를 살리기 위해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호소했다. 아무도 그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여 그는 여러 날 다니다가 어떤 무리를 만났다. 그들 중 하나가 "우리가 어찌 문제를 해결하겠는가. 저기 나무아래 도를 닦는 석가모니에게 가보라" 하였다. 그 여인은 석가모니를 찾았다. 석가모니는 아이를 살려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사람이 한 번도 죽지 않은 집에 가서 겨자씨 한 움큼을 얻어오라" 하였다. 하루종일 다녔지만 얻지 못했다. 물론 겨자는 얻을 수 있었지만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석양에 힘없이 걸어오는 여인에게 석가가 물었다. " "얻었는가." "겨자씨는 얻을 수 있었으나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없었습니다." 그때 석가는 한마디 내뱉었다. 생자(生者)는 필멸(必滅)이라.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여인은 그 후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니 그가 비구승 제2호 끼사 꼬따미라는 여인이었다. 석가도 그 여인을 돕고 싶었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불교는 인간이 만들었고 기독교는 신이 만들었다. 이것이 근본적인 차이다.
사람들이 수많은 종교를 만들었지만 저들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는데 실패했다. 다만 인간에게 강하게 살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얼마큼 나아진 삶을 살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종교로는 어림도 없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레아의 고통을 해결해주신 것처럼 그리고 그 후 라헬의 눈물을 닦아준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시다.
세 번째로 주님은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하셨다. 주님이 세상에 오심은 인생들을 죄의 속박에서 자유케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인생에게 쉼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이 세상에 사람들이 얼마나 피곤하게 사는가. 인생의 고뇌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하겠는가? 그와 같은 인생들의 고뇌는 사람을 피곤하고 지치게 하여 고통 중에 살게 하다가 결국은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에 들게 한다.
끝으로 세 가지 쉼을 생각해 보고 글을 줄이려 한다. 첫째는 먼저는 인생의 모든 불안과 고통으로부터 쉬게 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 당장 내일 아침에 나의 삶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늘회사의 미래를 염려하여 근심 속에 불안해한다. 아이를 학교에 보낸 부모는 돌아올 때까지 불안하다. 자식이 없으면 노후가 불안하고, 자식이 있으면 그로 말미암아 수많은 불안이 생성되는 것이다. 돈으로 말미암은 불안, 인생은 불안 속에서 고통 속에서 고통 중에 방황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1). 주님은 실제로 인생의 모든 문제에 온전한 해결사이시다. 여러분이 믿어 경험하시기를 바란다. 필자는 늘 그 속에서 산다.
둘째로 쉼은 무엇인가. 죄로부터 쉼이다. 인생 중에 죄책감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가령 죄책감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인생은 죄의 고통으로 고생하며 사는 것이 본질이다. 간단하게 실험해보면 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욕심이 있다. 그 욕심이 인생의 삶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게 하는가. 욕심은 속이게 하고 빼앗게 하고 다투게 한가.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수많은 문제를 야기하여 인생을 피곤하게 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악의 형벌에서 벗어나 하늘의 기쁨으로 살게 하신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벧전 2:24) 세상에 아무도 인생이 지은 죄를 해결해줄 수 없을 때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생들의 죄를 해결하여 주셨다. 이제 우리는 정죄에서 벗어나 쉬어도 된다. 우리를 정죄할 아무런 세력이 없다. 사탄과 그의 종들은 놀라 충격을 받았으며, 십자가로 죄에서 벗어난 성도들을 어찌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이 놀라운 선언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을 단번에 쉬게 한다. 하늘에나 땅에나 땅 아래나 어느 누구도 어떤 세력도 십자가로 죄용서 받은 성도들을 정죄할 수 없다.
세 번째로 쉼은 천국에서의 삶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속죄는 영원불변하고 그러므로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온 인류가 수 천 년 동안 그렇게 그리고 사모하였던 낙원이 회복되는 것이다. 눈물이 없고 아무 근심도 없으며 모든 슬픔이 영원히 사라진 곳이다. 이것은 몽상이 아니다. 그냥 막연한 종교적 약속도 아니다. 잠시 후에 일어날 실제 약속도 실제 상황을 미리 말씀드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은 다 십자가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지 않으셨으면 이와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밀이라고 성경이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 1:27).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비밀로 끝나면 여러분은 영원한 지옥에 던져지는 것이다. 회개하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달아 구원 받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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