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전략]
말씀을 받았느냐?
- 허윤욱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 1:23).
말씀을 통하여 구원받는 것임을 구원받은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런데 학생들이 고통당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어떤 말씀으로 구원을 받았느냐" 하고 묻는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이러한 질문에 냉큼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으면 구원받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문제가 없는가? 이번에 검토해보고 싶다.
어떤 학생이 자기는 침례상담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이유가 무엇인가 물으니 구원 받은 말씀을 말하라고 해서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니 떨어졌다고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분명히 믿고 구원 받았지만 앞으로도 또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말씀을 들어온 자기는 어떤 말씀을 짚어 말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분명히 믿는데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속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고로 말씀을 받아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결코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그렇게 질문하며 침례 상담하는 것을 잘못한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세밀하게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복음을 배워온 학생들을 중심으로 논하고 있음을 먼저 밝혀 두는 바이다. 먼저 학생들이 말씀을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 보고자 한다. (말씀을 분명하게 말하는 학생들도 있다)
첫째는 저들이 믿게 된 경우가 특별하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복음을 들어왔기 때문에 어느 순간을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분별하는 지각 능력이 약할 때에 주입식으로 말씀을 들었는데 어느 때에 믿었는지 모르게 믿었다는 것이다. 상황이 그러니 믿기는 믿는데 어느 때 믿었는지도 모르겠고 또한 어떤 말씀을 말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냥 알고 있는 아무 말씀이나 말하는 것은 이상하며 거짓말 같은 생각도 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아이들이 말씀을 들을 때에 어떤 놀라운 경험을 한 적이 없는데 그냥 순수하게 믿었는데 이것으로는 안 되는가 하는 고민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빠져 있는 아이들이 기쁨으로 교회에 출입하며 즐거운 신앙생활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믿음이 없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나타난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는 변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저들은 이와 같은 구원 받은 증거를 말씀에서 말하라는 압박 속에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 기회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이 구원 문제, 즉 기본에 헤매고 있기 때문에 신앙의 다음 단계로 오르지 못하는 것이다. 초보에 계속 머물러 있으니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말씀에서 구원의 증거를 찾으려하나 그러한 태도로 말씀을 보면 그냥 책을 읽는 수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속에서 신앙심이 일어나며 그로 기쁜 삶을 살게 되는 신앙의 역동성을 저들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세 번째는 말씀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저들은 말씀을 받으면 마음이 뜨겁고 기쁨이 넘치는 어떤 가정적 경험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필자는 학생들을 만나서 만약 꿈속에서나 길을 걸어가는 중에라도 아브라함처럼 공중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나하고 물으니 그랬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한 생각을 가진 학생들 중에는 성경을 읽어도 어떤 감정적 느낌을 기대하면서 읽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전도 집회를 참석하여도 그러한 느낌을 기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말씀을 읽거나 듣는 중에 갑자기 뜨거운 감동이 밀려오고 눈물이 쏟아지며 기쁨이 충만한 경험을 사모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는 지난 번에 믿는 것과 아는 것을 혼돈한 아이들의 경우와 같은 현상도 거의 겹쳐서 일어난다. 저들은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순종하여 말씀을 배워왔고 순종하여 왔다. 그리고 착실하게 믿어왔다. 의심도 없다. 거부 의사도 없다. 말씀을 들으면 거부반응도 없다. 어느 때 전도 집회에 말씀을 들으면서 울었던 적도 있다. 친구에게 맹렬하게 복음을 전한 경우도 있다. 자신은 믿는 부모 밑에서 복음을 듣고 믿으니 얼마나 축복을 받았는가 하고 감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말씀을 받은 경험이 없으니 아직 구원이 아니다 라는 생각에 잡히면 교회에 가기 싫을 때도 있다. 그러면 그때마다 "저게 언제나 정신 차리고 구원 받겠는가" 하는 질책이 부모로부터 당장에 돌아온다.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하여도 그러한 분위기를 만나게 된다. 싫다.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원망도 불평도 한다. 그러나 겁난다. 정말 내가 구원 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렇듯 고뇌를 가지고 우리의 학생들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네 번째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저들은 말씀을 깨달았다는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학생이 자기는 말씀을 다 믿지만 정말 말씀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에게 하나님이 어디계시냐 하고 물으니 "하늘에 계신다" 고 답하였다. 아니라고 하니 그러면 "세상 모든 곳에 그리고 내 맘속에 계신다" 고 하였다. 아니라고 하니 말을 못하는 것이다. 나는 그때에 요한복음 1장 1절을 읽어주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리고 또 물어보았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그는 1절을 천천히 다시 읽더니 "말씀 속에" 라고 하였다. "아니다" 고 하였다.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나는 성경을 들고 있었다. "물론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고 우주 만물에 충만하신 하나님인 것을 내가 믿으나 그러나 그가 누군지 어떤 분인지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알 수 있는 하나님은 바로 성경이다" 하니 그가 "아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셨고, 십자가에서 용서되었다고 하셨고,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고, 그것은 곧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하신 것이다." 여기까지 듣고 그는 구원을 받았다고 기뻐하는 것이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신 것을 인식하면 당장에 풀리는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할까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다시 말하자면 말씀을 받지 않았다고 구원받음을 인정치 아니함의 문제가 무엇인가 생각해보고자 한다. 필자는 어떤 젊은 전도자를 만났는데 그는 "받은 말씀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구원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그가 십자가 속죄를 부정하던가?"
"아니다. 믿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또 물었다. "부활을 부정하던가?" 그는 또 "아니다 믿는다고 말한다" 고 하였다. 그래서 물었다. "그렇다면 십자가 속죄나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내용이 사서삼경에 나오는가, 아니면 불교 경전에 나오는가?" 그는 말하기를 "물론 그런 곳에는 없지요. 성경에 있지요." 하였다. "그러면 그가 말씀을 받았네.그는 성경을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어느 성경 몇 장 몇 절의 말씀을 이렇게 깨달았다고 하면 구원이고 그것을 말하지 못하면 구원이 아닌가? 십자가를 믿으면 성경을 믿는 것이요, 부활을 믿으면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에 관한 말씀을 받은 것 아닌가. 꼭 몇 장 몇 절을 말하면 구원이고 아니면 수상하고 이러한 전도 태도는 위험하고 모순이 있다. 만약 구원이 불분명한 학생이 장절을 당당하게 말하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침례를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그러한 경우들이 상당히 있는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필자는 상당한 학생들이 자기는 어느 성경 몇 장 몇 절로 구원받았냐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여 인정받지 못한다고 호소해 올 때마다 기가 막힌 생각이 든다. 전도는 엄청난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그 누구도 어떤 사람도 "전도는 이것이다" 라고 말하기는 힘들다고 필자는 깨닫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 몇 장 몇 절로 구원 받은 것을 알고 있다. 필자도 요한복음 16장 8-9절로 구원을 받았다고 늘 간증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그러하니 다 그래야 된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어떤 전도자를 만나서 필자는 이렇게 물었다. 그는 말씀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전도자였다. 필자는 물었다. "그러면 글자를 모르는 노인들이나 글자를 안다고 하여도 노인들은 기억력이 없는데 그런 사람들은 몇 장 몇 절을 말하지 못하는데 구원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가?" 그는 노인의 경우는 그냥 믿음이 확실하면 침례를 주어야 한다고 했다. 필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적용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노인은 되는데 어린이나 학생들은 안 되는가? 노인의 경우가 그러하면 학생들의 경우도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전도는 엄청난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구도자들의 상태는 천태만상이다.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구도자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학생들이거나 노인이나 장년 할 것 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진정 십자가의 사랑을 진지하게 깨닫고 있는가, 죄 용서함을 받은 믿음이 그 속에 있는지 진지하게 하나님의 창조를 믿고 지옥, 천국을 확실하게 믿고 있는지 등 이런 부분을 살펴야 할 것이다. 저들이 믿는다고 하는 고백을 할 때에 그것의 진정성을 살피는 일이 더 중요한 것이다. 학생들의 경우는 어려서부터 점진적으로 말씀을 듣고 믿어 와서 현재에 이르렀으니 저들이 특별이 가슴에 새겨진 말씀이 없이 그냥 어느 순간 자신은 믿는자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인들은 말씀 구절을 말하지 못하여도 괜찮다 하면서 학생들에게는 말씀을 강력하게 요구한다면 그것은 불공평한 것이요 논리적으로도 안 맞는 것이다.
필자는 아이들에게 전도하면서 구원의 주체는 누가 뭐라고 하여도 자신이라고 일러준다. 실제로 부모라 할지라도 제삼자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모의 말씀도 구원에 관하여는 우선 취급하지 말라. 자신의 양심과 인격으로 진정 믿었는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부모에게나 주변에서 인정받았다 할지라도 구원이 아닐 수도 있고 인정받지 못하여도 구원 받았으면 받은 것이라고 강력하게 짚어주면 기뻐하며 돌아가는 학생들이 많다. 실제로 구원은 하나님과 자신의 문제가 아닌가? 여러번 강조하고 또 말하거니와 학생들의 구원 문제를 가장 잘 도와주는 것도 부모요 가장 어렵게 만드는 것도 부모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부모는 가장 가까이 있으며 가장 깊이 연관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애정을 가지고 있기에 무관심할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러다보니 도와주는 차원을 넘어 주관하는 차원으로 가기 쉽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누구든지 구도자를 돕는 것이지 그의 구원을 주관할 수 없다. 구원의 주체는 구도자 자신이요 책임도 자신이 지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과 육신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전도의 원리에 따르기보다 자신의 감정에 치우치기 쉽다. 전도자의 냉정함을 부모가 가지기는 쉽지 않다. 말씀을 받았는지 아닌지 자신의 양심 속에서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필자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캠프에서 구원을 받아도 집에 가서 부모님들에 의해서 또 흔들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필자의 신앙 양심으로 생각할 때 구원의 문제는 부모라 할지라도 어찌 할 수 없다. 학생들이 구원의 문제로 고생하게 되는 이유의 상당 부분이 부모님들에게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필자의 이와 같은 분별에 다 동의할 수는 없다고 본다. 다만 많은 경우에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구원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많은 경우 부모님이 구원의 길에서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부모의 역할에 대하여 길게 써서 죄송하나 이 부분이 학생 전도에서 너무나 중요한 현실이기에 반복하여 썼음을 이해하기 바란다.
전도는 다양성이 있고 구도자 또한 다양성이 많기 때문에 필자의 의견이 다 맞을 수는 없다고 본다. 자식을 인도하는 부모나 학생들을 돕는 교사들에 참조가 된다면 그것으로 족할 뿐이다. 주님의 은혜가 모두에게 있기를 기도드린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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