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 심판과 노아의 믿음과 방주가 주는 교훈(창 6-7장)
노아홍수의 성경적 의미를 세 가지로 요약하면
첫째로 홍수는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심판이요 인간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심판한 것이다. 인간의 교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이 무서운 진노 가운데서 한 가정을 구원하시므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보여주신다.
셋째로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임한다. 노아 홍수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만 아니라 마지막 심판의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자.
1. 노아시대 영적 도덕적 상태는 어떠한가?
(1) 택한 백성들이 타락한 모습을 보여준다.
6:2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온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경건한 아벨과 셋의 후손으로 본다. 그들이 타락한 가인의 후손들이 누리는 삶을 보고 그것에 성별되고 저항하는 삶을 살기보다 세속적인 삶을 따라가는 것을 본다. 5장의 가인의 후손들의 삶을 보면 찬란한 문명과 문화의 발달과 함께 세상을 재미있게 잘 살고 마음껏 누리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없이도 저렇게 잘 살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이 그들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허구한 날 아벨처럼 피의 제사를 드리고 오늘날로 말하자면 주일예배를 드린 것과 같다. 또한 세상 사람들 중에 관능적이고 육체적인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고 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들로 아내를 삼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로 얘기하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는(고후6:14) 불신결혼과 같다. 또한 자기가 좋아하는 여러 여인들을 아내로 삼는 가인의 후손들처럼 일부다처가 들어오고 있었다. 성의 타락은 그 시대의 영적 도덕적 상태를 가장 잘 보여준다.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오직 말씀을 붙잡고 살아야 하는데 그들은 말씀을 떠나므로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게 된 것이다.하나님이 주신 행복에 만족하지 않고 세상행복을 쫓다가 6:3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지 아니하는 벌을 받게 된다. 오늘날 성도들의 위기는 서서히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고 예배를 소홀히 하고 교회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소홀히 하고 돈과 세상지위와 쾌락이 크게 보이므로 그것을 쫓아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노아시대는 이런 세속주의가 보편화되어 극에 달하고 있었다.
(2) 그 시대는 무정부사회가 되고 있었다.
6:4절에 네피림이 나온다. 그들을 용사라고 했고 명성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것은 영웅주의를 말한다. 그들은 살인과 폭력을 주도한 사람들이다. 지금은 어느 시대보다 권력과 힘을 숭배하는 시대다. 그것이 돈의 권력이 되었든 정치권력이 되었든 힘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곳에 부패가 만연하게 된다.
(3) 이러한 타락을 보고 하나님께서 한탄하신다.
6:3절에는 하나님의 신이 사람을 떠나고 그들의 연수를 120년으로 한다. 또한 6:5절에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고 근심하사 지면의 모든 창조한 사람과 피조물을 쓸어버릴 것을 작정하신다.
2.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5:29절에 노아라는 이름은 안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노아가 의인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그가 죄가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성을 가지고 있어서 끊임없이 실수와 범죄를 하게 된다. 노아도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었다. 그런데 무엇이 다른가?
(1)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 타락하여 살고 싶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개입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은혜의 언약을 그에게 주셨다. 히11: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집을 구원하였다. 여기서 의인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완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의인의 기준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경외함과 믿음으로 순종하였다. 히브리어의 순종이란 온 인격으로 청종한다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는 태도를 보였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든지 지연하는 경우가 있다. 그 시대는 비가 아직까지 오지 않은 때였다. 그 시대의 상식과 과학과 이성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방주짓는 일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은 조롱과 회유와 핍박을 하였다. 노아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큰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말씀을 굳게 붙들고 타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어떠하든 상관하지 않고 말씀에 이끌려 살아갔다. 그것이 노아가 의인이란 얘기다.
(2)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를 가까이하고 교회생활을 가까이하는 자는 세상과 죄에서 멀어지게 된다. 죄란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라 내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다. 6:12절에 하나님이 보신즉 세상이 부패하였다고 한다. 하나님이 죄를 어떻게 보셨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이 죄라고 하면 죄다. 사람은 자기기준과 판단으로 죄를 정의한다. 자기 나름대로 각자생각에 살고 있다. 6:13절에 이런 죄악된 세상을 멸하기로 말씀하신다. 과거에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였지만 역사의 마지막에 불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다(벧후3).
3. 홍수의 심판과 노아방주로 인한 그의 가족의 구원
(1) 하나님께서 노아가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방주를 지을 것을 명한다.
방주의 규격을 자세히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방주의 설계도를 보여주신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이 말씀 하신대로 백여년 동안 그 설계도대로 방주를 짓게 된다. 6:22절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믿음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말씀하신 그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고 그 말씀에 충실하게 방주를 지었다. 방주는 예수님의 모형이기도 하다. 그시대에 사람을 구원할 방법은 방주밖에 없었다. 주님만이 인간의 유일한 구원자이시다(요14:6, 행4:12). 또한 이 방주에는 오직 문이 하나만 있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문이시다(요10). 또한 이방주의 창도 하나만 있었다. 빛이 들어오는 것은 창이듯이 주님만이 우리에게 빛이 되신다(요8:12). 상중하 3층이듯이 믿음의 수준이나 분량이 다 다르다. 방주안에 여러칸들이 있듯이 주님을 믿는 신앙의 스타일이 다 다르다. 방주에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다 들어갔듯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 그리스도안에 들어올 수 있다. 방주는 가장 안전한 배인 것을 현대조선전문가들에 의해서 입증되었다. 방주안은 그리스도안이고 방주 밖은 그리스도밖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정죄와 심판을 면한다(롬8:1). 그시대 물은 하나님의 심판용이요 또한 그 물이 우리를 구원하는 물이 되었다(벧전3:20-21).
(2) 하나님 말씀대로 노아 600세되던 해에 홍수가 있게 된다.
노아 가족8명은 방주로 들어가고 정결한 짐승 부정한 짐승 새들이 다 방주로 들어가고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다. 7:16절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마감된 것이다. 지금도 주님의 때가 다 되어가고 있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문이 닫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방주에 몰려와 애원하고 탄식하고 후회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 방주안에서 노아가족은 방주가 흔들리고 천둥과 비가 쏟아지는 소리에 마음의 요동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 방주안은 가장 안전한 곳이다.우리가 어떤 환경에서도 말씀을 붙들면 요동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그 무엇도 우리를 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것에 소망을 두거나 만족할 수 없다. 주님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참된 행복과 평안은 주님안에서만이 가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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